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0일 월요일

민족적 미술가, 김홍도

민족적 미술가, 김홍도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미술은 독특한 예술이다. 형상을 통해 우리에게 갖가지 의미를 부과한다. 현실적인 모습일 수도 있고, 추상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미술은 언어가 아니라 형상을 통해 우리들에게 온갖 이데올로기를 선사한다.

18일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이태호 명지대학 교수(한국미술사)는 <감성과 오성 사이-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두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단원 김홍도는 민족주의적인 화가
▲ 이태호 명지대학 교수 ⓒScience Times
우리나라 미술사를 대표하는 민족적 고전양식을 완성한 이를 찾는다면 단연 단원 김홍도다. 우리의 땅과 사람, 그리고 대지에서 자라던 식물이나 동물의 모습을 정확한 묘사력으로 아름답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겸재 정선에 이어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정조 시절에 주로 활동했고, 영조 말부터 순조 초까지 ‘國中의 화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 때문인지 서원(畵員) 출신이면서도 비교적 많은 문헌기록에서 김홍도의 이름이 확인된다.

김홍도를 키워낸 사회 또한 문화적 저력이 탄탄했다. 김홍도는 이른바 ‘제 때’를 만나 천부의 재능으로 예술적 금자탑을 쌓은 셈이다. 18세기 영, 정조대는 양란으로 인한 전후복구가 완비된 가운데 일시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보였다.

대외적으로는 폐쇄적이었으면서도 청나라와 같은 국제교류 속에서 서학(西學)이나 서교(西敎)같은 문물의 유입도 새로운 자극이었다. 농업과 상공업 발달에 따른 경제력 성장을 계기로, 부를 축적한 서민층과 중인(中人)계층이 새로운 교양인으로 부상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김홍도 같은 화가도 문인들과 교류의 폭이 넓어졌다. 역관으로 거부가 된 김한태(金漢泰)의 후원이 따르기도 했다.

김홍도와 수원(화성)의 인연은 정조대 최대 프로젝트인 ‘華城 건설’이라는 대역사의 추진과정에서도 확인된다. 김홍도는 <華城春秋八景圖>처럼 화성의 풍광을 그렸다. 동시기 화가 중 화성에 남긴 화적이 가장 많은 인물이 김홍도일 것이다.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활동
김홍도의 자는 사능(士能)이고, 호는 서호(西湖), 단원(檀園), 취화사(醉畵士), 단구(丹邱) 등이다. 본관은 김해로 알려져 있다. 김홍도가 도화서(圖畵署,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전담하는 관청)에 들어간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0대 후반쯤 학생으로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불시에 김홍도를 호출하곤 했다. 그래서 ‘제 집에 있는 날보다 궁 안에 있을 적이 많았다’고 한다. 김홍도는 소년기와 청년기를 거치면서 정조를 만난 행운을 밑거름으로, 비교적 탄탄대로 위에서 자신의 재능을 쏟아낸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김홍도가 동시대에 활동했던 동료 혹은 선후배 화원 화가들 모두 일가를 이루었다. 1788년 금강산 사경에 동행했던 김응환, 초상화로 이름난 변상벽(卞相璧)이나 신한평(申漢枰) 등의 선배화가가 있는가 하면, 동갑내기 동료화원 이인문(李寅文)이나 어진과 초상화를 합작했던 이명기(李命基)가 그들이다. 이들 속에서 특히 김홍도의 화풍은 18세기 후반 화단은 물론 19세기 이후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고, 확고한 위상을 다졌다. 그만큼 김홍도는 후배화원들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미술사에 남긴 업적
조선후기, 영·정조 연간은 미술뿐 아니라 역사·지리 등 국학과 실학, 애정소설·사설시조 등의 문학, 서예, 판소리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풍과 독창성이 두드러졌던 때이다. 그 중 회화 분야를 선도했던 인물은 정선과 김홍도이다.

정선이 18세기 전반 영조대의 대표 주자였다면, 김홍도는 18세기 후반 정조대를 평정한 화가였다. 김홍도는 딱히 어느 한 가지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그림 영역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초상화와 기록화, 장식화 같은 실용화는 물론이고 사대부 민간의 요청에 따른 각종 감상화까지 두루 섭렵하며 신묘한 경지에 도달한 대가였다.

고금의 화가가 각기 한 가지 능력을 떨쳤지 두루 솜씨를 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배워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과 불교그림, 꽃과 과실나무,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의 그림이 모두 신묘할 정도에 이르렀다. 거의 대항할 이가 없었다.
▲ 단원 김홍도의 작품에는 경계가 없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모든 것이 그의 작품이었다. 사진은 남해 관음.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가 다양한 제재를 다루면서도 각 부문의 발전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산수화의 경우, 초기에는 중국에서 유입된 화보(畵譜)를 참조하여 그린 정형산수(定型山水)가 대부분이었다.

김홍도는 18세기 전반 정선에 의해 정형화된 진경산수 화법을 계승하면서 18세기 후반의 신풍(新風)을 가미하여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정선과 마찬가지로 금강산과 관동지역, 단양 일대의 명승지를 그리는 한편 시야를 더욱 확장하여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와 같은 평이한 경관까지 화면 속으로 끌어들였다.

또 과장과 변형을 통해 현장의 감동을 회화적으로 승화시킨 정선과 달리, 김홍도는 시각적 사실성에 근사한 구도와 화법을 적용함으로써 대상 재현에 충실을 기하고자 했다. 이전 시대에 비해 널리 확산된 서양화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김홍도는 정선에 비해 치밀한 묘사를 추구하면서도 1795년 작 을유년화첩(乙卯年畵帖)이나 1796년 작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서 볼 수 있듯이 필묵의 농담과 강약을 자유자재로 변주할 수 있는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였다.

김홍도는 널리 알려진 대로 풍속화의 예술성을 높였다. 그리고 조선 사람의 인물표현의 고전적 전형을 완성시킨 장본인이다. 정조 시절 풍속화는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른 중산계층의 부상을 기반으로 수요가 증대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과 같은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비스듬하면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인물의 자세와 동작을 정리한 원형과 사선 구도의 여유로움이 담겨 있다.

성별, 계층, 연령, 직업에 걸맞도록 복식과 자세, 표정 등을 밀도 있게 포착해 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세속의 모습을 옮겨 그리기를 잘했는데, 한번 그리기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외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경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적 자취는 김홍도가 조선후기, 곧 전근대 시기의 전인적 예술가이자 교양인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타고난 천재성도 남달랐지만, 자신의 여건에 맞는 시대를 만나 맘껏 기량을 뽐낼 수 있었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08.2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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