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관광가이드 종말론(Eschatology)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인류와 세상의 종말 그리고 그 이후를 위한 대비를 논의하는 신학으로 굳이 기독교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에 종말론적 영향을 준 것은 고대 페르시아에서 성행한 조로아스터교다.1) 성서의 대홍수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에 기록된 서사시 <길가메시 이야기>에서 그 원형이 발견되며 후자 또한 최초의 버전이 아니다.2) 심지어 대홍수 에피소드는 인도의 <마누 신화>에서도 발견된다.3) 종교에서의 종말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옛날에는 죄인들이나 신앙인들의 수가 어느 선에 이르면 그들 공동의 죄 혹은 공동의 신앙이 종말을 재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적 근거를 중시하는 과학소설에서도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종종 담아낸다. 이를테면 혜성 또는 소행성의 지구 충돌, 전면 핵전쟁,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범람, 새로운 빙하시대의 도래,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로 인한 파국, 치유방법이 없는 유전병의 확산, 외계인의 침공 그리고 태양의 폭발 등에서 보듯 천재지변 혹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재앙으로 인류가 멸종의 문턱에 다가서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총론적으로 보면 과학소설이 제기하는 다양한 종말의 근거들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사람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 했던 종교적 종말론과 적잖이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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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소설에서 종말에 대한 공포는 위의 그림에서처럼 새로운 빙하시대의 도래 외에도 혜성 또는 소행성의 지구 충돌, 전면 핵전쟁,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범람, 환경오염과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로 인한 파국, 치유방법이 없는 유전병의 확산, 외계인의 침공 그리고 태양의 폭발 등 다양한 천재지변이나 인간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재앙으로 나타난다.(위 그림은 SF잡지 [어메이징 스토리즈] 1929년 1월호 표지로 6번째 빙하기가 소재이다.) ⓒFrank R. Paul |
예기치 않은 천체의 출현은 예로부터 민심을 흉흉하게 달구었는데 초창기 과학소설에서도 혜성이나 다른 행성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의 태양이 아닌 다른 항성이 지구와 인류의 존망을 위협하곤 했다.
아마 미지의 천체와의 조우로 인한 인류 절멸의 가능성을 그린 최초의 문학작품은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원형적 과학소설 단편 <아이로스와 차미온의 대화 The Conversation of Eiros and Charmion, 1850>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이제까지 관측된 바 없던 새로운 혜성이 지구와 충돌궤도에 들어선다. 다행히 혜성은 지구를 살짝 비껴나가지만 워낙 가까이 다가와 지구 대기를 빨아 당기는 바람에 호흡이 어려워지고 혜성의 마찰열로 체온이 올라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죽어간다.
H. G. 웰즈(Wells)의 단편 <항성 The Star, 1897>에서는 혜성 대신 외부 항성이 태양계에 무단침입 한다. 이 별은 해왕성과 목성을 차례로 먹어치우더니 급기야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 우리 태양과 외부 항성의 상호 중력간섭으로 지구는 그 사이에서 새우등 터질 일만 남은 것이다. 외부 항성의 조석력 탓에 지구의 대양과 지각이 요동을 치는 바람에 인류의 대다수가 멸종하고 문명이 사라진다. 다행히 달의 간섭으로 항성의 궤도가 지구를 살짝 우회하게 된 덕분에 극소수의 생존자들이 두 개의 태양으로 옥토가 된 그린란드에서 새로운 삶을 가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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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 G. 웰즈의 단편소설 <항성, 1897>은 외부 항성이 태양계에 무단침입하여 해왕성과 목성을 차례로 먹어치운 끝에 지구마저 멸망의 나락으로 몰아넣는 이야기다. ⓒLudek Marold |
필립 와일리(Philip Wylie)와 에드윈 발머(Edwin Balmer)의 장편 <세계들이 충돌할 때 When Worlds Collide, 1933>에서는 불청객이 태양계 외부에서 온 거대행성으로 바뀌었을 뿐 플롯의 얼개는 대동소이하다. 이외 프리츠 라이버(Fritz Leiber)의 <배회자 The Wanderer, 1965> 그리고 래리 니븐(Larry Niven)과 제리 퍼낼(Jerry Pournelle)의 <루시퍼의 망치 Lucifer's Hammer, 1977>가 유사한 테마를 다루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주 차원의 사건에 비하면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지구촌 안에서 각종 이해관계로 갈등을 빚는 인류사회의 각성을 촉구한다.
