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25일 수요일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배명훈(4)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배명훈(4)

문제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 신실함


한국SF를 찾아서 배명훈의 SF가 지닌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설사 인류종말의 대재앙을 맞이하는 날이 와도 그 이유를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의 본격적인 SF장편 <신의 궤도>에서 직면하게 되는 우주적 규모의 대재앙은 외계종족의 침공이나 혜성 충돌 또는 인근 초신성 폭발과 같은 천재지변이 아니라 철저히 인재(人災)로 인해 발생한다.

물론 과학소설에서 다루는 인재 가운데에도 이미 진부해진 것들이 적지 않다. 메리 쉘리(Mary Wollstonecraft Shelly; 1797~1851)가 <최후의 인간 The Last Man; 1826년>에서 신종 전염병의 창궐로 인한 인류의 몰살을 예견한 이래 수많은 아류가 나왔고 핵전쟁이나 환경 파괴로 인해 자멸하게 되는 인류문명의 이야기는 이제 소설뿐 아니라 블록버스터 영화의 단골소재가 되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이러한 시도 자체만으로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요는 배명훈이 찾아내는 내부요인이 해외 과학소설들에서 이미 우려먹은 패턴들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즉 변종 바이러스가 개발과정에서 유출된다거나 인간 스스로 환경파괴를 자초한다는 식의 식상한 소재들이 아니란 뜻이다. 오히려 그가 찾아낸 인류종말의 시나리오는 언뜻 잔혹해 보이지만 어찌 보면 너무나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는 점에서 이 또한 넓은 의미에서의 ‘생활SF’라 볼 수 있다.

<신의 궤도>에서 벌어지는 인재는 실수나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계약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과학소설 작가로서 배명훈의 세계관을 차별화해준다. 이 장편에서 묘사되는 인류 절멸의 위기는 고소를 금치 못할 만큼 현대 산업사회의 부조리한 속성을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어 <타워>의 핵심정신을 올곧게 계승하고 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 배명훈의 이른바 '생활SF'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편 <신의 궤도> ⓒ문학동네

앞서 언급했듯이, 지구의 일부 부자들만을 위한 휴양식민지 나니예 행성을 의도대로 가공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자금뿐 아니라 무려 90만년이란(나중에 15만년으로 줄지만), 개인에게는 거의 영겁에 가까운 세월이 소요된다. 이 맘모스 프로젝트에 투자한 부유한 이민자들이 냉동캡슐에 들어가 가늠할 수 없는 세월 동안 거대 우주선을 타고 잠들어 있는 동안 목적지 행성에서는 먼저 도착한 수백만 명에 달하는 관리사무소 인력이 그곳을 노스탤지어풍 휴양지로 개조하게 된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누구인가? 지구의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이들이 단지 분양사의 말만 믿고 까마득한 미래에나 약속이행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불공정 계약에 호주머니를 선뜻 열까? 만일 냉동에서 깨어나 보니 텅 빈 우주공간에 낙동강 오리알 되어 있거나 휴양지는커녕 짓다만 폐허더미만 휑하니 눈앞에 펼쳐지면 어찌하란 말인가. 불과 몇 백 가구 모집하는 아파트 분양에서도 사기가 횡행하고 가파른 절벽을 임야나 토지로 분할해 속여 파는 기획부동산들이 설치는 세상인데, 인류사상 유례가 없는 천문학적 규모의 레저 행성 개발에 안전장치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투자자들은 분양사의 약속이행을 강제하기 위한 별도의 자경(自警)펀드를 조성한다. 이 기금의 존재목적은 만일 예기치 않은 사태가 이 고귀한(?) 이주민들에게 발생하여 휴양행성에서 안락을 누릴 수 없는 사태에 처하면 계약된 행성 자체를 아예 우주에서 먼지로 만들어버릴 궁극의 파멸무기를 인근 궤도에 배치하는 일이다. 한 마디로 ‘내가 못 먹는 떡은 남도 먹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20만 명에 달하는 부자집단이 예정보다 몇 만 년이나 앞서 우주선의 동면캡슐에서 깨어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우주선을 아무리 거대하게 건조한들 20만 명이 수만 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 비축분을 실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깨어난 이들은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식량을 차지하려 골육상쟁을 불사하지만 그래봤자 장구한 세월의 힘에 못 이겨 죄다 굶어죽는다.

