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희망 너머의 아이러니들
과학명저 읽기 (6)
과학명저 읽기 “원자폭탄 만드세요?”라고 사서가 물었다. 사서가 심심했나 싶어 살짝 웃어 주었다. “원자폭탄 만들어?”라고 저녁 때 큰 딸이 물었다. “똑같은 물음이네!”라며 사서 이야기를 하며 같이 웃었다. “아빠, 원자폭탄 만들어?”라며 밤중에 여고생인 막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큰 애가 깔깔대는 소리를 들으며 도대체 왜들 그러냐고 푸념만 하였다. 리처드 로즈의 ‘원자폭탄 만들기’ 2003년 번역판을 대출하며 벌여진 일이었다.
이리 저리 상념들을 굴리니, 지난 겨울의 3차 북핵 실험 탓이겠거니 하다가도, 핵무기야말로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공물인데 사람들의 유난한 반응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 만들기’란 제목 탓일 수도 있다는 데 생각 미치니, “실용, 실용” 되뇌다가 물건에 담긴 이야기에는 청맹과니가 되버렸나하는 근거 없는 걱정도 솟는다.
저자인 로즈의 이야기 솜씨 또한 훌륭하다. 그는 여전히 학계 바깥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인 레오 질라드의 이야기로 책을 시작해서 ‘원자’가 아직 상상의 존재에 불과하였던 19세기 말로 돌아갔다가 수폭 개발까지 내려온다. 저술 당시까지의 과학사나 2차대전사 연구결과들을 충실히 반영한 점은 명저로서 당연하다고 치부하더라도, 유럽-북미 열강의 역사와 물리학계의 흐름을 슬쩍 교차시켜 녹여내는 솜씨는 연구논문을 쓰도록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라 소설가였던 덕분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 원자폭탄과 관련된 신화들을 붕괴시키는 것도 기쁘다. 로즈의 책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신화와 바램들 몇 가지. 아인슈타인이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보냈던 유명한 편지는 실제 원자폭탄 제작 착수에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원서와 달리 두 권으로 나뉜 우리말 판본에는 절묘하게도 1권 마지막 장에서 영국 MAUD 위원회의 보고서가 부각되었는데, 원폭제조의 방아쇠는 바로 이 보고서가 당겼다. (원서 이상의 훌륭한 편집이었지만, 주석과 참고문헌이 생략된 점은 아쉽다). 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전후에 반핵으로 돌아섰다는 인상도 근거가 없다. 그는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노선-원자폭탄의 지속적인 개량-을 지지했었다. 당연히 수소폭탄의 기술적 가능성과 지지자들의 힘이 뚜렷해지자 반대를 그만 두었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라는 명예(인 동시에 오명)을 거부하지 않았던 에드워드 텔러의 과학적·기술적 기여도 이름값에 비해서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한 권의 입문서로서, 또는 독자가 주목하는 특정 사건이나 주제가 원폭의 초기 역사 전체에서 어떤 맥락에 위치하는지를 살펴보기는 최고이지만 ‘원자폭탄 만들기’에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군산복합체나 원자력-핵 공동체의 기원을 보고 싶으면 기초연구와 원폭설계를 담당한 로스 알라모스보다는 맨해튼 계획 내부의 대형 프로젝트들이 집중되었던 오크리지나 핸포드의 원자력 단지에 관심이 가지만 이 두 지역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소략한 편이다. 또 원폭의 물리학과 공학에 대해서는, 즉 정말 원자폭탄을 만들고 싶으면 L. Hoddeson 등이 함께 쓴 'Critical Assembly(1993)'가 적절하다. 원자폭탄의 역사를 반추할 때 항상 나오는 의문, “나라면 원자폭탄 투하를 지지했을까?”를 자문자답하기 위한 정보도 일부 누락되어 있다. 이는 로즈의 탓이라고 하기는 힘든데, 구체적인 입안이 진행되었던 올림픽 작전(큐슈 상륙작전)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 중엽에나 가닥이 잡혔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전쟁지도부의 판단과 행태로 볼 때, 원폭투하 이외의 다른 대안을 택했더라면 미군은 물론이고 더 많은 일본 민간인의 희생이 초래되었을 것이라는 비참한 가능성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랬다면 한반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원자폭탄에 대한 아이러니 중의 아이러니는 국내 정치적 권력게임을 중시한 그로브즈 장군이나 트루만의 국무장관 번즈보다는 그들이 순진하고 위험하다고 여긴 질라드나 보어가 적어도 냉전시대의 흐름을 더 잘 예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차라리 어떤 국가도 안전보장을 확보할 수 없을 정도로 원자폭탄이 강력해서, 각 국가들이 역설적으로 평화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기를 희망했었다. 과연 그들의 바람처럼 원자폭탄이 충분히 강력했을까? 이처럼 아이러니와 씨줄과 역설의 날줄로 짜인 원폭문제는 당장의 공포와 분노로는 재단할 수 없다는 점이 역사였고, 어쩌면 여전히 현실이다. 그리고 이를 어쩔 수 없이 납득하게 만들기에 ‘원자폭탄 만들기’가 앞으로도 한동안 양서이리라는 점 또한 슬픈 아이러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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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2013.05.09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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