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3일 월요일

겸재 정선 vs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vs 단원 김홍도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인문학의 대중화와 진흥을 목적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여섯 번째 강좌가 11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이태호 명지대학 교수(한국미술사)는 <감성과 오성 사이 – 한국 미술사의 라이벌)>라는 주제로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라는 내용을 갖고 첫 강의를 시작했다.
▲ 이태호 명지대학 회화과 교수 ⓒScience Times


이 강좌는 한국 회화의 역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쏟아낸 작품세계를 감상하며, 한국미술의 예술적 성과를 만나보는 시간이다.

조선후기~근대 18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에 서로 대비되는 서로 다른 성향의 작가를 감성과 오성으로 대비시켜보며, 그들이 창조한 조형미, 예술론, 개성 등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여덟 작가를 각 시대의 라이벌로
이태호 교수는 겸재• 추사•소정•이중섭은 감성적인 화가로, 이에 반해 단원•다산•청전•박수근은 오성적인 화가로 구분했다. 여덟 작가를 각 시대의 라이벌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맞수보다 쌍벽의 개념으로 설정해본 것이다.

겸재와 단원은 각각 영조와 정조 시기 조선적 문예부흥의 중심에 섰던 화가이다. 겸재는 대상을 과장하며 마음에 기억된 조선 땅을 그렸던 데 비해, 단원은 실경사생(實景寫生)을 통해 대상을 닮게 묘사했다.

겸재는 가슴에 품은 이상에서, 단원은 눈앞의 현실에서 진경산수(眞景山水)를 모색한 셈이다. 이는 영조에서 정조 시절로 문화지형의 변화이기도 하고, 두 작가가 한국산수화의 고전적 전형을 완성하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화가들은 조선의 아름다운 산하, 곧 우리나라의 명승(名勝)을 즐겨 화폭에 담았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일컫는다. 말 그대로 실재하는 풍경을 그렸기에 붙여진 명칭이자, 한국회화사에서 커다란 업적으로 주목 받는 영역이다.

조선의 화가가 조선 땅을 그리는 것은 당연하나 일이다. 그러나 진경산수화는 그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 이유는 중국 송(宋)-명(明) 시기의 산수화풍을 기리던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 땅에 대한 현실미를 찾은 때문이다. 이러한 회화경향은 풍속화나 초상화 등의 인물화와 마찬가지로 조선적인 것과 당대 현실을 중요시했던 후기의 새로운 문예사조와 함께 한다.

조선의 문인과 화가들이 자신들이 사는 땅에 애정을 실어 실경(實景)을 그린 시점은 조선시대를 전ㆍ후기로 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17세기 중반은 전란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시기였으며,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에 따른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대륙이 만주족인 청의 지배 아래 놓이자 숭명(崇明) 의식이 강했던 조선의 문인들에게 충격이었다. 청과 맞서 싸우려는 북벌론이 제기될 정도였다. 조선 사회는 성리학(性理學)의 학통을 고수하려 했다. 이런 이념을 강력하게 표방하며 조선 후기를 집권했던 세력이 서인(西人)ㆍ노론(老論)이였다.

그 핵심 인사들과 절친하던 숙종ㆍ영조시절의 진경작가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다. 겸재는 17세기 실경도와 산수화의 전통을 이었으면서도, 그와 완연히 다르게 자신의 진경산수화풍을 완성했다. 중국화풍이 정착된 〈몽유도원도〉 이후 근 30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 정선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 여름 소나기가 내린 후 북한산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인왕산을 그린 것이다. 국보제216호. 리움미술관 소장

진경산수화와 더불어 조선 후기 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지도제작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땅의 아름다움을 예술적으로 접근했던 동시기에 땅의 행정, 경제, 정치성을 담은 지도의 과학화가 진행된 사실은 조선 후기 문화를 융성하게 한 저력이라 여겨진다.

겸재 진경산수화풍을 따른 회화식 지도의 발달은 물론이려니와, 윤두서 이후 정상기(鄭尙驥), 신경준(申景濬), 정철조(鄭喆祚), 김정호(金正浩) 등의 전국지도나 도별지도 역시 지리정보 외에도 시각적 아름다움을 지닌 회화성을 구가한다.

정선,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의 회화양식을 창출
18세기 영조~정조시절의 진경산수화는 물론 앞 시기에 이어 산수화의 개념과 형식에서 중국 산수화와 공유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이상향인 도원(桃源)을 꿈꾸던 개국 문인관료들의 후예가 그 아름다움을 조선 땅에서 찾았다는 점, 그리고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에 걸 맞는 회화양식을 창출했다는 점은 분명 새로운 업적이다.

이러한 진경산수화의 예술적 성과는 겸재에게 집중된다. 조선의 아름다운 강산을 그리는 일이 겸재에 의해 촉발되고 시대사조로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겸재는 자신의 생활터전이었던 인왕산, 백악, 남산 등 도성(都城)의 경치, 지방관으로 근무하며 만났던 영남지방과 한강의 풍광, 그리고 기행 탐승했던 조선의 절경 금강산 등을 예술적 대상으로 삼았다. 후배화가들도 겸재에 공감하고 이러한 소재들을 즐겨 선택하면서 우리 진경산수화의 주요 명소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겸재는 문인관료 출신으로 화가의 이력이 독특하다. 마흔부터 여든 살까지 주로 종6품 직을 지냈다. 그가 평생 하급관료에 머문 것은 과거를 거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조선시대 대부분 관료들의 평균수준일 것이다. 만년 하급직에 있던 그가 화가로 등단하고 출세했다는 게 별나다. 또한 관직 이전에도 화가로서 훈련한 흔적이 없으며 작품도 드문 편이다. 이점도 미스터리다.
▲ 조선 말기에 이르러 미술의 사조는 사실주의 화풍으로 흘러갔다. 김홍도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였다. 그림은 그의 대표작 무동(舞童).보물 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 김홍도,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조선 후기 회화는 전반적으로 사실주의의 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 북인(北人)이면서 시인, 비평가, 화론가, 문인화가로, 화단의 총수로 꼽혔던 표암 강세황은 ‘산천을 초상화처럼 꼭 닮게 그려야 산천의 신령(神靈)도 좋아할 것’이라며 ‘금강산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실제 산에 든 느낌을 갖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표암 아래서 화가로 성장한 이가 바로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이다. 단원에 대하여 표암도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정도로 잘 그려 예전에는 이런 솜씨가 없었다”며 “천부적 소질과 명석한 머리를 지니고 있다”고 칭찬했다.

사실 이 평가에 손색없을 정도로 그는 단원은 우리 전통회화의 고전적 전형(典型)으로 삼을 만큼 탁월한 사실적 명작들을 남겼다. 단원의 진경화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대상의 실제를 닮게 인식하는 ‘진경(眞景)’의 의미로 근대성에 접근해 있다.

여기에 단원의 부드럽고 연한 담묵담채와 분방한 필치는 실경의 분위기를 잘 살려낸다. 마치 유럽의 19세기 인상주의를 연상케 할 정도이다. 우리 19세기 회화가 단원화풍을 한 단계 발전시켰더라면 하는 가정을 떠오르게 할 만큼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단원 이후에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로 대표되듯이, 망막에 어리는 대상보다 심상(心象)을 표출해야 한다는 서권기(書卷氣)ㆍ문자향(文字香)의 남종문인화풍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사회의 몰락기의 문예현상이기도 하며, 18세기의 현실적인 미적 감각이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한 풍토에서 나온 결과로 여겨진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08.13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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