2012년 11월 5일 월요일

사실에 가까워야 완벽한 미술

사실에 가까워야 완벽한 미술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미술론이 하나의 이론으로 성립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다. 다빈치와 같은 화가를 중심으로 미술이 예술의 한 분야로 점차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르네상스시대의 미술론의 원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미학 담당) ⓒScience Times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3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오병남 서울대학 명예 교수는 ‘고전주의: 이성과 규칙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주제로 두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미술을 미(美)의 개념과 결부시키는데 성공
르네상스시대에는 회화, 조각, 건축으로 대표되는 미술이 ‘아름답다’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미술을 미(美)의 개념에 결부시키는데 성공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르네상스 이론가들은 “미술”이라는 말과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말하면 르네상스는 미술에 대한 미적 의식을 자각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를 통해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의식이 싹트고 자라왔다. 대표적으로 종교적 의식, 윤리적 의식, 그리고 철학적 의식, 과학적 의식 등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서 뒤늦게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회화나 조각 및 건축에 대한 경험이 “아름다운” 것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를 쓰자면 “미적 의식”(aesthetic consciousness)의 자각이다. 이 시기가 르네상스이고, 르네상스는 잠재되어 있던 그 미적 의식에 의한 로마 미술의 부활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발전된 것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고전주의 미술이다.

그렇다면 고전주의 이론가들이 말하는 미술의 원리는 무엇인가? 우선 고전주의 미술은 도덕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라야 했다. 실제로 르네상스는 기독교 차원에서 볼 때는 세속적이고 지나치게 이교적이었다.

인간교화를 목적으로 한 르네상스의 미술
르네상스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종종 쾌락적이고 방탕하였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볼 때는 르네상스는 도덕적 각성이었다. 미술은 보편적 인간상으로서의 이념의 모방이었다. 그러한 이념은 지고지순(至高至順)의 가치다. 따라서 어느 누구나 다 추구할 만한 미(美)라고 할 때, 그러한 미의 모방인 미술은 도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약 미술이 훌륭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감상되고, 이러한 감상이 미술제작의 목적이기도 했다면 르네상스는 미술이란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의무를 자각한 입장에서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인간교화를 목적으로 한 미술을 그들의 주제로 설정하는 데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르네상스 이후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서구미술의 주종이 풍경화보다는 인물화 • 역사화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아카데미 지론에 따르면 풍경화는 고상한 사건이나 이념을 구현하기 힘든 장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산수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동양미술과 르네상스 전통의 서양미술 간의 차이를 지적할 수도 있다. 따지자면 양자 간에는 자연을 바라보는 개념에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전주의는 이념의 모방, 즉 이상을 추구하는 미술이었다. 자연에 거울을 갖다 댄 것처럼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의무로 요구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한 것이어서 인간이 통제하고 극복해야만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자연이라는 시각으로 볼 때 개인의 신체는 이상적 인간의 미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회화와 조각은 결함 많은 개별적 인간이 아니라 이상적 인간을 모방하고자 했다. 쉽게 이야기 해서 개성이 강하고 파격적인 인물이나 장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품격 있는 완전한 인간을 그려야 했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얼마큼이나 도덕적이고 교화적인 목적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하나의 사례가 있다.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극작가이자 풍자문학가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 1492~1556)와 미켈란젤로 간에 있었던 아주 유명한 논쟁이다.
▲ 르네상스시대의 걸작인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의 중간부분. 엄격하고 냉정한 얼굴로 심판을 내리는 예수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를 포함하여 많은 인물들이 나체로 등장, 외설시비에 휩싸이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외설이라는 비평에 휩싸이기도
미술 비평가로도 명성이 높았던 아레티노는 베네치아에 정주하면서 돌체(S. Dolce)와 함께 당시의 권력가들을 풍자하는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대표작으로 ‘서간집’, ‘오라치오’ 등이 있다. 당시 좀 유명한 사람들이라면 항상 이들의 비평 대상이 되었다.

전문가들은 아마도 이것이 가장 초기의 아마추어 비평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아레티노는 당시 이 같은 비평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미술작품 역시 마찬 가지였다. 비평을 수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술가들은 그 때문에 그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자시들을 미술의 후원자라고 생각했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미술가들은 그와의 친분을 원했으며, 그에게 스케치와 그림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가문의 출신인 미켈란젤로만은 그와 가까워지려는 아레티노의 노력을 회피하였다.

아레티노는 베니스에서 미켈란젤로에게 정기적으로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을 통해 미켈란젤로와 대등한 입장에 서고자 했으며, 마치 천재의 신임을 받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려는 듯 회화에 대한 그의 지식을 재치 있게 보여주고자 했다.

이에 반해 미켈란젤로는 단 한 번의 답장을 주는 데 그치고 말았다. 답장을 받고 아레티노는 우쭐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더 이상의 대꾸를 하지 않은 채 그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상처받은 아레티노는 격분했고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거의 6년 동안이나 거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는 중 아레티노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의 경향과 함께 미술에서도 청교도주의가 부활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풍조에 편승하여 아레티노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그려진 나체상을 공격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르네상스 비평가들이 미술에 부여해 놓고 있는 도덕적 입장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세례 받은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당신이 우리의 모든 진실된 신앙이 열망하는, 이른바 그 종말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행한 극악무도한 파격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 아마도 당신은 신성한 허식 하에 동료의 우정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며, 교회의 위대한 추기경, 신부님, 교황께서 예배를 거행하며 성경을 낭송하며 기도하고 고백하고, 주의 육체와 살과 피를 숭배하는 그 위대한 신전을 위해 그것을 제작하였을 것이 아닌가? …… 심지어는 나체의 비너스를 묘사하는 이교도들조차도 가려야 할 부분을 손으로 덮어 가리고 있지 않은가? …… 우리의 영혼은 쾌활한 그림보다는 헌신적인 측면을 더욱 필요로 한다는 점을 기억하라.

한마디로 「최후의 심판」은 외설이라는 것이다. 교황 바오르4세는 이 서신이 외치고 있는 강렬한 항의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미켈란젤로에게 ‘최후의 심판’을 수정할 것을 명하였다. 어쩔 수 없이 복종해야만 했다.

때마침 프랑스의 국왕 샤를 8세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 왔다. 그는 볼로냐로 도피했가. 그래서 이 굴욕을 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아레티노의 비난과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미술의 목적이 도덕적이라는 생각을 굳게 갖고 있었던 화가였다. 또한 아레티노 역시 인간성을 추구한 풍자 문학가였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11.0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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