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0일 월요일

갑오경장, 근대사의 획기적인 전환점

갑오경장, 근대사의 획기적인 전환점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8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한국 근현대사)는 ‘갑오경장에 대한 오해와 이해’라는 주제로 그의 두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10년 후인 1894년, 갑오년은 동학농민봉기, 갑오경장, 청일전쟁과 같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 해였다. 동학농민봉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크고 격렬했던 민란이었고,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전쟁이었다.

갑오경장은 조선 시대 최대 규모의 제도 개혁운동이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1894년이야말로 한국 근대 역사에서 가장 다사다난했던 해로서 1945년의 해방만큼 획기적인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갑오경장은 자율적인 개혁운동
▲ 유영익 한동대 명예교수(한국 근대 정치사) ⓒScience Times
일반적으로 갑오경장은 일본이 주도한 타율적인 개혁운동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운동의 진행 과정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갑오경장은 시종일관 타율적으로 추진된 개혁운동은 아니었다. 적어도 반 이상 한국인이 주도권을 쥐고 자율적으로 추진한 개혁운동이었다.

갑오경장의 진행 과정에서 한국인의 능동적 역할을 재조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데, 결국 이 운동에 참여한 조선인 추진 세력이 1884년 갑신정변의 정신을 이어받고 1897~1898년의 독립협회 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운동이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과 역사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갑오경장(1894~1896)은 청일전쟁 중 일본의 대한(對韓)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추진된 개혁운동이었다. 따라서 갑오경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배경인 청일전쟁의 발발 경위와 전쟁 발발 뒤 변화한 일본 정부의 대한정책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1894~1895)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중국 중심 세계질서(Sino-centric world order)’에 종지부를 찍고 신흥 일본을 이 지역의 패자로 부상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청일전쟁, 동아시아 질서를 개편하다
또한, 이 전쟁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이권 확대를 노리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 등 열강의 영토 분할 경쟁을 부추긴 결과도 낳았다. 이로 인해 조선은 뿌리 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났지만, 전쟁 전후 일본군에 국토를 강점 당한 처지에 놓여 임진왜란 이래 최악의 수모와 수난을 당했다.

1894년 4월에 전라도 무장에서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5월 7일 홍계훈(洪啓薰)에게 농민군을 진압하도록 조처했다. 그런데 장성에서 정부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해 31일 전주를 함락했다.

6월 2일 전주 함락을 보고받은 정부는 자력으로써 농민군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외세의 힘을 빌어야 하는 수모를 당했다. 리훙장(李鴻章)은 6월 6일 톈진조약(1885)을 근거로 일본에 파병 사실을 통고하는 한편 청군 2천800명을 충남 아산으로 급파했다.

6월 2일, 서울 주재 일본 임시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는 본국 정부에 ‘조선의 청국 파병 요청’을 보고했다. 때마침 중의원에서 내각 탄핵안이 가결되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 보고를 구실로 각의(閣議)를 열어 중의원을 해산하고, “일본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제5사단의 혼성여단(混成旅團)의 조선 파병을 결정했다.

이때 일본 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공고히 하고 ‘내정 개혁’을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반도에 대군을 파병하면서 실제로는 대청(對淸)전쟁을 도발하려 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계획에 따라 6월 6일 참모본부 내에 대본영(大本營)이 설치됨과 동시에 혼성여단의 선발대가 일본을 떠나, 9일 인천에 상륙한 다음 곧바로 서울로 진군했다. 그 뒤 6월 하순까지 8천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서울과 인천에 집결했다.

청일전쟁은 사실상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한 뒤 곧 서울과 수원에 배치된 조선 관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이어서 아산만 근처에 집결한 청군을 향해 진격했다. 청일 간의 본격적인 전투는 7월 25일 일본 해군이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청의 해군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이 해전에서 청국 군함과 청의 증원군을 태운 영국 수송선 가오룽(高陞) 호가 일본 해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이어서 29일에 벌어진 성환(成歡) 전투에서 일본 육군은 아산에 상륙한 청군을 쉽사리 격파할 수 있었다. 해상과 육상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자 일본 정부는 8월 1일 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청국 역시 같은 날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일본 정부는 열강의 간섭을 피하고자 가능한 한 빨리 승리를 쟁취하려 했다. 일본 육군은 9월 15~16일간에 평양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청군 1만 4천 명을 격멸하고, 해군은 9월 17일 황해 전투에서 청국 함대를 격침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평양과 황해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군은 곧바로 중국 본토 공격을 서둘렀다.

10월 하순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군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진격했고, 제2군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해 11월 하순 뤼순과 다롄을 점령한 다음 1895년 2월 2일 산둥반도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자리한 북양함대(北洋艦隊) 기지를 공격했다. 그 뒤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청은 일본이 요구한 대로 리훙장을 전권 대신으로 임명해 시모노세키(下關) 강화회담에 나섰다.
▲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동아시아의 질서가 바뀌었다. 한국의 종주국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그러나 이로인해 조선의 개화와 혁신운동이 거세어졌다. ⓒ위키피디아

3월 20일부터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 간의 강화회의는 3월 24일 리훙장 저격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열강의 간섭을 우려한 일본은 결국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라 부르는 청일 강화조약에 서명했다.

중국이 전통적으로 조선에 행사해왔던 종주권이 폐지됨으로써 조선은 중국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조약은 조선이 청국의 보호막에서 에서 벗어나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과정일 뿐이었다.

갑오경장은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조선의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1894년 7월 27일부터 1896년 2월 11일까지 추진했던 제도 개혁운동이다.

갑오경장을 담당했던 개화파 관료들은 대체로 개항 이래 꾸준히 조선의 개화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로서 갑오경장 기간 일본의 침략정책에 순응하면서 조국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인사들이다.

이들은 개항 후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 혹은 유학생으로 일본과 미국에 체재하면서 세계정세를 익히고 메이지유신으로 문명 개화한 일본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꽃피운 미국의 문화를 심도 있게 살펴본 끝에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달성에 필요한 개혁 방안을 고안하고 이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조선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과거를 치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중인이나 양반 서자들이 많았고 또 기독교에 개종한 인사도 있었다. 그들은 근대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신분제도를 타파함으로써 능력본위의 평등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했다.

갑오경장은 완전히 타율적인 개혁운동은 아니었다. 갑오경장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달에 여러 모로 크게 기여하였다. 갑오경장 중 일부 개화파 관료들은 일종의 의회 설립운동을 시도했고 또 향회를 통해 민주주의적 지방자치제를 시행하려 했는데 이것들은 한국의 대의 민주주의 발달사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대목들이다.

갑오경장은 한국인이 과거 천 년 이상 숭배했던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버리고 그대신 승전국 일본의 제도와 문물을 국가발전의 모델로 삼아 추진한 최초의 근대화 운동이었다. 갑오경장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대륙 문화권에서 이탈해 해양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갑오경장은 문명사적으로 우리민족에게 획기적인 긍정적 의의가 있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12.1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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