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vs 박수근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1일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이태호 명지대학 교수(한국미술사)는 <감성과 오성 사이-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네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린 이 강좌는 한국 회화사의 거장들의 작품 세계를 통해 한국적 이미지와 창작이론을 살펴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정착
20세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박수근과 이중섭은 서양에서 유입된 새로운 미술을 한국화한 작가로 손꼽힌다. 이중섭은 감성의 표출로 자신을 강렬하게 드러낸 반면 박수근은 오성(悟性)을 통해 주변 삶을 따뜻하게 살핀 화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정착
20세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박수근과 이중섭은 서양에서 유입된 새로운 미술을 한국화한 작가로 손꼽힌다. 이중섭은 감성의 표출로 자신을 강렬하게 드러낸 반면 박수근은 오성(悟性)을 통해 주변 삶을 따뜻하게 살핀 화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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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Science Times |
1930년대 중반 조선 화단에도 입체파, 야수파, 표현주의, 추상미술 등 유럽의 20세기 초 모더니즘에 대한 정보가 유입됐다. 관학적 성격의 동경미술학교 집중 현상이 완화되고, 일본 유학이 다양한 대학으로 확대되면서 이루어졌다.
도쿄(東京) 전위그룹전 중 하나로 1937년에 결성된 자유미술가협회(1940년 미술창작가협회로 이름이 바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외에도 일본 내에서 형성된 초현실주의 풍을 수용한 1939년의 미술문화협회전(美術文化協會展), 아방가르드를 표방한 1936년의 백만회(白蠻會) 등에 참여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늘어났다.
서구 모더니즘 역시 식민지 시절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강화 시기에 수용됐다. 1930년대 후반 냉소와 절망, 허무 따위의 관념에 치우친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의 모더니즘은 자유주의 또는 순수형식주의 미학의 발흥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성과물을 내기보다 해방 후에 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20세기 우리 미술은 변동기의 가쁜 호흡이나 격정이 화면 속으로 진입하지는 못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온 순수주의 예술론의 덫에 피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렇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정치나 사회 현실이 그토록 후진성을 보인 반면,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와 같은 작가가 배출되었음은 분명 우리 20세기 미술의 자랑거리이다.
모더니즘에 심취한 이중섭
우리 미술사에서 20세기를 가장 심하게 앓은 작가는 대향(大鄕) 이중섭이다. 평남 평원의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정주 오산고등학교를 다니며 미국에 유학했던 임용련(任用璉) 부부의 지도를 받아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1935년 일본에 유학하여 제국미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이듬해 자유스런 창작의 학풍을 지닌 문화학원 미술과로 옮겼다. 그 곳에서 보통학교 동창인 김병기와 재회했고, 당시 선배로 문학수와 유영국이 다니고 있었다.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해 1938년에 협회상을 받았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유럽의 모더니즘 사조에 심취했고, 각별히 대담한 변형과 색감의 표현파나 야수파 화풍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경향은 1950년대 소 그림이나 닭 그림 등 유화 작품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나, 1950년 12월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듬해 초부터 제주도 서귀포에서 지내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잠시 자리를 잡는다. 이번 전시의 <게와 아이들 1955>처럼 아이들이 게나 물고기와 한데 어울려 노는 소재들은 서귀포 시절의 생활을 엿보게 해준다.
1952년에는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입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인 처가 아들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떠나면서 그림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가족과 헤어진 후 작업은 물론 끼니조차 챙기기 어려운 처지에서 이중섭이 반복해서 그린 테마가 바로 ‘가족’이다. 유난스런 가족애가 열정적인 예술혼을 뒤흔든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닭과 가족> 역시 가족연작 계열이다.
아버지와 세 아들이 암탉과 수탉, 병아리로 이루어진 닭의 가족들과 어울려 있다. 갈색과 흰색에 청회색을 짓뭉갠 듯한 굵은 터치와 거친 윤곽선이 수선스러운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왼편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는 암탉을 붙들고 기다리고 있다.
오른편의 아이는 수탉을 뒤집어 똥구멍에 입을 대고 잔뜩 바람을 넣어 흥분시키는 모습이다. 닭싸움을 시킬 요량으로 이중섭의 체험이 실린 그림이다. 위의 두 아이가 들고 있는 망태에는 네 마리 병아리가 담겨 있다.
또한 이중섭의 예술적 진면목은 소 그림에 있다.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흰소>가 가장 먼저 꼽힌다.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소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는데, 벌써 1930-40년대에 즐겨 그렸다. 원산의 들판에서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다 주인에 의해 고발당하기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도쿄(東京) 전위그룹전 중 하나로 1937년에 결성된 자유미술가협회(1940년 미술창작가협회로 이름이 바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외에도 일본 내에서 형성된 초현실주의 풍을 수용한 1939년의 미술문화협회전(美術文化協會展), 아방가르드를 표방한 1936년의 백만회(白蠻會) 등에 참여하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늘어났다.
