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BEST SF작가 10인, 배명훈(5)
몇가지 아쉬움, 그리고 큰 기대
한국SF를 찾아서 지금까지 배명훈의 작품 경향을 개략적으로 둘러보았다. 하지만 향후 작가가 나아갈 좌표에 대해 일말의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후속작 <안녕, 인공존재!>는 첫 단행본 선집 <타워>에 비하면 풍자와 해학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안녕, 인공존재!>에 실린 단편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과학소설 종래의 전통적 주제들인 ‘최초의 접촉’(<누군가를 만났어>)과 ‘세상의 종말’(<매뉴얼>), 로봇(<변신합체 리바이어던>), 평행우주(<엄마의 설명력>) 그리고 A.I.와 미니블랙홀(<안녕, 인공존재!>) 등을 배경 스크린으로 깔면서 카메라 앞에 바짝 다가선 개인들의 사랑과 실연, 갈등, 소외, 번민에 초점을 맞춘다.
함께 수록된 단편 <크레인 크레인; 2009년>은 데우스마키나적인 엔딩 탓에 과학소설로 분류하기 어려워 이 글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이 단편은 소설이라기보다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대형 기중기를 동네 수호신으로 믿고 그 운전기사를 무녀로 인식하는 고립된 세계를 무대로 한 이야기다.
이 중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간 작품을 꼽자면 <안녕, 인공존재!>와 <엄마의 설명력> 두 편이 있다. 전자는 실연당한 아픔에 자살하기에 앞서 미니블랙홀로 지구까지 삼켜버릴 수 있는 신발명품을 남자에게 전달한 여인의 복수극으로, 전형적인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다 SF적인 해법을 접목한 듯한 퓨전양식이 이채롭다. 미니블랙홀로 그것이 놓인 행성까지 삼켜버리는 설정은 2009년 할리웃 영화 <스타트랙, 더 비기닝>에서도 중요한 복선으로 쓰인 바 있지만, 배명훈은 그것을 아주 개인적인 복수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후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를 무대로 한 이야기처럼 전개하다 마지막에 가서 여주인공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가 실은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론이 통용되는 또 다른 평행우주임을 드러냄으로서 독자의 허를 찌른다. 특히 후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딸의 마음을 위로했다는 혐의를 받는 천문학자 엄마의 말이 상당부분 진실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한 마디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메타물리학 텍스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선집 <안녕, 인공존재!>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과학소설 장르 본연의 관심사(우주 속에서 인류의 위상에 관한 다층적 의미)에 대해 그다지 치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사회에 대한 신랄한 해부를 시도하고 있지도 않다. <타워> 연작에서 공명할 수 있었던, 해학적인 동시에 포용력 있는 배명훈의 시선은 <안녕, 인공존재!>에서도 여전하지만 뭔가 톡 쏘는 맛이 살짝 무뎌진 느낌이다.
솔직히 후속작 <안녕, 인공존재!>는 첫 단행본 선집 <타워>에 비하면 풍자와 해학이 많이 약화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안녕, 인공존재!>에 실린 단편들은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과학소설 종래의 전통적 주제들인 ‘최초의 접촉’(<누군가를 만났어>)과 ‘세상의 종말’(<매뉴얼>), 로봇(<변신합체 리바이어던>), 평행우주(<엄마의 설명력>) 그리고 A.I.와 미니블랙홀(<안녕, 인공존재!>) 등을 배경 스크린으로 깔면서 카메라 앞에 바짝 다가선 개인들의 사랑과 실연, 갈등, 소외, 번민에 초점을 맞춘다.
함께 수록된 단편 <크레인 크레인; 2009년>은 데우스마키나적인 엔딩 탓에 과학소설로 분류하기 어려워 이 글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이 단편은 소설이라기보다 우화에 가까운 작품으로, 대형 기중기를 동네 수호신으로 믿고 그 운전기사를 무녀로 인식하는 고립된 세계를 무대로 한 이야기다.
