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전략
다비드 ‘나폴레옹 1세 대관식’
나폴레옹은 1804년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프랑스 황제가 됐고, 노트르담 성당에서 나폴레옹 1세라는 이름으로 즉위식을 거행했다.
나폴레옹은 일찍이 정치적 이미지를 만들고 선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고, 즉위식을 정치적 선전에 이용하기 위해 다비드에게 작품을 의뢰한다.
나폴레옹은 일찍이 정치적 이미지를 만들고 선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고, 즉위식을 정치적 선전에 이용하기 위해 다비드에게 작품을 의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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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1806-1807년, 캔버스에 유채, 621*979, 파리 루브르 박물관 |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이 거행되고 있다. 성직자, 성가대 그리고 하객들로 인해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노트르담 성당의 특징은 엿볼 수 없지만, 화면 오른쪽 니콜라스 쿠스루의 조각과 피에타 때문에 작품 속 장소가 노트르담 성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대관식은 랑스 대성당에서 거행됐으나, 나폴레옹이 전통을 무시하고 노트르담 성당에서 행했던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1799년, 150여 명의 학자들을 이끌고 이집트 원정에 나서 로제타석을 발견하는 문화적 쾌거를 이룩했지만 군사상으로는 실패해 혼자 이집트를 탈출해야만 했다.
파리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1799년 군대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이 된다. 프랑스 최고 통치자가 된 나폴레옹은 임기를 종신으로까지 연장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국민투표를 거쳐 황제에 오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약점은 정통적인 왕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조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샤를마뉴 대제를 잇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관식에 샤를마뉴 대제가 쓰던 보홀과 왕관, 칼 그리고 의자를 등장시킨다. 이 작품에서는 오른쪽 남자들이 들고 서 있다.
나폴레옹이 샤를마뉴가 쓰던 물건을 등장시킨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이 로마 제국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나폴레옹은 황권이 교황권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이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로마 교황 피우스 7세를 파리에 오도록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나폴레옹 뒤 의자에 앉아 있는 인물이 교황 피우스 7세다.
교황은 전례에 따라 의식을 행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주문에 맞춰 절차를 이행했다. 나폴레옹의 머리에 있는 황금 월계관은 교황이 씌워준 것이 아니다. 그는 월계관을 직접 씀으로서 독립된 왕권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는데, 샤를마뉴 대제가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대관을 받아 황제의 교황권 예속 여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교황이 오른손을 들고 있는 것은 대관식을 허락한다는 의미다. 처음에 다비드는 교황이 무릎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을 그렸지만 후에 교황의 손짓을 그려 넣으라는 나폴레옹의 뜻에 따라 수정됐다. 나폴레옹이 교황의 손짓에 의미를 뒀던 이유는 손짓이 교황의 동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화면 중앙 계단 위에서 나폴레옹은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 두 팔을 벌려 왕관을 잡고 있다. 나폴레옹과 조세핀이 입고 있는 자주색 가운은 고대부터 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제단 중앙에 앉아 있는 여인이 황제의 어머니 레티시아 황후다. 그녀는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실제 대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화려하게 치장한 가족들을 등장시킨 것은 선전용으로 제작한 이 작품에서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대중들은 황후의 참석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는 실제 키가 작았던 나폴레옹의 키가 커보이도록 앉아 있는 사람과 계단 아래 서 있는 사람 중간에 배치했다. 나폴레옹이 계단 위에 서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을 굽어보는 형태로 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이 황제의 지위에 오르자 제1화가로 임명돼 이 작품을 2년 만에 완성했다.
저작권자 2012.08.10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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