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9일 일요일

철도가 그려낸 근대의 내면 풍경

철도가 그려낸 근대의 내면 풍경

과학명저 읽기 7

 
과학명저 읽기 KTX란 무엇인가? 수백 명의 사람을 태우고서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힘과 속도와 효율의 결집체이다. 또 듣기엔 멋있지만 겪으면 피곤한 ‘1일 생활권’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계이자 시스템이다.
볼프강 쉬벨부쉬의 ‘철도여행의 역사’를 읽고나면 KTX에 대해 궁금한 것이 더 많아진다. 이런 놀라운 힘과 속도와 효율은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의 몸과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시속 300킬로미터로 이동하는 인간은 그 이전 시대의 인간과 무엇이 다른가? 서울사람에게 부산은, 또 부산사람에게 서울은 이전과 어떻게 다른 의미를 가지는가? 쉬벨부쉬는 시속 50킬로미터도 내지 않았던 19세기 중반의 초기 철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지만 그가 던진 물음들 중 상당수는 KTX를 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19세기의 철도여행은 인간이 자연과 세계를 육체적, 심리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철도 이전의 여행, 가령 우편마차를 타고 가는 여행은 매우 감각적인 경험이었다. 상하좌우로 흔들리면서 나아가는 마차 위에서 여행자는 “속도를 들었고, 보았고, 고조된 흥분 상태를 통해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속도를 “마차를 끄는 고귀한 말의 시뻘개진 눈동자에, 벌어진 콧구멍에, 근육의 동작에, 그리고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는 발굽에 살아 있는 무엇”으로 경험했다.

기차에 올라탄 여행자는 땅의 불규칙한 굴곡 대신 기계의 규칙적인 진동을 느꼈고 기차여행은 마차여행에 비해 덜 육체적이고 덜 감각적인 경험이었다. 기차여행자는 “어떤 놀라운 힘이 우리를 그렇게 빠르게 추진시키고 있는지를 거의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공간적 이동의 속도가 올라갈수록 여행자의 경험이 더욱 정적으로 변하는 과정은 20세기의 비행기 여행으로 이어졌다. 시속 800킬로미터로 태평양을 건너가는 비행기 안에서 여행자는 속도를 느끼고 판단할만한 기준을 잃어버리고 오직 좌석 앞 스크린에 표시된 지도를 통해 현재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가장 빠른 여행은 곧 가장 정적이고 지루한 여행이다.

마차여행자가 천천히 지나가는 주변의 풍광을 즐기면서 옆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처음 기차에 탄 여행자에게 주변 풍경은 ‘파노라마’식으로 빠르게 스쳐갈 뿐이었다. 풍경의 깊이를 관찰하고 음미할 수 없게 된 여행자는 기차 안으로 시선을 돌려보지만 앞에 앉은 사람과 오랫동안 눈을 마주치는 일은 상당히 어색했을 것이다.

“여행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여행의 목적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동반 여행객의 무리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대화도 없고 공동의 웃음도 없다. 한 여행자가 자신의 시계를 끄집어내거나 참을성 없이 무언가를 혼자서 중얼거릴 때, 때때로 끊어지는 부담스러운 침묵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기차 바깥의 풍경이 사라지면서 여행자는 ‘가상의 대체 풍경’으로서 신문과 잡지와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
▲ 철도가 만들어내는 것은 단지 새로운 속도와 효율과 제품과 서비스만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과 경험과 관습이다. ⓒScienceTimes

KTX는 기차여행이 주변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보다는 장소의 빠른 이동을 의미하게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KTX 열차 안에서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스마트폰 속의 ‘가상의 대체 풍경’을 즐기고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통로 천장에 설치된 모니터에서 연합뉴스 화면을 통해 바깥세상을 본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세상으로부터 더 멀어진 비행기 안에서 다양한 오락물 서비스가 더 발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눈으로 음미하고 몸으로 경험할 대상을 잃어버리고 서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머쓱해진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첨단 교통 시스템 곳곳에 깔려 있다.

단조롭지만 빠른 이동과정을 마친 여행자는 종착역에 도착하고, 곧 도시 한복판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여행자의 움직임을 따라가듯 쉬벨부쉬는 철도시스템의 확립을 19세기 후반 이후 도시계획의 변화 및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과 소비양식의 변화와 연결시켜 이해한다.

빠르고 끊임없는 사람의 이동과 상품의 순환이 서로를 부추기며 긴밀한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19세기 후반 오스망이 설계한 파리에서만이 아니라 21세기의 서울역에서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역에 도착한 ‘고객님’이 플랫폼에서 한 층을 올라가 넓은 대합실로 들어선 후 앞으로 곧장 걸어가면 활짝 열린 롯데 아울렛의 입구를 통과하게 된다. 그는 자막달린 연합뉴스 모니터를 쳐다보며 기차에 앉아 있다가 서울역에 내려서는 아울렛 매장에서 상품마다 정갈하게 붙은 가격표를 읽는다. KTX 기차 속 옆자리 승객과의 대화가 어색했듯이 아울렛 직원과의 흥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쉬벨부쉬의 표현에 따르면, “열차가 여행 중의 대화를 종결시켜 버린 것처럼, 백화점은 상거래시 일어나는 대화를 종결한다. 그리고 여행중의 대화가 여행 중의 독서로 대체되는 것처럼, 상거래 대화는 계속 확정된 가격들을 말없이 알려주는 가격표로 대체된다.”

철도가 만들어내는 것은, 또 대부분의 기술이 만들어내는 것은, 단지 새로운 속도와 효율과 제품과 서비스만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과 경험과 관습이다. 여행자로서 고객으로서 시민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을 다르게 경험하게 된 인간들이 새롭게 구성해내는 사회와 문화와 정치와 경제를 유기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쉬벨부쉬의 책이 그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소개 도서 : 볼프강 쉬벨부쉬/ 박진희 옮김, 철도여행의 역사: 철도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궁리, 1999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저작권자 2013.05.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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