이 중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간 작품을 꼽자면 <안녕, 인공존재!>와 <엄마의 설명력> 두 편이 있다. 전자는 실연당한 아픔에 자살하기에 앞서 미니블랙홀로 지구까지 삼켜버릴 수 있는 신발명품을 남자에게 전달한 여인의 복수극으로, 전형적인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에다 SF적인 해법을 접목한 듯한 퓨전양식이 이채롭다. 미니블랙홀로 그것이 놓인 행성까지 삼켜버리는 설정은 2009년 할리웃 영화 <스타트랙, 더 비기닝>에서도 중요한 복선으로 쓰인 바 있지만, 배명훈은 그것을 아주 개인적인 복수에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후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우주를 무대로 한 이야기처럼 전개하다 마지막에 가서 여주인공이 발을 딛고 있는 세계가 실은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론이 통용되는 또 다른 평행우주임을 드러냄으로서 독자의 허를 찌른다. 특히 후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딸의 마음을 위로했다는 혐의를 받는 천문학자 엄마의 말이 상당부분 진실이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 한 마디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혼란스럽게 만드는 메타물리학 텍스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선집 <안녕, 인공존재!>에 수록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과학소설 장르 본연의 관심사(우주 속에서 인류의 위상에 관한 다층적 의미)에 대해 그다지 치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사회에 대한 신랄한 해부를 시도하고 있지도 않다. <타워> 연작에서 공명할 수 있었던, 해학적인 동시에 포용력 있는 배명훈의 시선은 <안녕, 인공존재!>에서도 여전하지만 뭔가 톡 쏘는 맛이 살짝 무뎌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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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에 실린 배명훈의 단편 [안녕 인공존재], 문예지에 장르작가 작품을 싣는 드물다. ⓒ문학동네 |
최근작 <신의 궤도>에서도 이러한 아쉬움이 말끔히 가신 것은 아니다. 이 장편은 양질의 해외 과학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다채로운 범주와 관습적 틀을 교묘하게 비트는 솜씨를 보여주었지만 과학소설의 본질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계속 확장되고 있는 이 장르문학의 변경에 대한 야심 찬 도전장을 내밀기에는 다소 힘이 부친다.
이를테면 <신의 궤도>에서 가장 주요한 복선 중 하나가 여기에 해당한다. 남녀 주인공 나물과 김은경이 나니예 행성 상공을 공전하는 이른바 ‘신’에게 찾아간 까닭이 자발적인 탐구심의 발로가 아니라 사전에 유전공학적으로 프로그램된 결과라는 설정 말이다. 여기서 김은경은 신을 깨우기 위한 일종의 각성장치라고 풀이된다.
사실 이러한 설정의 기원은 아서 C. 클락의 <도시와 별들 The City and the Stars; 1956년>의 주인공 앨빈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은경과 나물이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궤도 상공의 신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지하도시 다이아스퍼에서 탈출한 앨빈이 어떻게 해서든 지상에 올라가려는 집착에 비견된다. 자신의 행동이 자발적인 동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된 결과임을 깨닫는 플롯은 과학소설에서 그리 드물지 않다. 심지어 이런 설정은 데이빗 비숍(David Bischoff)의 <우주사냥개 Star Hounds; 1985~1986년> 시리즈 같은 B급 SF에서도 주요한 복선으로 응용된다.
인류문명이 육신을 벗어나거나 항성에 거주한다는 가정도 아서 C. 클락(Arthur C. Clarke)의 <2001년 우주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68년>와 올라프 스태플든(Olaf Stapledon)의 <별의 창조자 Star Maker; 1937년> 같은 고전들이 아마 유용한 자양분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이왕 이러한 소재를 다루고자 했다면 피상적인 언급 대신 아예 좀 더 과감한 사고실험을 할 수는 없었을까? 로벗 L. 포워드(Robert L. Forward)가 <용의 알 Dragon's Egg; 1980년>에서 이른바 ‘칠라(Cheela)’라 명명된 지적인 종족이 중성자별 표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럴듯하게 창조했듯이, 항성 표면에서 살아가는 차세대 인류의 생태계에 대한 배명훈식 해석을 들어볼 수는 없었을까?
