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에 떠도는 ‘아르고노트’의 망령
시마네현 고시 좌표는 가상의 섬
사이언스타임즈 라운지 1815년 톰슨(Tomsom)이 만든 한국과 일본 지도(Corea and Japan)에는 우리나라 동해에 4개의 섬이 그려져 있다. 지금의 울릉도 자리엔 다줄레(Dagelet)라는 섬이, 울진 바로 옆에는 찬샨타오(Chun san tou), 그보다 더 멀리에는 팡링타오(Fan lin tou), 그리고 강릉 앞바다에는 아르고노트(Argonaut)라는 섬이 표시돼 있는 것.
그중 다줄레는 프랑스 항해사 라페루즈가 1787년 5월 27일 울릉도를 발견하고 그 섬을 처음 관측한 천문학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탐험의 안내서로 삼았던 당빌의 ‘조선전도’에 나오는 팡링타오(울릉도)와 찬샨타오(독도)는 확인하지 못한 채 떠나버렸다. 따라서 그는 팡링타오와 다줄레가 같은 섬인지 몰랐다.
그 후 모피를 가득 싣고 중국으로 향하던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콜넷(James Colnett)이 1791년 5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모피 하역이 금지되는 바람에 대한해협을 거쳐 일본으로 가 하역을 하려 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는 한반도 연안으로 와서 동해안을 북상하다가 북위 38도 동경 129도쯤 되는 곳에서 거대한 섬을 목격한 후 자신이 탄 배의 이름을 따서 ‘아르고노트’라고 명명했다. 콜넷의 탐사 결과는 당시 출판되지 않았으나 영국 해군 수로부에 보고된 후 널리 알려짐에 따라 강릉 앞바다에 아르고노트라는 가상의 섬이 생겨나게 됐다.
그중 다줄레는 프랑스 항해사 라페루즈가 1787년 5월 27일 울릉도를 발견하고 그 섬을 처음 관측한 천문학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하지만 그는 당시 탐험의 안내서로 삼았던 당빌의 ‘조선전도’에 나오는 팡링타오(울릉도)와 찬샨타오(독도)는 확인하지 못한 채 떠나버렸다. 따라서 그는 팡링타오와 다줄레가 같은 섬인지 몰랐다.
그 후 모피를 가득 싣고 중국으로 향하던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콜넷(James Colnett)이 1791년 5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모피 하역이 금지되는 바람에 대한해협을 거쳐 일본으로 가 하역을 하려 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는 한반도 연안으로 와서 동해안을 북상하다가 북위 38도 동경 129도쯤 되는 곳에서 거대한 섬을 목격한 후 자신이 탄 배의 이름을 따서 ‘아르고노트’라고 명명했다. 콜넷의 탐사 결과는 당시 출판되지 않았으나 영국 해군 수로부에 보고된 후 널리 알려짐에 따라 강릉 앞바다에 아르고노트라는 가상의 섬이 생겨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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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표시된 다케시마의 좌표가 실제로는 해상에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 곳임이 드러났다. 이 그림은 독도의 해저지형도이다. ⓒ국토교통부 |
이처럼 톰슨의 지도에 표시된 4개의 섬 중 다줄레와 팡링타오, 그리고 아르고노트는 사실 모두 울릉도를 가리켰던 것이다. 1813년 영국인 존스의 지도나 1816년 에스파냐의 트랑퀼로 모요의 지도에도 아르고노트 섬이 나타나는 걸로 보아 1840년대까지 유럽 고지도에는 강릉 앞바다에 울릉도만한 큰 섬이 있는 걸로 알려진 것 같다.
1850년대 이후 동해 해역을 항해하던 러시아와 프랑스의 군함 등이 지도에 나타나는 아르고노트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으나 그 섬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자 아르고노트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후 아르고노트는 지도에서 점선으로 표시되다가 결국 1870년대 이후에는 삭제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르고노트는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가리키는 별칭 사용에 큰 혼선을 일으키게 한 섬으로 남아 있다.
