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킹, 장애를 자산으로 승화시키다
최근 회고록 ‘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 펴내
“나는 옥스퍼드에서 보낸 3년 동안 공부한 시간을 계산해 본 적이 있다. 아마 1천 시간 정도가 될 것 같다. 하루에 약 1시간 정도 꼴이다.” 아마 대학에서 게으름을 피웠다면 스티븐 호킹 박사의 이런 고백이 위안이 될 것 같다.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신화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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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킹 박사가 최근 펴낸 회고록 '나! 스티브 호킹의 역사'. ⓒ위키피디아 |
호킹 박사는 지난 9월 그의 70여 년 동안의 인생여정을 담은 회고록 ‘나! 스티브 호킹의 역사 My Brief History’를 펴내 건재를 과시했다. 이 책은 그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담담하고 간결하게 돌이키면서 가끔씩 그의 내면을 들춰 보여준다.
현재 케임브리지 이론우주학연구센터 연구소장인 호킹 박사는 이 회고록 속에서 우주의 기원과 탄생을 살짝 짚고 넘어가고, 그의 난해한 이론들 가운데 그나마 일부 과학자들이 동조하는 블랙홀에 대해 약간의 페이지를 할애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될지도 모를 회고록인 만큼 어려운 물리학의 문제는 뒤로 접었다. 주로 그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인생을 되돌아보고 음미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의 물리학 저서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무엇보다 루게릭병(근위측성측색경화증)을 앓으면서도 반세기라는 긴 시간 동안 살아남아 상식적인 의학적 판단을 깼다. 의학적 예상으로 본다면 이 병에 걸리면 길어야 2년 이상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1분에 3단어를 쓸 수 있는 능력으로 회고록 집필
특히 이 책은 손 마비와 기관 절개술로 인해 현재 컴퓨터와 음성 합성기를 통해 1분에 최대 3단어를 말하고 쓸 수 있을 뿐인 전신마비의 저자가 다른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리지 않고 직접 집필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회고록보다 달리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 스티브 호킹의 역사’에서 호킹 박사는 그의 부모님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간략하게 소개한 뒤 연대순에 따라 대학, 대학원시절을 거쳐 연구와 대표적인 저서 ‘시간의 역사( A Brief History of Time)’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얽힌 과정을 이야기한다.
지루하고 어설픈 문장들도 눈에 띤다. 그러나 틀에 박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페이지를 인내심을 갖고 읽고 넘기다 보면 나중에는 재미 있는 과학적인 내용들도 음미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블랙홀과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도 그렇다.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실은 뉴스위크에 따르면 이 회고록은 호킹의 내면의 고백이 담긴 책이 아니다. 호킹은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이 걸어온 개인의 인생여정을 풀어 놓고 있지만 거기에는 별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나는 갈릴레오 사망 300년 만에 태어났어”
그리고 호킹 특유의 농담과 유머도 보인다. “나는 1942년 1월 8일, 그러니까 갈릴레오가 사망한지 정확히 300년 뒤에 태어났다”고 썼다. “추정하기에 그날 태어난 아기는 약 2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다. 그들 가운데 누가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을지 의심스럽다”
호킹은 의도치 않게 인기 과학자가 되면서 언론이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 갖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러한 언론혐오증의 성향은 회고록에까지 연결된다. 때문인지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특별한 호기심을 자아내기 보다 그저 무미건조하고 밋밋하다. 언론의 관심을 피하고 싶은 탓으로 보인다.
한 예를 들어보자. 호킹은 첫 아내 제인이 1979년 세 번째 자녀를 낳은 뒤 조나선 헬리어 존스라는 남자를 자신들의 아파트에 살도록 했다고 썼다. 호킹이 죽고 난 뒤 함께 살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호킹은 반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예견하듯이 자신이 루게릭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누군가 자녀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 후 11년이 지난 1990년이 되어도 자신이 어색하게나마 살아 있게 되자 아내와 존스가 가깝다는 사실에 불행하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썼다. 호킹은 한 간호사와 함께 다른 집으로 이사했고, 나중에 그녀와 결혼했다가 2007년 이혼했다.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아주 로맨틱한 소설이 될만한 부분이다. 여기에다 약간의 창작을 가미하고 살을 붙인다면 대단한 회고록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킹은 이 부분은 한두 페이지로 처리하고 말았다.
대신 그는 1985년 기관절개수술로 말할 능력을 잃은 후 의사소통에 사용한 여러 가지 기술적인 조치를 설명한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 읽어 볼만한 흥미로운 대목이다.
