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 24일 월요일

과학기술, 왜 여성에게 좁은 문인가?

과학기술, 왜 여성에게 좁은 문인가?

한국과학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기술 분야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낮은 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기술 발전에서 여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과학기술은 여성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인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22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윤정로 KAIST 사회학 교수는 ‘여성이 과학 기술자가 되면?’ 이라는 주제로 두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는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을 목적으로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있다. 시작된지 올해로 5년째다. 사진은 22일 윤정로 KAIST 교수가 강의하고 있는 모습. ⓒScience Times

최근 과학기술도 드라마의 소재로 등장
1999년 ‘카이스트’라는 TV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과학기술 학도들의 삶을 진지하게 그려내 낯설고 어려운 첨단과학기술 지식을 친근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한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한 바도 컸다.

드라마에는 전자공학과의 젊은 여성 교수(이휘향 역)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당시 전자공학을 전공한 여성 교수가 실제 카이스트에는 없었고, 우리나라 전체 대학 어디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의 공학 교수 7,000여 명 중에서 여성은 50명 미만이고 전공 분야도 상당히 편중되어 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과학기술 분야로 진출하는 여성의 숫자가 많아지고 전공 분야도 다양해졌다. 또한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로 활약하는 여성 과학기술자들도 많아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박사는 젊은 여성 과학자였다.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주요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 여성과학자들이 포함되었으며, 금년에는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여성 과학자가 당선되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여성 과학기술자들의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단체활동이 활발해졌다.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2002년에 제정되고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들이 실시되고 있다.

과학기술 속의 ‘여성과 젠더’ 중요한 과제로 떠올라
과학기술 분야에 여성의 참여가 저조한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서구에서는 과학기술 분야의 저조한 여성 진출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여성들뿐만 아니라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더욱이 최근 기술혁신과 국가경쟁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여성의 과학기술 분야 진출에 대해서 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사회적 관심과 더불어 1960년대부터 서구 학계에서 과학기술 속의 ‘여성과 젠더’ 문제가 새로운 연구영역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지속적인 연구영역 확대와 다양한 이론화 작업이 이루어져 왔다.

최근의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분야의 여성 참여는 아직도 저조하고, 국제적으로도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여성의 눈, 즉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본 과학기술은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여성 과학기술자, 얼마나 되나?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여성과학자는 얼마나 될까? 근대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이 활동하고, 여성 과학자는 희귀한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의 위상에 관하여 3가지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과소대표(under-representation) 현상이다. 과소대표란 여성의 인구 비율 50%에 비해서 과학기술자 중 여성 비율은 50%를 밑도는 현상이다. 과학기술 분야는 다른 분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 정도가 심하다고 하는데, 국가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엘리트층에서는 여성의 과소대표가 극심하다. 1901년 시작부터 1998년까지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300여 명 중 여성은 10명, 3% 정도에 불과하다.

둘째, ‘누수관 현상’(leaky pipeline)이다. 과학기술자로서의 교육과 경력개발 과정을 거치며 고비 고비마다 여성들이 계속 빠져나감으로써, 활동하는 여성 과학기술자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남성보다 여성 이탈자가 더 많다. 일례로 결혼과 자녀 출산은 이탈의 위험이 높은 고비가 된다.

셋째, ‘가위’ 현상이다. 경력이 쌓이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남성의 비율이 증가하고 여성의 비율이 감소하는데, 이 현상을 그래프로 그리면 양 날이 엇갈리는 가위의 형태가 된다.

2008년의 자료를 통해서 상세히 보면, 과학기술 분야 전체 연구원 중 여성의 비율은 17.4%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정규직에서는 여성이 10.4%에 불과한 반면 비정규직에서는 32%를 차지해 대부분의 여성 연구원이 비정규직에 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 심각
▲ 마리 큐리는 노벨상을 두 차례나 받았지만 파리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은 되지 못했다. ⓒ위키피디아
이미 밝혔듯이 과학기술 분야에 여성의 참여가 저조한 것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서양에서는 자연과학이 군대 다음으로 가장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여성을 배제시켰던 분야였다고 한다.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진 서양의 대학에서 여성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야 비로소 입학이 허용되었다. 그것도 엄한 기준을 통과해야 했다.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는 하버드 대학은 여성 차별이 가장 심했던 대학으로도 손꼽힌다.

여성은 다시 대학원 입학을 거부 당했다. 과학기술이 전문직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제도적으로 여성의 대학원 입학을 막아놓은 채 박사학위 소지자가 아니라거나 여성을 고용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여성의 진출과 승진을 막았다. 그래서 하급직이나 보조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봉쇄조치가 없어진 이후에도 여성들이 과학기술 분야의 전문직에 취업하고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유명한 마리 퀴리의 일화는 과학기술계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얼마나 완강했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1910년 유서 깊은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정회원으로 그녀를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1903년 방사능 연구로 남편과 함께 3인 공동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고, 다시 금속 라듐의 분리로 1911년 단독 노벨 화학상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노벨상 두 차례 수상이라는 초유의 영예를 안게 되었는데도 우여곡절 끝의 표결에서 아카데미 입성은 좌절되고 만다. 당연히 여성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의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교수였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 보면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1906년 사망하고 나서야 남편이 갖고 있던 물리학 교수직을 이어받은 것이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09.2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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