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善惡의 이분법 없다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지난 14일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언어철학)는 <이것을 저렇게도- 다원주의 실재론>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체계 의존적인 논리>라는 내용을 갖고 두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원래 다원주의(pluralism)란 특정한 하나의 것만을 주류로 간주하려는 사고방식과 반대되는 관점이다. 즉 어떤 단 하나의 접근방식이 대폭적인 지지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다수의 양식이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회는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뤄져 있으므로 권력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에 의해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된다고 본다.
원래 다원주의(pluralism)란 특정한 하나의 것만을 주류로 간주하려는 사고방식과 반대되는 관점이다. 즉 어떤 단 하나의 접근방식이 대폭적인 지지나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다수의 양식이 공존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회는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뤄져 있으므로 권력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에 의해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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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는 현대인의 관심 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린다. 사진은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강의하고 있는 모습. ⓒScience Times |
전쟁보다 의견 차이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아
인간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의견 차이로 죽은 사람이 전쟁으로 죽은 사람보다 많다고 한다. 특히 종교에서는 더욱 그렇다. 절대주의 시대에 인간이 일관성을 유지하며 진지하게 사유했던 방식을 보여주는 증거다. 진리가 하나라면 논리도 하나이고 참 이론은 그러한 논리나 진리와 동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의 현상들은 잡다하지만 그 유일한 진리를 향한 역사의 발전과정은 필연적인 것이라, 그러한 진리에 대한 유예(猶豫)나 이견(異見)은 필연적 진리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봤다. 많은 사람들이 소위 ‘진리의 이름’으로 화형(火刑)의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20세기는 절대의 해체 시대라 할만하다. 세기가 시작될 무렵 니체(F. Nietzsche)는 “신이 죽었다”고 선포했다. 니체는 절대자 신앙이 인식론적으로 더 이상 정당하지 않고 절대자 신앙에 근거한 전통적 윤리는 효력이 없어졌다고 하여 절대자 관념을 해체한 것이다.
한편 철학의 몰락을 예고한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은 “언어는 놀이”라고 봤다. 지상 언어가 모방해야 하는 천상의 논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상 언어는 인간 공동체의 생활양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천상 논리와 지상 언어간의 이분법을 해체했다.
또한 타르스키(A. Tarski)는 “진리의 언어 의존성”을 지적했다. 진리는 문장의 수식어이기 때문에 특정 언어가 제시되지 않으면 제시된 문장의 진리의 가치는 평가될 수 없다면서 실체의 이름으로서의 진리를 해체했다.
절대적인 논리와 진리, 진리 20세기 전반부에 해체돼
절대적 객관성과 논리, 언어와 진리 같은 기본 개념이 20세기 전반부에 해체됐기 때문에 그 후반부의 해체 확산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을 것이다. “인식은 없다”, “역사의 종언”, “철학은 죽었다”, “문학은 없다”, “저자의 죽음”, “미술은 없다” 등의 구호들이 제시됐다.
19세기까지가 절대주의 시대였고 20세기가 절대의 해체 시대라면 21세기는 다원주의 시대라 할만하다. 다원주의는 절대주의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다른 관점에 대한 관용, 인정, 열림을 도입했다. 그렇다면 다원주의 도입으로 사람들은 선하고 남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정신을 갖게 됐는가?
상대주의가 역사적으로 다원주의의 원류를 이루고, 현대에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원주의의 성립을 도왔다면, 패러다임은 학문사회에서 다원주의의 확장에 가장 많이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패러다임(paradigm)이란 무엇인가?
패러다임은 과학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된 이론
패러다임이란 하나의 틀이다. 특정한 성질이 가미된 틀, “어떠한 두 이론도 비교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파악된 틀인 것이다.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쿤(Thomas Kuhn)이 과학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제안한 이 이론은 많은 분야에 영향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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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쿤 교수는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교체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위키피디아 |
쿤의 새로운 과학관은 과학 진보의 혁명적인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학적인 진보의 계기가 되는 혁명은 하나의 이론 구조 포기와 그 자리를 양립 불가능한 다른 이론이 대신하는 것으로서 이뤄진다. '과학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과학의 역사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과학 활동의 한 시기의 단계와 다음 시기의 단계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가설과 반박(conjectures - refutations)의 과정 개념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쿤은 그러한 물음들에 패러다임론으로 답한다. 쿤의 관점은 언어철학적으로 구성해 봄으로써 그의 패러다임론이 절대주의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 개념적 대안이 되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은 먼저 무엇이 문제인가를 규정한다.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문제를 달리 규정하고,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는 경제현상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불교는 욕심을 모든 문제의 근본으로 이해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을 원초적 문제로 해석한다.
