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4일 월요일

노벨상 때마다 떠오르는 비운의 천재

노벨상 때마다 떠오르는 비운의 천재

이휘소 박사가 힉스 입자 명명해

 
 
사이언스타임즈 라운지   항상 이맘때쯤이면 행해지는 노벨상 수상자 발표가 올해도 연일 이어지고 있다. 매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의 수상 여부로 관심을 모았던 문학상이 이번에도 다른 나라의 작가에게로 돌아가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올해 노벨상 수상자 소식을 보도한 뉴스 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바로 비운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다. 지난 반세기 동안 가설로만 존재했던 힉스 입자로 드디어 올해 물리학상을 수상한 피터 힉스와 프랑수아 엥글레르 교수의 수상 소식을 전하는 뉴스 말미에 힉스 입자란 이름을 붙인 사람이 이휘소 박사라는 설명이 곁들여진 것이다.
▲ 이휘소 박사의 연구업적을 토대로 다수의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사진은 고 이휘소 박사의 생전 강의 모습.  ⓒ과학기술인명예의전당 사이트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12개의 기본 소립자와 그들 사이를 매개하는 4개 소립자, 그리고 모든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힉스 입자 등 모두 17개의 소립자로 구성돼 있다. 그동안 16개의 소립자는 모두 발견됐지만 힉스 입자만은 흔적을 찾지 못해 ‘신의 입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7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가 대형 강입자 충돌형 가속기에서 힉스 입자로 추정되는 소립자의 존재를 증명했으며, 올해 3월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가 그 소립자를 힉스 입자라고 공식 확인했다. 또 지난 4일에는 일본의 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 등이 참여한 국제연구팀이 힉스의 질량을 계산하는 한편 힉스의 스핀 값이 이론대로 제로인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

지난해 힉스 입자로 추정되는 소립자가 발견되면서부터 이미 노벨 물리학상의 유력한 수상자로 꼽힌 피터 힉스 교수는 1964년 힉스 입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정교하게 제기했으며, 앵글레르 교수는 소립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힉스메커니즘의 존재를 처음 예측한 바 있다.

이 박사의 논문 발표 이후 힉스 입자 명칭 굳어져
힉스 입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예측한 이는 피터 힉스 외에도 5명의 물리학자가 더 있다. 그럼에도 이 소립자에 힉스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이휘소 박사 덕분이다. 이 박사는 1967년 힉스 박사와 미지의 입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1972년에 열린 고에너지물리학회에서 ‘힉스 입자에 미치는 강한 핵력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학회에서 처음으로 그 미지의 입자에 대해 ‘힉스’라고 명명한 논문으로서, 그 후 이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휘소 박사는 서울대 화공학과에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가 석박사 학위를 받고 펜실베이니아대 물리학 교수 등을 거쳐 페르미 국립가속기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발표 시 이 박사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강주상 고려대 명예교수가 저술한 ‘이휘소 평전’에 의하면, 지난 1999년 네덜란드의 이론물리학자 마틴 벨트만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제라드 토프트 교수는 수상 소감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양자역학에 대해 엄청나게 공부한 이휘소 박사를 만났던 것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이었다. 이 박사는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방법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 물리학 이론의 기반인 ‘게이지 이론’을 처음 주창한 것은 1967년 와인버그, 살람, 글래쇼였다. 그러나 게이지 이론을 사용해 실제로 의미 있는 계산이 가능한지는 확인이 안 된 상태였다. 그때 유한한 답이 나오는 계산이 가능하다는 논문을 발표한 이가 바로 벨트만과 그의 지도를 받던 대학원생 토프트였다.

토프트는 스승인 벨트만의 관점에 따라 게이지 이론의 수학적 방법을 연구하다가 이휘소의 강연을 들은 후 그 접근 방법을 자신의 연구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처음엔 벨트만이 반대했지만 오랜 설득 끝에 컴퓨터 프로그램에 적용해본 결과, 수년 동안 모든 방법을 시도해도 안 되던 계산이 예상한 대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논문은 매우 복잡하고 특이해 물리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때 이휘소가 토프트의 지원자로 나서 간명하고 일반적인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결국 학자들에게 벨트만-토프트의 방법론이 옳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즉, 논문의 연구 방향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 논문에 대한 의구심을 잠재워 주목 받게 했으니 토프트가 수상소감에서 그 같은 말을 남길 만했던 셈이다.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
현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이라 불리는 와인버그-살람-글래쇼의 이론이 전자기 현상과 약작용을 통합하는 전약 작용이라는 통합 이론으로 널리 사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바로 이휘소 박사의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논문이었다. 그들 역시 197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수상 당시 살람은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살람은 와인버그보다 1년 늦은 1968년에 연구결과를 발표했으나, 이휘소가 강연에서 와인버그 이론과 동등한 자격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줌에 따라 ‘와인버그 모형’이 ‘와인버그-살람 모형’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밖에 '참(Charm) 입자'로 구성된 새로운 소립자의 이론적 예측을 한 것도 이휘소 박사의 또 다른 큰 업적으로 꼽힌다. 이 박사는 1974년에 쓴 ‘참 입자들의 탐색’이란 논문을 통해 이들 입자를 찾아내는 방법과 성질 등을 예언했는데, 그로부터 몇 달 후 참 입자의 결합상태인 차모니움이란 새로운 소립자가 발견돼 물리학계를 놀라게 했다.

강주상 박사는 ‘이휘소 평전’에서 만약 이 박사가 생존해 있었다면 1999년에 토프트 및 벨트만과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손가락에 꼽을 만큼 뛰어난 이론 물리학자였지만 생전 업적 가운데 확실히 노벨상을 탈 만한 독창적인 업적은 없었다는 평가도 있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발휘한 몇몇 작가의 소설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핵무기 제조 전문가로 잘못 알려진 이휘소 박사는 1977년 6월 16일 페르미연구소의 자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콜로라도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장례식에서 당시 페르미연구소장이던 윌슨은 그를 이렇게 추모했다고 한다.

“이휘소가 다빈치나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특별한 영감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했습니다. 근대의 이론 물리학자 20인을 거명한다면 이휘소는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인물입니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3.10.1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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