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비단뱀과 킹코브라 게놈 해독해보니…

비단뱀과 킹코브라 게놈 해독해보니…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57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지난 가을 어느 날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천변을 산책하다가 문득 돌벽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 쳐다보니 칙칙한 고동색 뱀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몸 굵기가 손가락 두 개를 합친 정도이고 길이도 1미터가 넘는 것 같은 작지 않은 녀석이었다. 지난해 가을에도 앞산을 오르다가 뱀을 봤다. 이제 도심에도 뱀 개체수가 조금씩 느는가보다.

멀찍이 돌벽을 타고 가는 뱀을 발견했을 때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비현실적인 모습에 어떤 아름다움도 느꼈지만 산길을 걷다 발 앞에 지나가는 뱀을 봤을 때는 화들짝 놀랐다. 물론 본능적인 반응이었지만 혹시 독사라면 큰 일이 날수도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 주변 자연에 뱀이 보인다는 게 반가우면서도 겁나는 이유다.

인류에게 묘한 매력과 공포를 동시에 안겨주는 대상인 뱀은 약 3천 종이 있는데 남극을 제외한 대륙에 분포한다. 그런데 최근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뱀 두 종의 게놈을 해독한 연구결과가 나란히 실렸다. 사슴도 잡아먹는다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미얀마비단뱀과 독사 가운데서도 가장 큰 인도네시아킹코브라가 그 주인공이다.

뱀은 문화인류학 관점에서 뿐 아니라 생물학 관점에서도 굉장히 흥미로운 대상이다. 사실상 모든 육상 척추동물에 존재하는 네 다리(새는 앞다리가 날개로 바뀌었지만)가 사라졌고 몸통이 튜브처럼 얇고 길게 변형됐기 때문이다. 사지가 없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비단뱀처럼 덩치를 키우거나 코브라처럼 독을 지니게 진화하기도 했다. 참고로 뱀 가운데 절반인 1천500여종이 독을 지니고 있다. 이번 연구결과는 이런 극단적인 변화를 이끈 게놈상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최근 미얀마비단뱀의 게놈이 해독돼 뱀의 독특한 생리를 이해하는 길이 열렸다. 사진은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서 찍은 것으로 미얀마비단뱀과 악어가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인 둘은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다. 미국에서는 애완용으로 키우던 미얀마비단뱀이 버려지거나 탈출해 퍼지면서 생태계가 교란되고 있다. ⓒUSGS

먹이 삼키고 며칠 만에 간과 소장 두 배로 커져
먼저 미얀마비단뱀을 보자. 비단뱀의 가장 주목할 특징은 대사활성도의 커다란 편차다. 비단뱀은 자기 덩치보다 큰 동물도 잡아먹는데, 일 년에 이런 먹이로 서너 번만 식사를 하면 된다. 일단 먹이가 들어오면 이를 소화하고 그 영양분을 저장하는 과정에서 장기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즉 먹이를 삼키고 이삼일이 지나면 심장과 간, 소장, 신장 같은 장기의 무게가 35~100%나 늘어난다. 이때 산소소모량도 수십 배 늘어난다.