이로 말미암아 테라포밍(행성개조)을 성공리에 마치고 고객을 기다리던 행성 관리사무소 측도 좌불안석에 놓인다. 20만 명의 고객들이 세상을 하직하는 바람에 수백만 명에 달하는 관리인력 모두가 졸지에 궁극의 파멸무기 앞에서 먼지로 사라질 절대 절명의 위기에 처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배명훈은 <신의 궤도>에서 인류문명에 닥쳐올 대재앙은 외부의 가공할 위협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이기심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방대한 시공간을 무대로 펼쳐 보인다.1) 사실 이기적인 쪽은 자경기금을 조성한 부자 투자자들뿐이 아니다. 유도된 혜성 파편들이 행성 곳곳을 강타하는 종말 직전에 이르러서도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신흥종교집단 그리고 비행(飛行) 유목민들은 사분오열되는 동시에 이합집산하면서 권력구도를 자기들 중심으로 재편하느라 여념이 없다.

지구에서건 나니예에서건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 결과 갈등과 배신, 약탈과 살육이 끝없이 반복된다. 행성 상공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물주의 위치를 찾아낼 장비(천체망원경)를 확보하겠다는 명분 아래 수없이 많은 공중전을 치르며 적의 비행기들을 유린하는 수도사 ‘나물’ 역시 과학자 이전에 과연 성직자가 맞는지 묻고 싶을 지경이다. 작가가 펼쳐 놓은 이 아수라장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은 유일한 존재는 휴양행성 프로젝트를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신’이라 불리는 궁극의 방어무기를 각성시키도록 무의식 속에 프로그램된 김은경 정도 아닐까.

아울러 배명훈의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된 흐름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우리문화와 정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수용이다. 단지 해외 번역물 같은 짝퉁 소설의 분위기에서 탈피한다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작풍은 과학소설이 단지 희한한 발명품을 소재로 자유분방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현실도피적인 공상문학이라는 우리나라 독자대중의 어설픈 편견을 떨어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모순의 축소판이라 할 <타워> 연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풍자나 비판 쪽으로 각을 세우지 않은 배명훈의 두 번째 단편집 <안녕, 인공존재!>에서조차 독자들은 낯선 서양요리가 아닌 푸근한 한식요리를 즐길 수 있다.

한때 ‘우리의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화두가 유행했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충무로 영화계가 장사 잘되는 해외수입물 쿼터를 따내기 위해 해방 이전 작가들의 원작을 영상화한 지극히 농촌스럽다 못해 토속적인 냄새 물씬 나는 영화들을 예술성 높은 문예영화인양 너도 나도 제작했었다. 토속물과 역사물만 한국적인 우리의 것인가? 같은 맥락에서 한국향(韓國向) 과학소설의 범주를 어느 한 기준에 묶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리라.

중요한 것은 어느 시공간을 무대로 하건 간에 독자들이 한국적인 아이덴티티를 읽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배명훈의 작품들은 폭넓은 수용성을 보여준다. <타워>가 현대산업사회 속에서 명암이 엇갈리는 우리네 삶을 그렸다면 <안녕, 인공존재!>에 수록된 단편 <누군가를 만났어; 2007년>는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 문화와 접목되어 고고심령학이란 신종과학으로 세상을 보는 눈에 다채로움을 더한다.2) 겉으로 보이는 것만 진실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끌어들인 이 사이비 학문은 실재 여부와는 별개로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사물을 바라보아서는 곤란하다는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흥미로운 시도다.

반면 같은 선집에 실린 단편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2010년>도 현대적인 의미의 한국향 과학소설이라 볼 수 있다. 변신로봇물은 원래 일본에서 애니메이션과 만화로 인기를 끈 콘텐츠 아이템으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까지 열광시켰다. 심지어 최근 들어 변신로봇물은 할리우드에서 실사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글로벌 문화현상이 되었다. 따라서 <변신합체 리바이어던>은 우리나라에 유입된 해외의 대중문화가 어떻게 능동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시금석이다.

