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6일 토요일

‘안전한' 구제역 백신 등장한다

‘안전한' 구제역 백신 등장한다

유전체 아닌 단백질껍질로 제조

 
 
 
바이러스성 가축전염병 ‘구제역’을 퇴치할 새로운 백신이 개발되었다. 기존에는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백신을 만들어 누군가 백신을 탈취해 배양하면 오히려 질병이 널리 퍼질 위험이 있었다.
▲ 구제역에 걸린 가축은 입과 발굽 주위에 물집이 생기며 과도하게 침을 흘리는 증상을 보이다가 사망에 이른다. ⓒWikipedia
영국의 4개 대학과 연구소는 바이러스를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껍질만으로도 면역을 유발시키는 새로운 방식의 구제역 백신을 개발했다.

실제 바이러스를 사용하지 않아 유출 위험이 없으며 냉동보관 장치도 필요가 없다. 선진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온열대 국가들에게도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연구결과는 미국 공공과학도서관이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플러스 병원체(PLoS Pathgens)’ 최근호에 게재되었다. 논문의 제목은 ‘안전하고 효과 높은 백신 항원 개발을 위한 피코르나바이러스 캡시드 재조합 공정(Rational Engineering of Recombinant Picornavirus Capsids to Produce Safe, Protective Vaccine Antigen)’이다.

일단 발생하면 빠르게 퍼지는 A급 전염병
구제역은 소, 돼지, 양, 사슴 등 발굽이 2개로 갈라진 우제류에게 발생하는 바이러스성 가축전염병이다. 입과 발굽에 수포가 생긴다 해서 ‘구제역(口蹄疫, foot-and-mouth diseas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식욕 부진과 근육기능 저하 현상을 보이다가 목숨을 잃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구제역은 1514년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 산맥의 기슭에서 처음 등장했다. 수백 년째 원인을 모르다가 1897년에서야 독일 코흐연구소에서 바이러스성 질환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834년에는 인간에게 전염된 사례가 발견되어 인수공통전염병으로 불렸지만 최근 의학계는 “사람에게 전염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우리나라는 1908년 평안도 지역에서 처음 발병한 이래 최근까지도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 지난 2000년과 2002년에 발생한 이후 2010년과 2011년에도 발생해 수조 원의 피해를 입혔다. 특히 돼지는 전체의 3분의 1이 줄어드는 등 전국적으로 30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이 살처분되었다.

구제역은 전염 범위가 반경 250km에 달해 일단 발생하면 막아내기가 어렵다. 특히 감염 후 하루도 되지 않아 증세가 나타나는 등 빠른 속도로 번져나갈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수역사무국(OIE)은 구제역을 가장 위험한 등급인 A급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지정하고 있다.

아직까지 구제역을 치료할 방법은 없지만 백신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제조비용이 높고 보관이 어려워 수급에 차질을 빚는 실정이다.

구제역 백신은 대부분의 백신 제조과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철저히 격리된 대형 생물반응장치를 이용해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배양하고 유리병에 담아 밀봉 포장한다. 냉동보관을 유지한 채 각 농가에 보급해 가축에게 주사함으로써 면역력을 키우는 방식이다.

생바이러스를 비활성화시킨 상태라 위력은 줄어들었지만 누군가 배양을 시도해 증식시키면 질병이 확산될 위험이 있다. 재산권과 생명을 지키려는 노력이 오히려 강력한 무기로 되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2007년 백신 제조 실험실에서 구제역 바이러스가 퍼져나간 사례가 있다.

바이러스의 유전체 아닌 단백질껍질 이용

영국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구제역 때문에 반복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나라다. 2001년에는 600만 마리 이상의 가축을 도살했고 80억 파운드(우리돈 약 13조 5천억 원)가 넘는 금전적 피해를 입은 바 있다. 구제역 백신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방식의 구제역 백신 제조법을 개발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옥스퍼드대학교, 리딩대학교, 하웰 과학혁신캠퍼스, 퍼브라이트 연구소 등 영국의 4개 대학과 연구소가 공동으로 새로운 구제역 백신 제조법을 개발한 것이다.

연구진이 이용한 방법은 ‘단백질 결정학(protein crystallography)’이라는 최신 기법이다. 물질의 미세 구조를 밝히는 연구를 결정학이라 하는데, 단백질 결정학은 엑스선을 이용해서 단백질의 심층구조를 파악하는 물리학과 생물학의 융합 분야다.
▲ 엑스선 단백질 결정학으로 촬영한 A22형 구제역 바이러스의 혈청형 구조. 연구진은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유발해 단백질껍질의 구조적 안정성을 강화시켰다. ⓒPLoS Pathgens

스티븐 커리(Stephen Curry) 영국 임페리얼컬리지런던 구조생물학 교수는 가디언지의 기고문을 통해 기존 구제역 백신 제조 과정의 3가지 난점을 소개했다. 첫째는 가축에게 접종 시 면역효과를 일으키려면 살아있는 바이러스의 유전체를 보호할 단백질껍질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두 겹의 에틸렌이민을 코팅하는 고난도 기술이 요구되는 공정이다.

둘째는 바이러스는 RNA를 이용해 유전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변종이 많다는 점이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A, C, O 등 총 7종의 균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백신도 그에 맞게 개발해야 한다. 셋째는 안정성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바이러스 배양주는 섭씨 영하 130도에 냉동보관하다가 각 농가로 보급된다. 이 과정에서 온도 유지에 실패하면 백신의 효과도 그만큼 저하된다.

이번에 개발된 백신은 구제역의 원인이 되는 살아 있는 피코르나바이러스(Picornavirus)를 이용하지 않는다. 바이러스의 유전체를 둘러싼 캡시드(capsid) 즉 단백질껍질을 재료로 삼아 인공적으로 재조합해서 백신을 합성해낸 것이다.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기존에는 다단백질 전구체가 면역작용을 유발하도록 프로테아제 효소를 사용했지만 숙주에 침투하면 독성을 발휘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재조합된 단백질 입자는 핵산이 담긴 실제 바이러스 입자에 비해 안정성이 떨어졌다.

연구진은 기존 전구체 대신에 빈 단백질껍질을 발현시키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또한 바이러스의 단백질껍질에 인위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바이러스 모체와 동일한 안정성을 유지하게 했다. 엑스선 결정학을 이용해 단백질 구조를 검사했을 때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접종 실험에서도 백신의 효과가 34주 이상 지속되었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인간 전염병을 막는 데 사용할 백신도 이러한 방식으로 제조가 가능하다”고 예측했다. 유출에도 안전하고 보관이 편리하며 접종효과도 장기간 지속되는 새로운 백신이 속속 개발될 것으로 기대된다.


임동욱 객원기자 | im.dong.uk@gmail.com

저작권자 2013.04.0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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