첫 아내 제인은 책을 두 권 출간, 늘 불만 토로해
한편 제인은 호킹과의 결혼생활에 대해 책을 두 권이나 썼다. ‘별을 움직이는 음악 Music to Move Stars’과 ‘무한으로의 여행: 스티븐 호킹과 함께한 인생 (Travelling to Infinity: My Life With Stephen Hawking)’이다.
현재 케임브리지 이론우주학연구센터 연구소장인 호킹 박사는 이 회고록 속에서 우주의 기원과 탄생을 살짝 짚고 넘어가고, 그의 난해한 이론들 가운데 그나마 일부 과학자들이 동조하는 블랙홀에 대해 약간의 페이지를 할애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될지도 모를 회고록인 만큼 어려운 물리학의 문제는 뒤로 접었다. 주로 그가 살아온 파란만장한 인생을 되돌아보고 음미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의 물리학 저서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무엇보다 루게릭병(근위측성측색경화증)을 앓으면서도 반세기라는 긴 시간 동안 살아남아 상식적인 의학적 판단을 깼다. 의학적 예상으로 본다면 이 병에 걸리면 길어야 2년 이상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1분에 3단어를 쓸 수 있는 능력으로 회고록 집필
특히 이 책은 손 마비와 기관 절개술로 인해 현재 컴퓨터와 음성 합성기를 통해 1분에 최대 3단어를 말하고 쓸 수 있을 뿐인 전신마비의 저자가 다른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리지 않고 직접 집필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회고록보다 달리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 스티브 호킹의 역사’에서 호킹 박사는 그의 부모님과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간략하게 소개한 뒤 연대순에 따라 대학, 대학원시절을 거쳐 연구와 대표적인 저서 ‘시간의 역사( A Brief History of Time)’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얽힌 과정을 이야기한다.
지루하고 어설픈 문장들도 눈에 띤다. 그러나 틀에 박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페이지를 인내심을 갖고 읽고 넘기다 보면 나중에는 재미 있는 과학적인 내용들도 음미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블랙홀과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도 그렇다.
이 책에 대해 서평을 실은 뉴스위크에 따르면 이 회고록은 호킹의 내면의 고백이 담긴 책이 아니다. 호킹은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이 걸어온 개인의 인생여정을 풀어 놓고 있지만 거기에는 별 의미를 두고 있지 않다.
“나는 갈릴레오 사망 300년 만에 태어났어”
그리고 호킹 특유의 농담과 유머도 보인다. “나는 1942년 1월 8일, 그러니까 갈릴레오가 사망한지 정확히 300년 뒤에 태어났다”고 썼다. “추정하기에 그날 태어난 아기는 약 2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다. 그들 가운데 누가 천문학에 관심을 가졌을지 의심스럽다”
호킹은 의도치 않게 인기 과학자가 되면서 언론이 자신의 사생활에 관심 갖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러한 언론혐오증의 성향은 회고록에까지 연결된다. 때문인지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특별한 호기심을 자아내기 보다 그저 무미건조하고 밋밋하다. 언론의 관심을 피하고 싶은 탓으로 보인다.
한 예를 들어보자. 호킹은 첫 아내 제인이 1979년 세 번째 자녀를 낳은 뒤 조나선 헬리어 존스라는 남자를 자신들의 아파트에 살도록 했다고 썼다. 호킹이 죽고 난 뒤 함께 살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다.
호킹은 반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예견하듯이 자신이 루게릭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누군가 자녀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 후 11년이 지난 1990년이 되어도 자신이 어색하게나마 살아 있게 되자 아내와 존스가 가깝다는 사실에 불행하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썼다. 호킹은 한 간호사와 함께 다른 집으로 이사했고, 나중에 그녀와 결혼했다가 2007년 이혼했다.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아주 로맨틱한 소설이 될만한 부분이다. 여기에다 약간의 창작을 가미하고 살을 붙인다면 대단한 회고록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킹은 이 부분은 한두 페이지로 처리하고 말았다.
대신 그는 1985년 기관절개수술로 말할 능력을 잃은 후 의사소통에 사용한 여러 가지 기술적인 조치를 설명한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 읽어 볼만한 흥미로운 대목이다.
첫 아내 제인은 책을 두 권 출간, 늘 불만 토로해
한편 제인은 호킹과의 결혼생활에 대해 책을 두 권이나 썼다. ‘별을 움직이는 음악 Music to Move Stars’과 ‘무한으로의 여행: 스티븐 호킹과 함께한 인생 (Travelling to Infinity: My Life With Stephen Hawk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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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호킹 박사는 장애를 자산으로 승화시킨 이 시대의 전설이자 신화다. ⓒ위키피디아 |
그녀는 결혼생활 내내 남편의 보호자로 묘사되고 결혼과 출산으로 자신이 학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고 언론에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호주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SMH)에 따르며 그녀는 3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신앙심이 깊고 중세 스페인 시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러나 호킹의 회고록에는 이 부분이 언급돼 있지 않다.