영국 여류작가 메리 쉘리의 장편 <최후의 인간 The Last Man, 1826>은 전염병으로 인류가 전멸하는 이야기 유형의 효시다. 역병으로부터는 세 사람이 살아남지만 그나마 그중 둘은 폭풍으로 바다에 빠져 죽는 바람에 지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혼자 텅 빈 도시를 방황한다. 그는 혹여 또 다른 생존자를 만났을 때 자신이 공포나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늘 말쑥하게 단장하지만, 그러한 노력도 헛되이 언제까지고 무인도시에 홀로 남겨진다. 21세기에 발표된 마가렛 앳우드(Margaret Atwood)의 장편 <홍수 The Year of the Flood, 2009>에서는 <최후의 인간>과 유사한 상황을 전제한 가운데 살아남은 소수의 금욕적인 종교집단이 고대 근동의 쿰란 지방에 존재했던 에세네파 공동체처럼 타락한 인류가 초래한 멸망의 날을 담담하게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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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는 주요한 동인의 하나로 자주 꼽히는 것이 치료제를 개발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돌림병이다. 메리 쉘리의 <최후의 인간, 1826>이 이러한 유형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Andrews UK Limited |
특히 웰즈가 발표한 주요작품들은 거의 다 어떤 식으로든 종말론과 결부된다. <타임머신 The Time Machine, 1895>은 시간여행을 통해 인류와 지구의 종말이 예정된 미래를 그렸고 <두 세계들 간의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1898>에서는 화성인 침공을 통해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인류사회에 빗대 대영제국의 몰락한 현실을 풍자했으며, <해방된 세계 The World Set Free, 1914>에서는 원자폭탄의 발명으로 한 사회나 국가가 아니라 아예 지구촌 전체의 자멸을 가져올 불안한 미래를 경고했다.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문명의 파탄을 우려하는 테마는 후일 월터 M. 밀러 2세(Walter Michael Miller, Jr.)의 장편 <라이보위츠를 위한 송가 A Canticle for Leibowitz, 1955>에서 더욱 깊이 있게 변주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소설에서 무너진 과학문명의 편린들을 고이 모아 수도원이 후세에 전수한 지식은 또 다시 핵폭탄 개발로 이어진다.
블랙유머가 장기인 컷 보네것(Kurt Vonnegut)의 장편 <고양이 요람 Cat's Cradle, 1963>에서는 원자탄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한 가상의 무기 아이스나인이 세상의 종말을 재촉한다. 아이스나인은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펠릭스 호네커 박사(가공의 인물)가 개발한 신무기로 상온에서도 물을 얼릴 수 있는데, 하필이면 이것을 실은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는 바람에 온세상의 물이 삽시간에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얼어버린다. 사실상 지구상의 물은 전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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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컷 보네것의 장편 <고양이 요람, 1963>에서는 상온에서 물을 얼릴 수 있는 신무기인 아이스 나인이 바다에 떨어지는 바람에 온 세상의 강과 바다가 얼어붙어 생태계 교란으로 인류의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Matt Mims |
20세기 중반에는 영국의 사변작가 제임스 그래엄 밸러드(James Graham Ballard)의 이른바 ‘재앙4부작’이 종말론 문학의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어디에서 부는지 알 수 없는 바람 The Wind from Nowhere, 1962>과 <물에 잠긴 세계 The Drowned World, 1962>, <불타버린 세계 The Burning World, 1964>4) 그리고 <크리스털 세계 The Crystal World, 1966> 등은 하나같이 인류문명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거나 헤쳐 나가기 버거운 자연환경의 급변(태양의 이상과열로 지구 대부분 지역의 열대지방화, 또는 해수면의 환경오염으로 물의 증발이 차단되어 전대륙의 사막화)이나 기괴한 변이(정체불명의 인체 크리스탈화)로 인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감정을 밀도 있게 그렸다.
같은 1960년대 발표된 미국 작가 프랭크 허벗(Frenk Herbert)의 장편 <녹색 지능 The Green Brain, 1966>은 환경파괴로 인한 인류의 자충수를 경고하기 위해 바다 대신 정글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서 정글을 대대적으로 개간하기 위해 곤충박멸을 추진한 인류는 살충제로도 모자라 전파진동장치까지 동원해 간신히 성공하지만 이내 낭패를 당했음을 깨닫는다. 곤충이 사라지자 식물은 수분을 원활하게 흡수하지 못해 죽어가고 공기를 통하게 하는 동시에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줄 적임자가 없어 초원 전체가 죽어간다. 설상가상으로 새들마저 잡아먹을 곤충이 없어져 함께 멸종의 나락으로 밀려난다.