기본적으로 이 단편은 변신합체 로봇물 트렌드에 대한 일종의 메타픽션 희극이다. 외계인과의 우주전쟁을 다룬 활극작품들은 후반으로 갈수록 전투에 동원되는 무기와 화력의 규모가 업그레이드를 거듭하는 법이다. 이 단편에서 지구방위군이 찾아낸 대안은 합체거대로봇이다. 이 기종으로 외계괴물 격퇴에 재미를 보자 방위군은 갈수록 합체로봇 수를 늘려가고 급기야 100대, 900대, 1만대 그리고 무려 52만대가 한데 합체하는 (후자의 경우 합체시간에만 무려 여섯 시간이 걸리는) 기종이 탄생한다.

웃지 못 할 사실은 일단 합체하고 나면 52만 명이나 되는 조종사가 필요 없어진다는 점이다. 지구의 궁극합체로봇 리바이어던이 외계의 거인과 맞서는 데는 조종사가 불과 299명이면 충분하다.(이마저도 예비 조종사 인력까지 다 합친 수치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대부분의 나머지 조종사들은 완전히 놀자판이 된다. 거대로봇 속의 조종석 대부분에는 각종 동호회와 놀이마당이 들어서게 되고, 51만 9천7백1명의 휴직 조종사들 가운데에는 노느니 아르바이트 한답시고 떡볶이며 오징어까지 팔아대는 녀석들이 속출한다.3)

아울러 포복절도할 이 개그물은 변신합체 결과 거대로봇이 적절한 통제를 벗어나 광기어린 폭주를 일삼는 광경을 목도함으로써 집단정신의 광기가 빚어내는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 또한 잊지 않는다. 일례로 여기서 로봇들의 변신합체로 야기되는 기존능력의 기하급수적 배가현상을 ‘나치오 시너지(Natio Synergy)’라 부른다. 독자들은 ‘나치오’에서 누구나 쉽게 ‘나치’를 연상할 수 있다.
1) 이러한 풍자성 야유가 마음에 드는 독자라면 과연 20만 명이나 되는 부자들이 아무리 끝내주는 휴양지라도 그렇지 90만년이나 걸리는 까마득히 먼 외계행성까지 가려 할까? 더욱이 원가가 천문학적으로 드는 테라포밍 비용에 전 재산을 들이붓고 냉동캡슐에 선뜻 들어가려 할까? 하는 의문에 일단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2) 사실 <누군가를 만났어>의 SF적인 중심소재는 최초의 접촉(The First Contact)이다. 즉 외계지성과 인류의 첫만남이 갖는 의미가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지만 작가는 이것을 소재주의로 쓸 뿐 작품의 주관심사는 고고심령학자 남자 주인공이 화성탐사대의 일원으로 가 있는 한 여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끝없이 토로하는 데 있다. 어차피 ‘최초의 접촉’ 개념 중에서도 외계인의 흔적이 오래 전에 지구에 왔었다는 식의 가정은 아서 C. 클락의 <2001년 우주 오디세이; 1968년>나 제임스 P. 호건(James P. Hogan)의 <별의 계승자 Inherit The Stars; 1977년> 등에서 중심주제로 써먹었으니 배명훈이 유사한 플롯의 비중을 높일 이유는 없었으리라.

3) "그 무렵 연합군 사령부가 기술개발에 꽤 신경 써서 합체한 로봇 크기가 장난이 아니었거든요. 벌써 900대씩 합체하는 형태가 나왔으니까요...(중략)...그러니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할 일을 다 한 건데요. 조종실 사정은 완전 별로였어요. 1만대 합체 기념호가 나왔을 때 쯤에는 조종실에서 아예 떡볶이도 팔고 라면도 팔았다니까요. 싫어할 것 같죠? 근데 라면 냄새 같은 게 조종실에 한 번 퍼지면 결국 백 명 중에 팔십 명이 다 컵라면을 먹고 있다니까요."
--- <안녕, 인공존재!> 수록 단편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2010년, 264쪽

고장원 SF칼럼니스트 | sfko@naver.com

저작권자 2012.07.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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