<신의 궤도>에서는 추상적으로만 간략히 언급된, 항성들 표면에 거주하는 차세대 인류들이 각성시킨 ‘신’의 반격으로 대몰살 당한다는 플롯이 선뜻 머리 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또한 <신의 궤도>에서 들짐승처럼 방목되는 이른바 ‘유목비행기’들의 행태는 아이언 M. 뱅크스의 <컬쳐 The Culture> 시리즈에서 주요 캐릭터로 등장하는 '유기체처럼 살갑게 구는 인공지능 우주선들'과 많이 닮아 있다. 비행기와 우주선이란 외양과 활동공간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말이다.
우주선의 서브 인공지능이 임의로 냉동된 인간들을 목적지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미리 깨우는 바람에 이들이 부족한 식량 때문에 살육전을 벌이는 이야기는 <2001년 우주 오디세이>에서 목성행 우주선의 총괄제어 컴퓨터 HAL이 인간을 살해하는 시퀀스의 또 다른 변종임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끝으로 인류가 나니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신’을 떠받드는 종교집단이 자생하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도 너무 인색하다. 이미 기득권 세력화된 종교권력이 나물 수사를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처럼 침묵하는 허수아비 과학자로 만들려는 노력에 대해서는 작가가 상세한 묘사를 아끼지 않지만, 정작 이 집단의 기원이 어떻기에 불과 2백여 년 사이에 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 축의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감을 잡기 어렵다.
예컨대 남반부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는 비행 유목민 세력의 경우에는 수백만 명이 넘는 행성의 관리사무소 인력 가운데 자의반 타의반 밀려난 사람들이 그 시발점이다. 이러한 정황은 소설을 읽어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반면 종교인들은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 자생하게 되었는지 설명이 없다. 어차피 기성 기독교와는 무관한 행성 상공의 특정 천체를 주님으로 모시는 신흥종교라면 그에 걸맞는 시원(始原)을 짧게나마 삽입해주었어야 이후 전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뿐 아니다. 이 소설에는 성직자들만 잔뜩 나올 뿐 이들에게 시주하고 십일조를 바칠 신자들에 대한 묘사가 태부족이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물이 없는 곳에서 어찌 물고기가 살겠는가?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신학적 갈등이 나물로 대표되는 관측신학회와 문주교를 중심으로 한 이론신학회 간의 권력투쟁으로 변질되는 과정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정작 이들이 어떤 사회에 발을 딛고 있는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재정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적으로 지지해줄 일반신도 대중의 존재가 없다면 수백만에 이르는 행성 관리사무소의 관료체제에 맞서 한줌에 불과한 성직자 계급이 어찌 권력을 탐할 수 있을까? 중요한 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이 비단 성직자들 커뮤니티에 그치지 않고 정치사회 전반에 허리케인을 몰고 온 예가 인류 역사에서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솔직히 이러한 비판의 근저에는 작가 배명훈에 대한 기대가 중첩되어 있다. 그는 이제까지 배출된 우리나라의 과학소설 작가 가운데 가장 대중성이 높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렇다면 이제 비단 해외의 A급 과학소설 작가들에 못지않은 장르적 이해를 작품 속에 담아내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블러드 뮤직 Blood Music; 1983년>이나 <뉴로맨서 Neuromancer; 1984년>처럼 과학소설 하위 장르의 한 획을 긋거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창작물을 그에게서 기대하는 것이 너무 성급한 마음일까?
거기에다 일찍이 <타워>에서 보여준 바 있는, 시대정신을 녹여내는 해학까지 곁들여달라면 무리한 주문일까? 배명훈은 아직 젊고 싱싱하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영역에서 자신을 실험하고 담금질할 것이다. 따라서 작가 배명훈의 진화는 우리나라 과학소설의 진화와 결코 유리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시장이 작아도 떠나지 않고 과학소설 장르에 머무는 그의 열정이 언젠가 반드시 보답 받는 그날까지 말이다.
| ■ 주요 작품 <타워; 2009년> <안녕, 인공존재!; 2010년> <신의 궤도; 2011년> <은닉; 2012년> |
저작권자 2012.08.01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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