서구 모더니즘 역시 식민지 시절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강화 시기에 수용됐다. 1930년대 후반 냉소와 절망, 허무 따위의 관념에 치우친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의 모더니즘은 자유주의 또는 순수형식주의 미학의 발흥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성과물을 내기보다 해방 후에 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20세기 우리 미술은 변동기의 가쁜 호흡이나 격정이 화면 속으로 진입하지는 못하고 말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온 순수주의 예술론의 덫에 피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렇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정치나 사회 현실이 그토록 후진성을 보인 반면,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와 같은 작가가 배출되었음은 분명 우리 20세기 미술의 자랑거리이다.
모더니즘에 심취한 이중섭
우리 미술사에서 20세기를 가장 심하게 앓은 작가는 대향(大鄕) 이중섭이다. 평남 평원의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정주 오산고등학교를 다니며 미국에 유학했던 임용련(任用璉) 부부의 지도를 받아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1935년 일본에 유학하여 제국미술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고, 이듬해 자유스런 창작의 학풍을 지닌 문화학원 미술과로 옮겼다. 그 곳에서 보통학교 동창인 김병기와 재회했고, 당시 선배로 문학수와 유영국이 다니고 있었다.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해 1938년에 협회상을 받았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유럽의 모더니즘 사조에 심취했고, 각별히 대담한 변형과 색감의 표현파나 야수파 화풍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경향은 1950년대 소 그림이나 닭 그림 등 유화 작품까지 이어졌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원산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나, 1950년 12월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듬해 초부터 제주도 서귀포에서 지내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잠시 자리를 잡는다. 이번 전시의 <게와 아이들 1955>처럼 아이들이 게나 물고기와 한데 어울려 노는 소재들은 서귀포 시절의 생활을 엿보게 해준다.
1952년에는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입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인 처가 아들들을 데리고 일본 친정으로 떠나면서 그림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가족과 헤어진 후 작업은 물론 끼니조차 챙기기 어려운 처지에서 이중섭이 반복해서 그린 테마가 바로 ‘가족’이다. 유난스런 가족애가 열정적인 예술혼을 뒤흔든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닭과 가족> 역시 가족연작 계열이다.
아버지와 세 아들이 암탉과 수탉, 병아리로 이루어진 닭의 가족들과 어울려 있다. 갈색과 흰색에 청회색을 짓뭉갠 듯한 굵은 터치와 거친 윤곽선이 수선스러운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왼편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는 암탉을 붙들고 기다리고 있다.
오른편의 아이는 수탉을 뒤집어 똥구멍에 입을 대고 잔뜩 바람을 넣어 흥분시키는 모습이다. 닭싸움을 시킬 요량으로 이중섭의 체험이 실린 그림이다. 위의 두 아이가 들고 있는 망태에는 네 마리 병아리가 담겨 있다.
또한 이중섭의 예술적 진면목은 소 그림에 있다.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흰소>가 가장 먼저 꼽힌다. 이중섭은 어려서부터 소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는데, 벌써 1930-40년대에 즐겨 그렸다. 원산의 들판에서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다 주인에 의해 고발당하기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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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는 이중섭의 그림에서 단골 메뉴다. 한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인 그는 소를 통해 인간의 열정과 소박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중섭은 어릴 때부터 고향인 원산에서 소를 관찰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홍익대 박물관 소장 |
주변 삶을 따뜻하게 보살핀 박수근
박수근은 그가 살아온 삶이나 작품세계에 있어 이중섭과 대조를 이룬다. 이중섭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경 유학을 통해 신사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 비해, 박수근은 가난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양구에서 겨우 소학교(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을 뿐 국내에서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한 토종화가인 셈이다.
그런 박수근의 이력이 오히려 보통의 민중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대하고, 그들의 순박한 심성을 아름답게 포용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집안 사정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밀레 같은 작가가 되겠다며 오로지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1930-40년대 조선미술전람회가 유일한 작품 활동의 통로였다. 초반에는 <봄이 오다 1932> 등 수채화로 출품을 시작해, 유화로도 입선했다.
<선전> 도록에 실린 출품작들을 보면, 농촌의 풍경과 여인들의 생활상을 담은 것이 대부분으로, 해방 후 박수근 작품의 모본(模本)이 됨을 알 수 있다. 이들 수채화나 유화는 아직 그리 뛰어난 수준으로 보이지 않으며, 비교적 굵은 붓의 대담한 표현이 두드러져 있다.
해방 후 박수근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고, 6․25전쟁의 혼란 속에서 장남에 이어 셋째 아들을 잃었다. 남하하여 군산을 거쳐 1952년부터 1954년까지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 그리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박수근은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로지 작업에만 매진했다.
특별히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박수근은 해방 후 ‘국전’ 출품을 통해 활동했는데, 도리어 그것이 큰 상처가 되었다. 1953년 제2회 ‘국전’부터 1956년까지 입상했다. 그러나 1957년 <세 여인>이 낙선되면서 우리 미술계의 편견에 따른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는 이를 음주로 달랬고, 결국 백내장과 간염으로 지병을 안고 살다 52세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박수근의 ‘국전’ 출품작들은 ‘선전’ 때와 마찬가지로 <우물가>, <노인>, <절구>, <노후>, <노상>, <나무>, <산>, <한일>, <노상의 소녀들>, <소와 유동(遊童)>, <할아버지와 손자> 등 일상 주변의 사람과 풍경을 담은 것들이다.
저작권자 2012.09.03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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