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무슨 의미를 주고 있나?”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언어는 우리들에게 이득을 주고 있을까? 언어는 우리들에게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을까? 인간 사회는 언어의 다양한 사용을 통해 오히려 반목과 질시로 인해 해체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심층적으로는 풍부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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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대현 이화여자대학 명예교수 ⓒScience Times |
진리는 체계 독립적이 아니라 체계 의존적이다. 이것은 체계들이 각기 서로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체계들은 각각의 언어, 의미, 문법, 가치, 우선순위를 가지면서, 그 나름의 세계에 대한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달리 말해, 임의의 두 이론이 다른 체계라면, 두 이론은 공유하는 단어를 하나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빛"이라는 기호를 뉴턴 이론과 아인슈타인 이론이 공유하지만, 이 기호에 부여하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동명이의어(同名異義語)가 된다.
사랑은 “종교적인 면에서 다 달라”
"자본"이라는 말도 그렇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유하지만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다른 단어가 되기는 매 한가지이다. 그래서 불교의 사랑과 기독교의 사랑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임의의 두 이론은 어떤 것이 참인지, 또는 더 나은지를 비교할 수 없ek.
우리는 어떤 사람과는 특정 주제를 말할 때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세계관, 역사관, 이데올로기, 종교 같은 배경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같은 세계에 살고 있지 않는가? 우리가 더불어 살면서 공유하는 이 세계는 그러한 이론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공유하는 이 세계를 실재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실재"라는 단어로 여러 가지를 표상해 왔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현상계의 피안에 존재한다는 영원한 세계를 말하기도 하고, 헤겔이나 마르크스주의에서처럼 역사의 종말에 나타난다는 진리를 말하기도 한다.
진리는 주관성이라고 믿는 실존주의 진리관도 있고, 진리란 인간의 언어나 사유로 파악될 수 없다고 믿는 신비주의적 관점도 있다. 그러나 현대철학에서 논의되는 정통적 실재론은 "마음이나 언어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언어와 세계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한라산", "나승연", "레몬" 같은 이름은 구체적 대상이나 자연적인 종을 나타낸다. "높다", "대변인이다", "시다"와 같은 술어는 일정한 성질을 보이고, "한라산은 높다", "나승연은 대변인이다", "레몬은 시다"와 같은 문장은 특정한 사태를 가리킨다.
이처럼 언어 표현과 세계의 일부를 연결하는 "나타냄", "보임", "가리킴"은 총괄하여 "지칭"이라고 불리며, 언어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왔다. 지칭은 어떤 식으로 언어 표현과 세계의 부분을 연결하는가?
어떤 사람은 아인슈타인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아인슈타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원자탄의 발명이다"라고 믿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틀린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탄 개발을 반대했고 참여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비과학적인 것도 믿어
기독교 성서학자들에 따르면 성서 인물 요나(Jonas)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요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요나>서의 주인공이다. 요나서는 바닷속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내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자기의 사명을 완수한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곳으로 도피하다가 항해 중에 커다란 풍랑을 만난다. 배 안에 신의 노여움을 산 인물이 탔다고 생각한 선원들이 제비 뽑기를 제안하였다. 요나가 제비에 뽑혀 바닷속에 던져져 큰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내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나 자기의 사명을 완수한 이야기이다.
“빛은 직진한다"라는 말은 참인가? 이 물음은 대답될 수 없다. “참이다”라는 술어가 나타나는 체계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턴 체계 S1” 또는 “아인슈타인 체계 S2”가 제시되면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S는 움직이는 물체를 의미한다.
뉴턴의 물리학에서는 빛의 직진은 참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에서 해답은 “거짓이다”가 된다. 그러므로 체계 독립적으로는 그 물음은 대답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교될 수 없다. 그런데도 물리학자들은 어떻게 뉴턴의 빛 이론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빛 이론을 선택하는 것일까?
두 체계의 “빛”이라는 기호는 다른 대상들을 지칭하는데도 어떻게 이러한 선택이 이루어지는가? 두 체계의 비교가 가능하지 않다면 그 선택은 소위 "선택"이 의미하는 그러한 행위는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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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스트로 환상은 미국의 심리학자 조셉 자스트로가 1889년 발견한 것으로 일종의 시각적 환상이다. 윗 물체와 아래 물체의 크기는 동일하다. 그러나 아래 물체가 크게 보인다. ⓒ위키피디아 |
뉴턴의 “빛”과 아인슈타인의 “빛”은 같은 기호지만 다른 단어이고 다른 대상을 나타내지만 문맥적 지칭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경험은 다양하다. 그러나 공유하는 실재에 대한 이해의 확장이나 성취의 자유를 향한 노력은 같을지도 모른다. 담론의 다원성은 인간 조건에 배태되어있는 반인문적 현상에 대하여 인문적 자유를 향한 가능성 언어를 추구하는 능력이고, 이론 다원성은 자연적이거나 사회적인 특정 문제에 대한 추상적 이해를 추구하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또한 담론 다원성과 이론 다원성은 담론의 공동체성에 의해 실재화되고 이론 다원성은 지칭에 의해 실재에 닻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각기 달리 말하지만 공유하는 실재에 대한 다른 조명이다.
어떤 재스트로 환상(Jastrow Illusion)식 그림에 대해 지리산 출신의 김씨는 토끼로 보고 영산포 출신의 이씨는 오리로 볼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것에 대해 그렇게 달리 지각하여 달리 말하는 것이다.
자스트로 환상은 미국의 심리학자 조셉 자스트로(Joseph Jastrow)가 1889년 내놓은 연구결과다. 사람들은 동정녀 마리아를 믿는다. 그것이 과학적인, 생물학적인 것과는 관계 없이 말이다. 같은 크기의 물체인데도 하나는 크고, 다른 하나는 작다는 개념일 수 있다.
저작권자 2012.07.30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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