호킹은 이 책에서 자신의 장애를 이야기할 때는 좀 더 자기 성찰적이 된다. 20대에 루게릭 병 진단을 받았지만 그때는 증상이 얼마나 빨리 진행될지 불확실 했다. 어떤 의사는 불과 몇 년밖에 못살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71세인 호킹은 그런 추정보다 거의 반세기나 더 살았다. 하지만 그러한 의학적인 예측을 뛰어 넘는데 무엇이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매우 충격적이었다고 그는 썼다.
백혈병 걸린 소년을 보고 용기 얻어
그러나 자신이 아는 한 소년이 맞은편 병상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충격이 많이 가라앉았다고 그는 돌이킨다. “나보다 훨씬 불행한 사람이 있었다”고 썼다. “적어도 나는 루게릭 병으로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내 자신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소년을 기억하곤 한다.”
호킹은 자신의 장애가 하나의 자산이 되었다는 사실도 솔직히 털어 놓는다. 대학원생 초기에 신체조건이 악화되자 실험연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론물리학 영역으로 파고들어 그 분야에서 유명해졌다.
그는 또 장애 때문에 교수단 회의에 참석하거나 학부생을 가르치는 일을 면제 받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점 역시 자신이 유명해진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장애인 천재에 딱 들어맞는다. 선글라스와 가발로 나의 모습을 가릴 수 없다. 나의 장애는 휠체어 때문에 그대로 드러난다.”
호킹의 연구는 대부분 공간과 시간의 기원에 집중하기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철학이나 종교적 논거를 찾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호킹은 지난 4월 캘리포니아 공대 강연에서 “빅뱅이 일어나는 데는 신의 개입이 필요 없었다”라고 말했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같은 좀 더 목소리 큰 무신론 과학자들과 달리 호킹은 형이상학보다 형이하학인 물리학에 집중한다. 그에겐 종교가 ‘우주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항상 변하지 않는다’는 정상상태우주론처럼 완전히 한물간 이론일 뿐이다. 무신론, 유신론이 아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한 행성에서 살아가는 진화한 원숭이의 자손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원리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독일 슈피겔에서 발췌, 1988년 10월17일자)
호주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SMH)에 따르며 그녀는 3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신앙심이 깊고 중세 스페인 시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러나 호킹의 회고록에는 이 부분이 언급돼 있지 않다.
호킹은 이 책에서 자신의 장애를 이야기할 때는 좀 더 자기 성찰적이 된다. 20대에 루게릭 병 진단을 받았지만 그때는 증상이 얼마나 빨리 진행될지 불확실 했다. 어떤 의사는 불과 몇 년밖에 못살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71세인 호킹은 그런 추정보다 거의 반세기나 더 살았다. 하지만 그러한 의학적인 예측을 뛰어 넘는데 무엇이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매우 충격적이었다고 그는 썼다.
백혈병 걸린 소년을 보고 용기 얻어
그러나 자신이 아는 한 소년이 맞은편 병상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충격이 많이 가라앉았다고 그는 돌이킨다. “나보다 훨씬 불행한 사람이 있었다”고 썼다. “적어도 나는 루게릭 병으로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 내 자신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소년을 기억하곤 한다.”
호킹은 자신의 장애가 하나의 자산이 되었다는 사실도 솔직히 털어 놓는다. 대학원생 초기에 신체조건이 악화되자 실험연구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론물리학 영역으로 파고들어 그 분야에서 유명해졌다.
그는 또 장애 때문에 교수단 회의에 참석하거나 학부생을 가르치는 일을 면제 받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점 역시 자신이 유명해진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장애인 천재에 딱 들어맞는다. 선글라스와 가발로 나의 모습을 가릴 수 없다. 나의 장애는 휠체어 때문에 그대로 드러난다.”
호킹의 연구는 대부분 공간과 시간의 기원에 집중하기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철학이나 종교적 논거를 찾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호킹은 지난 4월 캘리포니아 공대 강연에서 “빅뱅이 일어나는 데는 신의 개입이 필요 없었다”라고 말했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같은 좀 더 목소리 큰 무신론 과학자들과 달리 호킹은 형이상학보다 형이하학인 물리학에 집중한다. 그에겐 종교가 ‘우주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항상 변하지 않는다’는 정상상태우주론처럼 완전히 한물간 이론일 뿐이다. 무신론, 유신론이 아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한 행성에서 살아가는 진화한 원숭이의 자손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원리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을 특별하게 만든다.” (독일 슈피겔에서 발췌, 1988년 10월17일자)
저작권자 2013.11.22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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