울릉도가 다케시마에서 마쓰시마로 바뀐 이유
1803년부터 1806년에 걸쳐 세계일주 항해를 한 크루젠스턴은 자신이 발간한 해도집에서 울릉도는 다줄레, 그 북서쪽에 위치한 아르고노트는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표기)라고 기록했다. 한편, 네덜란드 의사 시볼트는 7년간 일본에 체류한 뒤 1840년 귀국해 일본지도를 발행하면서 아르고노트를 다케시마, 다줄레를 마쯔시마(松島)로 표기했다.
이후 일본은 이를 차용해 한동안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라고 불렀다. 즉, 당시 일본인들은 시볼트처럼 울릉도를 아르고노트로 생각했던 것. 그러나 아르고노트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일본인들은 명칭에 혼란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1877년 이후 울릉도를 마쓰시마,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18세기까지만 해도 위도와 경도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그나마 적도에서 남북으로 잰 각거리인 위도의 경우 북반구에서는 북극성의 고도가 곧 관측 지점의 위도와 같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지구상의 동서 위치를 정하는 경도는 구하기가 힘들었던 것.
해안에서 가까운 항로는 길을 잃을 위험이 적지만, 범선을 타고 망망대해로 나갈 경우 정확한 경도를 알아야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 1707년 이탈리아 시실리섬 인근에서 영국 해군의 배 4척이 안개 속에서 위치를 잘못 파악해 암초에 부딪쳐 2천명 이상의 병사가 목숨을 잃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자 경도에 관한 대책을 촉구하는 민원이 빗발쳤다.
이에 영국은 1714년 경도법을 제정해 누구든지 경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방법을 제시한 사람에게 최고 2만 파운드의 상금을 준다고 발표했다. 당시에도 달의 운행경로 주위의 별들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예측해서 경도를 재는 월거(lunar distance)법이 있었지만 정작 바다에서는 정확성이 떨어졌던 탓이다.
경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동안 갈릴레이, 호이겐스, 뉴턴, 핼리 등 쟁쟁할 과학자들이 나섰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한 이는 영국 시골의 가난한 목수였던 존 해리슨이었다. 그는 동력을 전달하고 시간을 표시하는 톱니바퀴와 시계의 작동 속도를 조절하는 진동기를 연결해주는 부품인 탈진기를 개발해 1735년 해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시계인 ‘해리슨 1호(H1)’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존 해리슨이 정확성을 더욱 높여 만든 해상 시계 H-4는 영국에서 중앙아메리카에 위치한 자메이카까지 여행하는 동안 단 5초의 오차만 보일 정도로 정확성이 높았다. 그 덕분에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경도 문제는 상당한 발전을 거두었다.
1884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경도대회에서 세계 경도의 기준이 되는 본초자오선이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으로 결정된 것은 당시 해양강국이었던 영국의 입김 때문이었지만 존 해리슨이 만든 경도 측정 시계도 한몫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마네현 고시는 위도와 경도 모두 독도와 달라
그런데 최근 김신 경희대 교수가 밝힌 바에 의하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표시된 다케시마의 좌표가 실제로는 해상에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 곳임이 드러났다. 1905년 2월 22일 발표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는 독도에 대한 일본의 논리를 뒷받침 해주는 가장 중요한 문건으로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오키도와의 거리는 서북 85리에 달하는 도서를 죽도(竹島, 다케시마)라 칭하고 지금부터 본현 소속 오키도사의 소관으로 정한다.”
김 교수는 위에 나와 있는 좌표를 근거로 GPS와 인공위성지도, 독도 실측 등을 통해 확인한 결과, 그 지점에 아무런 실체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1989년 7월 22일 교통부 수로국 측량자료에 의하면 독도는 삼각점의 위치를 기준으로 북위 37도 14분 12.883초, 동경 131도 52분 22.715초에 자리 잡고 있다.
즉, 시마네현 고시에 명시된 다케시마의 위치는 독도로부터 위도가 5분, 경도가 3분 정도 차이나며 거리도 약 11㎞ 떨어져 있다. 1905년은 위도와 경도 측정기술이 오차가 허용되지 않을 만큼 발전해 있던 시기다. 때문에 측정상의 오류라고 변명하기도 그렇고,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증거로서도 매우 부적격하다.
시마네현 고시에서 밝힌 다케시마가 아르고노트처럼 실체가 없는 섬이라면, 이제 그들의 지도에서도 다케시마를 삭제해야 하지 않을까.
저작권자 2013.05.16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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