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도 생물체처럼 진화한다”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21일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는 <이것을 저렇게도- 다원주의 실재론>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심리언어-담론의 결과> 내용을 갖고 두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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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대현 이화여자대학 명예교수(언어철학). ⓒScience Times |
정 교수는 다원주의 실재론에 대해 언급하면서 “사람들은 한 대상에 대해서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한다. 그러나 따지자면 결국 ‘같은 이것에 대해 저렇게 달리’ 말하는 것이 바로 다원주의”라고 정의했다.
정 교수는 “인간사회는 언어의 다양한 사용을 통해서 표면적으로 ‘해체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 풍부해지고 있으며, 개인주의의 ‘원자적 파편화’ 속에서도 공동선 같은 객관적 기초를 통해 인간연대의 구조 속에서 생물체처럼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음에 대한 논의는 인간 지성사의 오랜 역사”
나는 누구일까?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나는 나를 나의 얼굴과 동일시하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동일시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거울에 보이는 얼굴을 넘어 내가 나일 수 있는 가능성에 나를 열어 두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열어 둔다고 할지라도, 그러면 나는 지금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묻는 나의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묻는 물음의 행위의 주체가 아닐까? 그러나 그 행위의 주체는 또 무슨 실체일까? 혹시 나라는 실체는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보이지 않고 이러한 물음을 묻는 나의 마음만이 나타나 의식된다면, 나와 나의 마음의 관계는 무엇일까?
마음에 대한 논의는 인간 지성사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불교는 마음의 원초적 처소를 빈 자리,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마음 현상을 한 겹씩 벗기다 보면 최종적으로 도달하리라고 믿는 지점에 대한 가상적 기술일 것이다. 진여(眞如)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적 환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유학(儒學)이 심성(心性)을 이루고 있는 기초적 성향을 사단칠정(四端七情)으로 제시하고 이에 대해 파고들어 가는 것은 경험론적 접근이라 할 것이다. 반면 합리주의 전통은 마음을 인간 이성의 거주처쯤으로 간주하였다. 마음에 대한 오랜 세월의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아직 마음에 대해 공유하는 전통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마음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 능력에 대해 이렇게 합의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마음에 대한 언어, 마음의 언어는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담론의 다원성은 여기에서도 나타나는 것일까? 모든 마음들은 다른 마음인가? 마음 언어, 심리언어는 가능성 언어, 담론 다원성의 전형적인 경우인가? 심리언어는 사람의 수만큼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심리 언어는 개인 언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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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의 합리주의를 완성한 데카르트. 그는 생각과 사고만이 존재의 이유라고 주장했다. ⓒ위키피디아 |
이러한 물음들은 인간 담론의 객관성을 지향하는 관점에서는 중요한 물음이다. 개인 언어를 허용하여야 한다면, 공동체언어의 자리는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개인 언어와 공유언어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다른 마음을 허용한다면, 같은 마음은 어떻게 유지되고, 알려지며, 소통될 수 있을 까? 이러한 종류의 물음은 어떤 방식의 조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데카르트의 이원성은 마음과 육체
데카르트는 “내 마음 나만 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내가 모를 수 없다는 명제를 지지하기 위해서 그는 구체적 논변을 제시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 명제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 관점이 어떤 설득력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의 논의는 이 관점의 비판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내 마음의 투명성 명제에 관해서 네 가지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는 데카르트 철학적 논의에 투명성 명제가 전제되고 있고, 그 논의의 설득력만큼 그 전제가 개연성을 갖는다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달리 말해, “나의 존재만이 의심될 수 없다(개인의 확실성)”와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의식 본질주의)”라는 명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투명성 명제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고려는 투명성 명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조명해 보는 것과 관련된다.
즉 “세계는 마음과 물질의 두 요소로만 구성 된다”는 이원론은 투명성 명제에 주는 부담을 약화하여야 하고, “지식은 이성적이다”라는 보편적 합리주의는 투명성 명제의 유지를 위해 보완적인 조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 네 가지들을 차례로 고찰하기 전에 먼저 데카르트가 “생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명료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라는 지시어는 “우리 안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 믿고 의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각하고 아는 것을 포함하고 느끼고 꿈꾸는 것까지 망라한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도 생각을 하면서 의식을 가져야 한다. 태아는 다만 그 생각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을 의식으로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의식은 주어진 것이고 심성의 표지이다.
나의 모든 생각은 내게 자명하여, 데카르트의 지적처럼 “나는 나의 생각을 모를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를 수 없다. 내가 특정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틀릴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내 생각에 대해 갖는 그런 특수한 관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얻어질 수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내 마음 나만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그러한 단어들의 사용방식은 데카르트 철학의 특징적인 속성이 되었다.
생각과 사고의 주체가 되는 것이 바로 “나”
데카르트의 이원성은 마음과 육체
데카르트는 “내 마음 나만 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내가 모를 수 없다는 명제를 지지하기 위해서 그는 구체적 논변을 제시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 명제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 관점이 어떤 설득력으로 유지될 수 있는가의 논의는 이 관점의 비판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내 마음의 투명성 명제에 관해서 네 가지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는 데카르트 철학적 논의에 투명성 명제가 전제되고 있고, 그 논의의 설득력만큼 그 전제가 개연성을 갖는다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달리 말해, “나의 존재만이 의심될 수 없다(개인의 확실성)”와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의식 본질주의)”라는 명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투명성 명제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 고려는 투명성 명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조명해 보는 것과 관련된다.
즉 “세계는 마음과 물질의 두 요소로만 구성 된다”는 이원론은 투명성 명제에 주는 부담을 약화하여야 하고, “지식은 이성적이다”라는 보편적 합리주의는 투명성 명제의 유지를 위해 보완적인 조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 네 가지들을 차례로 고찰하기 전에 먼저 데카르트가 “생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명료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라는 지시어는 “우리 안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 믿고 의심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각하고 아는 것을 포함하고 느끼고 꿈꾸는 것까지 망라한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도 생각을 하면서 의식을 가져야 한다. 태아는 다만 그 생각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을 의식으로 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의식은 주어진 것이고 심성의 표지이다.
나의 모든 생각은 내게 자명하여, 데카르트의 지적처럼 “나는 나의 생각을 모를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를 수 없다. 내가 특정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틀릴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내 생각에 대해 갖는 그런 특수한 관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얻어질 수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내 마음 나만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그러한 단어들의 사용방식은 데카르트 철학의 특징적인 속성이 되었다.
생각과 사고의 주체가 되는 것이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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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적 다원주의는 특정 종교의 절대성에 입각한 배타성을 거부하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위키피디아 |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개인의 확실성과 심성 투명성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었다. 지각, 기억, 도덕, 전통, 교회, 국가와 관련된 모든 명제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묻게 되었고, 의심을 제기하는 자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더 나아가 “나는 존재한다”라고 생각할 때 나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닐까? 또는 전지전능한 마귀가 이에 대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를 묻는다.
그러나 이 때에도 꿈을 꾸는 자는 전제되어야 하고, 마귀가 속이는 자는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존재한다는 것을 의심하거나 꿈을 꾸거나 속고 있을 때에도 나의 존재는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심, 꿈, 속음 등은 모두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생각이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추론하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라는 의식 본질주의를 채택한다. 그의 의식 본질주의 논변도 명쾌하다. 나는 나의 두 다리가 없이도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나의 몸이 없이도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이처럼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명료하다. 나의 생각은 의심할 수 없지만 나의 몸은 의심할 수 있고, 나의 생각은 분리 가능하지 않지만 나의 몸은 분리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몸 없이 존재할 수 있지만 나의 생각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2012.07.23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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