미국 콜로라도의대 데이비드 폴록 교수팀을 비롯한 공동 연구팀은 암컷 미얀마비단뱀의 게놈을 해독했다. 게놈 크기는 약 14억 4천만 염기쌍으로 사람의 절반 수준이다. 연구자들은 게놈뿐 아니라 유전자의 발현패턴도 분석했는데, 예상대로 먹이를 삼킨 뒤 일어나는 급격한 생리적 변화는 유전자 발현패턴의 급격한 변화의 결과였다. 먹이를 삼키고 하루 뒤 심장과 간, 소장, 신장에서 발현양이 수십 배에서 심지어 100배 이상 증가한 유전자가 꽤 많았다. 주로 세포대사와 미토콘드리아 관련, 스트레스 관련 유전자들이었다. 결국 비단뱀의 극단적인 섭식 패턴은 역시 극단적으로 탄력적인 유전자 발현 조절 덕분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네덜란드 라이덴대 미카엘 리처드슨 교수팀과 공동 연구팀은 수컷 인도네시아킹코브라의 게놈을 해독했다. 몸길이 3미터가 넘는, 독사 가운데 가장 큰 킹코브라는 주로 다른 뱀을 먹이로 삼는다. 연구자들은 킹코브라 독을 구성하는 수백 가지 성분을 만드는데 관여하는 유전자 분석에 집중했다. 뱀독은 주로 독성 펩티드(아미노산 수십 개로 이뤄진 작은 단백질)와 독성 단백질로 이뤄져 있다. 이 성분들은 기능이 제각각이지만 작용이 합쳐지면서 물린 동물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뱀독은 눈구멍 뒤쪽에 존재하는 독샘(venom gland)에서 만들어져 보관돼 있다가 송곳니를 통해 방출된다. 독샘에서 송곳니로 이어지는 도관 사이에 부속샘(accessory gland)이 있다. 독샘에서 발현되는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예상대로 킹코브라 독의 주성분인 3fTx 독소를 만드는 유전자의 발현이 전체 독소 관련 유전자 발현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반면 부속샘에서는 렉틴이라는 단백질의 발현이 40%를 넘게 차지했다. 다만 아직까지는 부속샘에서 만들어지는 렉틴의 역할을 모르고 있다. 한편 마이크로RNA 발현 패턴을 분석한 결과 킹코브라의 독샘은 사람의 췌장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뱀이 진화하면서 췌장이 변형돼 독샘이 됐음을 시사하는 결과인데, 1978년 코흐바라는 생물학자가 이런 관계를 가정한 바 있다.

뱀독, 잘 고르면 약
▲ 킹코브라 독의 비밀. 킹코브리의 머릿속에는 독을 생산하고 저장하는 독샘과 아직 기능을 정확히 모르는 부속샘이 나란히 붙어있고 도관을 따라 어금니로 연결돼 있다. 최근 유전자 발현 패턴을 분석한 결과 독샘(아래 왼쪽)과 부속샘(아래 오른쪽)에서 발현되는 독소 펩티드와 단백질의 조성이 꽤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PNAS’
학술지 ‘사이언스’ 12월 6일자에는 ‘뱀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뱀 게놈 해독에 즈음해 최근 뱀 연구 현황을 소개하는 기사 세 편이 7쪽에 걸쳐 실렸다. 다른 저널에 게재된 논문을 계기로 특집 뉴스를 꾸민 게 좀 어색하기는 하다. 아무튼 그 가운데 킹코브라의 독에 대한 게놈 연구결과를 계기로 뱀독의 특정 성분을 약으로 이용하는 연구를 소개한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뱀독은 보통 수백 가지에서 천여 가지 펩티드와 단백질의 혼합물, 즉 독소 단백질 칵테일이다. 이들이 합쳐져 치명적인 작용을 보이지만 개별 성분 가운데서는 진통작용이나 혈압강하작용, 심지어 항암작용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뱀독은 약물의 보고인 셈이다. 실제로 뱀독 성분이 약물로 재탄생하거나 약물 개발에 영감을 준 예가 여럿 있다. 1960년대 브라질의 과학자들은 랜스헤드(lancehead viper)라는 독사의 독에서 혈압강하효과가 탁월한 BPF라는 성분을 분리했고, 제약회사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의 화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약물을 디자인했다. 1981년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처(FDA)에서 승인을 받은 블록버스터 고혈압약 캡토프릴(captopril)은 이렇게 탄생했다.

한편 킹코브라의 독에도 진통작용이 모르핀보다 20~200배나 강력한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싱가포르대 키니 마뉴나타 교수팀이 발견한 아미노산 11개로 이뤄진 펩티드로 경구투여도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 만성통증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킹코브라의 덕을 볼 날도 머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 kangsukki@gmail.com

저작권자 2013.12.13 ⓒ ScienceTimes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