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5일 목요일

정상과학은 창조의 기반이다

정상과학은 창조의 기반이다

과학명저 읽기 (4)

 
 
과학명저 읽기
자연과학이 사회과학 분야와 구별되는 특징을 하나만 들어보라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자연과학의 지식은 축적되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 인류의 역사를 거치며 점차 진보해 왔으며 또 앞으로도 그런 방식으로 진보되어 갈 것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하버드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코넌트 총장을 도와 학부학생들을 가르칠 과학사 교과목을 개발하는 작업을 시작 했을 때, 자연과학자로서 토머스 쿤이 지녔던 과학관이 그런 것이었다.

이는 그 대학의 중앙도서관 내의 크지 않은 방에서 작업하며 과학사 학회지를 출판하면서 학회를 만든 과학사 분야의 시조로 여겨지던, 화학자 조지 사튼의 과학관이기도 했다. 사튼은 과학이란 인류의 문화 활동 중 유일하게 역사를 거치며 점차 진보해 온 실증적 지식체계이며, 따라서 인류의 미래에 어떤 희망이 있다면 바로 과학의 미래로부터 그 희망을 볼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과학사 강의록을 만들어 가면서 쿤은 과학 이론들이 관찰과 경험이 점차 쌓여가는 방식으로만 진보해 온 듯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 물질관, 운동관은 크게 변화되지 않은 채 이천 년 이상 유지되어 왔다. 지상의 물질이 흙, 물, 공기, 불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정이 오랜 기간 공리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천상계가 그 네 가지 물질이 아닌 제 5원소로 이루어졌으며, 그 제 5원소는 지상계의 원소들과는 달리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그 겉보기 운동을 원운동들의 결합으로 표현해야한다는 집착은 천문학 혁명을 시작한 코페르니쿠스까지도 버리지 않은 신념이었다.

자유낙하 하는 물체가 그 무게에 비례하는 속도로 떨어진다는 표현은 간단한 직관으로도 이상하지 않은가? 무게가 백배인 물체가 백배의 속도로 떨어질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천년간 지속되어 온 옛 이론은 현대의 ‘과학’과는 다른 ‘신화’라고 불러야 할까? 하지만 또 한 편, 현대의 과학이론 역시 때로는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곤 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들로 고민하던 쿤은 어느 날 불현듯, 처음에는 그렇게도 이상해 보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 물질관, 우주관이, 이천 여 년 간 많은 학자들이 풀어내고자했던 문제들, 지키고 싶어 했던 신념들, 그리고 이용할 수 있었던 개념적 도구들의 범위 내에서는 매우 질서 정연한 지식체계였다는 깨달음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풀어내고자 하는 문제가 있고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으며 이용할 수 있는 일군의 개념적 도구가 있어서 그 범위 속에서 활동하기로 말하면, 현대의 과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쿤이 사회과학자나 심리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특히 행동과학 연구자들과 함께 생활하는 기회를 가지면서 좀 더 구체적인 형태로 굳어져갔다. 사회과학자들은 흔히 자신들의 연구가 어떤 철학 또는 어떤 방법론에 기반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철학 또는 방법론이 옳은 것인지 또는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이들 사이에서 일상 발견되곤 한다. 이와 달리, 자연과학자들이 자신의 방법론이나 이론적 전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일은 거의 없다.

과학자로서 자신의 교육과 활동을 돌이켜보면서, 쿤은 자연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질문이 과학적인 질문이며 어떤 방법이 과학적인 방법인지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공감대는 과학이 교육되는 방식이나 교과서가 기술되는 방식에 따라 형성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어떤 활동이 과학인지를 주로 교과서에서 제시되는 예제를 풀어 보면서 익히게 된다. 교과서의 예제풀이는 이미 존재하는 정답을 찾아가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퍼즐풀이와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과학적 훈련이란 독단적인 이론적 틀에 자연현상을 끼워 맞추는 훈련인 셈이다.

이런 독단적 훈련은 창조적인 사고를 차단하고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게 아닐까? 쿤은 그렇지만은 않다고 답한다. 독단적 훈련체계를 갖춘 성숙한 과학, 즉 패러다임을 갖춘 정상과학 내에서 활동함으로써, 과학자는 이전의 과학 활동의 결과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좀 더 정밀하고 유용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게 된다. 사실 성숙한 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대개 새롭고 창의적인 이론을 찾는 활동에 몰두하기보다는 이미 잘 정립된 이론 틀 내에서 좀 더 정밀한 상수를 계측한다든지, 그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새로운 현상을 찾아내는 일을 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게 된다.

과학철학자들은 이렇게 이미 잘 정립된 이론을 정교하게 만드는 작업이 매우 지루하고 또 더 이상 진전의 전망이 없는 작업일 것으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해 본 과학자로서 쿤은 패러다임 내에서 이루어지는 정상과학 활동에 과학자들이 매혹되어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창조적이고 새로운 과학이론은 바로 그런 일상적인 정상과학 활동 속에서 배태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와 인간이 만든 부호로 이루어진 모든 과학이론에는 다소간의 자의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정상과학이든 결국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부딪치는 위기가 닥치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 이론이 등장하게 된다. 일군의 과학자 그룹이 이 새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이론의 혁명적 변화가 시작되는 셈인데, 이 새 이론이 언제나 모든 자연현상을 옛 이론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역사 속에서 이런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쿤은 오랜 기간의 정상과학 시기를 거친 후, 짧은 기간의 위기와 혁명기를 겪으며 새로운 과학이론이 수용되는 모습들을 그려 보여줄 수 있었다. 그 수용과정에서는 논리와 경험뿐 아니라 과학자들의 신념이나 도구 등 과학 외적인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쿤은 과학의 역사와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과학철학자들이 그려온 과학의 이미지와는 다른 과학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쿤이 그려 낸 과학의 이미지는 과학도들의 사기를 꺾을 수 있는 위험한 이미지라는 비판도 있었다.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꼿꼿이 자연탐구에 매진하는 영웅적인 과학자의 활동을 통해 진보해 온 과학의 이미지 대신, 철학적 믿음과 심리적 상태 그리고 당면과제에 따라 이론을 선택하는 왜소하고 편협해 보이는 과학자 그룹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바라보는 현대의 과학학 학자들은 자신들이 ‘쿤 이후의 감성’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쿤은, 많은 현대의 학자들과는 달리, 계급이나 젠더 또는 경제나 정치와 같은 과학 외적인 요소가 혁명기 과학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과학이론 자체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학 학자들은 쿤이 지나치게 과학이론의 단절적 변화상을 강조했으며, 그의 단속적 과학이론의 변화관이 혁명적 변화를 열망하던 1960년대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과장된 방식으로 해석되면서 수용되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내고 또 유지시켜 온 문화 또는 제도로서의 과학을 바라보는 현대인으로서, 과학자들의 실천 속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또 변화하는 실제 과학의 이미지를 그려 내야한다고 생각한 쿤의 통찰은, 이제 21세기에 들어서서 ‘쿤 이후의 감성’을 표방하는 과학학의 성숙과 함께 그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토머스 S. 쿤/ 김명자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999/1996

김기윤 (한림대학교 사학과)

저작권자 2013.04.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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