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9일 토요일

정약용, 뇌록의 진기함을 읊다

정약용, 뇌록의 진기함을 읊다

뇌성산 뇌록산지,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

 
 
사이언스타임즈 라운지   “동산의 뇌록도 그 역시 진기하여 / 돌에 박힌 파란 줄기가 복신처럼 생겼구나 / 염국에서 공물로 그를 받지 않았기에 / 영롱의 종유혈이 천년 내내 계속이라네.”

이 시는 다산 정약용이 포항시 장기면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기성잡시’ 중의 일부 구절이다. 신유박해로 조정에서 쫓겨난 다산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기 직전에 깊은 산골이면서 어촌인 장기에서도 약 9개월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 뇌성산의 뇌록 채굴 갱도 입구.  ⓒ문화재청
 

다산이 시에서 언급한 뇌록(磊綠)은 포항 뇌성산에서 나오는 일종의 광물자원으로서, 녹색을 띠고 쉽게 분말로 제작할 수 있어서 조선시대 건축물의 단청에 사용되어 온 전통 천연안료이다. 뇌록을 구성하는 주 광물은 철분이 풍부한 운모류의 일종인 셀라도나이트로서, 현무암 내의 균열을 따라 충진된 상태로 나타난다.

단청은 목조건물에 갖가지 빛깔로 무늬를 그려서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선조들이 단청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비바람 등에 의한 목조건물의 부식이나 건습 등을 방지해 내구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또 단청을 하면 옹이나 흠집 등 목재의 단점을 감추고 외관을 미려하게 꾸밀 수 있다. 그밖에 궁궐이나 사찰 등의 건물에 위엄과 신비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단청에 사용되는 안료는 녹색 계통에 하엽, 석록, 삼록, 뇌록, 청색 계통에 청화, 청화묵, 이청, 삼청, 백색 계통에 진분, 정분, 적색 계통에 당주홍, 연지, 석간주, 번주홍, 황색 계통에 석웅황, 동황, 황단, 흑색 계통에 송연 등이 있었다.

단청을 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안료는 진한 녹색인 뇌록과 진붉은 밤색인 석간주였다. 주로 기둥과 같은 수직적인 부재에는 석간주가, 창방과 평방 위쪽의 부재에는 뇌록이 사용됐다. 단순히 뇌록이나 석간주를 칠하는 것으로 끝내는 걸 ‘가칠단청’이라 한다. 따라서 단청(丹靑)이라는 말도 기본색이 되는 붉은 단(丹)과 푸를 청(靑)이 합쳐져 붙여진 이름이다.

뇌록에는 방부제 기능을 하는 성분 있어
특히 뇌록은 단청 칠을 할 때 가장 먼저 사용되었다. 뇌록은 목재 표면을 보호하는 코팅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부식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바탕색으로 칠할 경우 다른 색상과의 착색력도 우수하다. 실제로 뇌록에는 헥사클로로벤젠이라는 성분이 있어서 방충 및 살충 작용을 하며 곰팡이를 살균함으로써 방부제 기능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청은 지난 10일 경북 포항 뇌성산 뇌록산지 일원 2천841㎡를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했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뇌록 산출지로서, 한반도 지각 진화 이해에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는 지질학적 가치 및 조선시대 단청의 바탕칠에 사용되었던 전통안료 공급지로서의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문화재청은 지정 예고한 포항 뇌성산 뇌록산지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에 수렴된 이해관계자 및 각계의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천연안료는 1900년대 초 서구에서 값싸고 쓰기 편한 화학안료가 들어오면서 차츰 밀려났다.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화학안료만 사용한 탓에 단청 기법은 문양만 전승됐을 뿐 천연안료 기술은 맥이 끊긴 상태다. 그로 인해 뇌성산의 뇌록산지 역시 잡초 속에 묻혀 옛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방치돼 있었다.

그러다 1996년부터 지역 향토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문화재 지정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2007년 경북 문화재위원회가 열림으로써 그 문제가 정식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굴과 시료 조사 등에 들어가는 예산 확보가 어렵다는 이유로 무산되고 말았다.
▲ 복원 공사 중에 공개된 숭례문의 처마부 단청.  ⓒ연합뉴스

그런데 지난해 여름 숭례문 복구팀이 단청 안료 수집을 위해 현장답사를 오면서 뇌성산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2008년 2월 방화로 훼손된 숭례문은 복구되면서 단청 안료도 기존에 썼던 화학안료 대신 천연안료를 사용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화학안료는 색상이 선명하고 빛깔이 고운 장점이 있으나 여러 색을 혼합하면 화학적 상호작용으로 색이 탁해지거나 건조 후 변색이 빠르게 진행되는 단점을 지닌다. 더구나 나무에 막을 형성해 쉽게 썩고, 중금속인 비소 성분이 들어 있어 환경에도 좋지 않다.

그러나 뇌성산을 답사한 숭례문복구팀은 뇌록의 매장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며, 뇌록 정제기술을 복원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천연안료를 수입해 쓰기로 최종 결정했다.

전통안료의 제조기술 확보해야
이번에 뇌록산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한 날은 공교롭게도 문화재청이 전통 기법으로 복구한 숭례문을 향후 2년간 종합적으로 점검한다고 밝힌 것과 동일한 날이다. 종합 점검을 하는 이유는 숭례문 단청이 복구 직후부터 벗겨지기 시작해 최소 20곳 이상 박락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단청 공사에 일본산 안료를 사용한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전통안료는 한반도에 다양한 색상이 매장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조선시대 때도 중국이나 서역으로부터 수입 사용한 것이 많았다.

문제는 전통안료 제조기술의 확보에 있다. 천연안료의 재료가 돌가루다 보니 입자 크기에 따라, 또 칠하는 횟수에 따라 색깔이 달라져 특별한 요령이 필요하다. 더구나 천연안료는 아교에 개어서 사용해야 한다. 아교는 날씨가 너무 춥거나 더워도 작업하기 어렵고 농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아 다루기가 무척 힘든 재료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1980년대 아교의 대량 생산이 중단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체계적인 연구를 거치지 않고 숭례문 복구에 바로 전통안료를 사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해 왔다. 숭례문 단청 작업의 총책임을 맡은 중요무형문화재 홍창원 단청장조차 당시에 “전통안료 제조 기술을 되살려 문화재에 사용해도 될 만큼 좋은 안료를 만들어내려면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발언할 정도였다.

숭례문 복구 과정에서 문화재청 내에서도 전통안료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장기적으로 그 제조기술을 확보하고 사용 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통방식의 단청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뇌록을 비롯해 각종 천연안료와 아교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거기에 현대의 첨단 기술을 적용할 경우 더 우수한 고기능성의 전통안료가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뇌록산지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계기로 천연안료에 대한 관심이 더욱 확대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3.10.18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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