종말의 규모를 지구와 인류 단위가 아니라 아예 우주 전체 내지 복수우주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례도 있다. 올라프 스태플든(Olaf Stapledon)의 <별의 창조자 Star Maker, 1937>는 우주들의 진화와 죽음 그리고 재탄생을 유체이탈한 주인공이 시공을 초월해 생생하게 목도하는 장엄한 드라마로서 가히 종교적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작가의 의도는 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가운데 영토확장과 패권쟁탈에 여념이 없는 유럽 국가들이 시선을 돌려 우주의 진화 파노라마에 동참함으로서 보잘 것 없는 이전투구를 그치고 평화와 안녕에 눈길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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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라프 스태플든의 <별의 창조자, 1937>는 종말의 규모를 지구와 인류 단위가 아니라 아예 우주 전체 내지 복수우주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례로, 우주들의 진화와 죽음 그리고 재탄생을 유체이탈한 주인공이 시공을 초월해 생생하게 목도하는 장엄한 드라마다. ⓒLes Edwards |
개중에는 이승에서의 삶이 끝이 아님을 SF의 틀을 빌려 이야기한 작품도 있다. 클리포드 D. 시맥(Clifford D. Simak)의 <시간이여 돌아오라 Time and Again, 1951>5)는 장기간 실종되었던 우주비행사가 지구로 귀환한 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이야기다. 이 우주비행사가 머물렀던 먼 외계행성에는 다름 아닌 우리의 영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 행성에서 겪은 혼란스러운 동시에 뒤죽박죽된 관찰내용은 종교 갈등은 물론이고 급기야 전쟁까지 야기한다.
<종말론 그 5,000년의 역사>의 저자 유리 루빈스키와 이안 와이즈먼에 따르면, 종말의 예견과 경고는 예외 없이 현재의 사회적 상황이나 도덕적 상황 또는 정치상황이나 물리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6) 이러한 반응과 그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이성적이냐에 따라 그 스펙트럼은 신학적 논제(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적 광신)와 과학소설의 양극단 어디엔가 존재한다. 진지한 과학소설이라면 종말론적 소재를 단지 사회대중을 선동하는 데 써먹기보다는 세기말의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는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류의 비전을 모색하는 데 더 큰 비중을 기울일 것이다.
☞ 주요 추천작품(국내 소개작은 밑줄 표시):
▶ <최후의 인간 The Last Man, 1826> / Mary Shelly ▶ <아이로스와 차미온의 대화 The Conversation of Eiros and Charmion, 1850>(단편) / Edgar Allan Poe ▶ <세상의 종말 La Fin du Monde, 1893> / Camille Flammarion ▶ <타임머신 The Time Machine, 1895> ▶ <항성 The Star, 1897>(단편) / H. G. Wells ▶ <두 세계들 간의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1898년> ▶ <해방된 세계 The World Set Free, 1914> ▶ <세계들이 충돌할 때 When Worlds Collide, 1933> / Philip Wylie & Edwin Balmer ▶ <별의 창조자 Star Maker, 1937> / Olaf Stapledon ▶ <시간이여 돌아오라 Time and Again, 1951> / Clifford D. Simak ▶ <라이보위츠를 위한 송가 A Canticle for Leibowitz, 1955>/Walter Michael Miller, Jr. ▶ <최후의 질문 The Last Question, 1956>(단편) / Isaac Asimov ▶ <어디에서 부는지 알 수 없는 바람 The Wind from Nowhere, 1962> / James Graham Ballard ▶ <물에 잠긴 세계 The Drowned World, 1962> / James Graham Ballard ▶ <고양이 요람 Cat's Cradle, 1963> / Kurt Vonnegut ▶ <불타버린 세계 The Burning World, 1964> / James Graham Ballard ▶ <배회자 The Wanderer, 1965> / Fritz Leiber ▶ <녹색 지능 The Green Brain, 1966> / Frenk Herbert ▶ <크리스털 세계 The Crystal World, 1966> / James Graham Ballard ▶ <다섯 운명 Five Fates, 1970>(중편선집) / 편집자 Keith Laumer / 수록작가: Poul Anderson, Gordon R Dickson, Harlan Ellison, Frank Herbert, Keith Laumer ▶ <루시퍼의 망치 Lucifer's Hammer, 1977> / Larry Niven & Jerry Pournelle ▶ <오메가 포인트 3부작 The Omega Point Trilogy, 1983> / George Zebrowski ▶ <다양성: 시간 Manifold: Time, 1999> / Stephen Baxter ▶ <신의 궤도<신의 궤도, 2011> / 배명훈 ▶ <홍수 The Year of the Flood, 2009> / Margaret Atwood
1) 조로아스터교는 선한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마 아리만의 투쟁 끝에 전자가 승리하고 인간들은 이승에서의 자신들의 행실을 사후심판 받는다고 보았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종말하고나면 모든 혼(魂)은 불로써 깨끗이 씻겨져 새로운 정의와 복락이 가득한 왕국이 도래하리라 믿었다.
2) <길가메시 이야기>에 수록된 대홍수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근동지방의 <지우쑤드라 이야기>의 홍수 에피소드가 변형 삽입된 것이다.
3) 유리 루빈스키와 이안 와이즈먼 지음, 김진경과 허영주 옮김, 종말론 그 5000년의 역사, 명경출판, 1992년, 25쪽
4) 이듬해 재간되면서는 제목이 <가뭄 The Drought>으로 바뀌었다.
5) 페이퍼백 판형의 제목은 <애초에 그는 죽었었다 First He Died>이다.
6) 유리 루빈스키와 이안 와이즈먼 지음, 김진경과 허영주 옮김, 종말론 그 5000년의 역사, 명경출판, 1992년, 25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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