각 패러다임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 해결, 설명의 표준을 제시하고 그러한 해결이나 설명에 이르는 과정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가치나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제시한다. 특정 패러다임의 이러한 기능을 따르는 사람은 그 패러다임이 인도하는 특정한 세계관에 도달할 것이다.
쿤은 발전(progress)의 개념을 진보와 혁명으로 구별한다. 진보(development)는 연구의 단계들이 연속적, 점진적, 축적적이지만, 혁명(revolution)은 연구의 단계들이 단절적, 창조적, 혁신적이다. 따라서 쿤의 패러다임론에 따르면, 과학은 진보가 아니라 혁명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발전’은 혁명적이면서 어떻게 발전일 수 있는가? 쿤은 이를 위해 진화개념을 들여온다. 진화과정에서 임의의 두 단계, 예를 들면, 원숭이 단계와 인간 단계 간에는 비교가 없었다고 상정된다.
원숭이 단계에서 일단의 원숭이들이 두 단계간의 비교를 하고 선택하여 인간 단계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교 없이 두 단계의 단계적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앞 단계에서 뒷 단계로의 전환은 혁명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전환이 ‘발전’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론이 “어떠한 두 이론도 비교될 수 없다”는 명제로 요약될 때 이것은 한편으로 절대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다원주의와 대조된다. 절대주의는 “태양이 하나이듯 진리도 하나”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으로부터 유일 체계적이지만 패러다임론은 이론들 각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존중한다.
절대주의가 사람의 주인이지만 패러다임론은 사람이 그 주인이 된다. 한편 패러다임론은 체계들의 복수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원적이지만 문제를 공유하지 않는데 비해, 다원주의는 더 나아가 동일한 문제에 대해 다른 설명의 체계들이 하나 이상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론은 다원주의의 이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가설과 반박(conjectures - refutations)의 과정 개념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쿤은 그러한 물음들에 패러다임론으로 답한다. 쿤의 관점은 언어철학적으로 구성해 봄으로써 그의 패러다임론이 절대주의에 대해 어떤 의미에서 개념적 대안이 되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은 먼저 무엇이 문제인가를 규정한다.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문제를 달리 규정하고,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는 경제현상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불교는 욕심을 모든 문제의 근본으로 이해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을 원초적 문제로 해석한다.
각 패러다임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 해결, 설명의 표준을 제시하고 그러한 해결이나 설명에 이르는 과정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가치나 중요성의 우선순위를 제시한다. 특정 패러다임의 이러한 기능을 따르는 사람은 그 패러다임이 인도하는 특정한 세계관에 도달할 것이다.
쿤은 발전(progress)의 개념을 진보와 혁명으로 구별한다. 진보(development)는 연구의 단계들이 연속적, 점진적, 축적적이지만, 혁명(revolution)은 연구의 단계들이 단절적, 창조적, 혁신적이다. 따라서 쿤의 패러다임론에 따르면, 과학은 진보가 아니라 혁명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발전’은 혁명적이면서 어떻게 발전일 수 있는가? 쿤은 이를 위해 진화개념을 들여온다. 진화과정에서 임의의 두 단계, 예를 들면, 원숭이 단계와 인간 단계 간에는 비교가 없었다고 상정된다.
원숭이 단계에서 일단의 원숭이들이 두 단계간의 비교를 하고 선택하여 인간 단계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교 없이 두 단계의 단계적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앞 단계에서 뒷 단계로의 전환은 혁명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전환이 ‘발전’으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론이 “어떠한 두 이론도 비교될 수 없다”는 명제로 요약될 때 이것은 한편으로 절대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다원주의와 대조된다. 절대주의는 “태양이 하나이듯 진리도 하나”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으로부터 유일 체계적이지만 패러다임론은 이론들 각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존중한다.
절대주의가 사람의 주인이지만 패러다임론은 사람이 그 주인이 된다. 한편 패러다임론은 체계들의 복수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원적이지만 문제를 공유하지 않는데 비해, 다원주의는 더 나아가 동일한 문제에 대해 다른 설명의 체계들이 하나 이상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론은 다원주의의 이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저작권자 2012.07.16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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