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9일 월요일

과학소설 속의 종교

과학소설 속의 종교

SF관광가이드/ 과학과 종교

 
 
SF 관광가이드 얼핏 과학소설 하면 종교와는 담쌓고 사는 문학 장르라 여기기 쉽다. 심지어 종교와는 100% 대척점에 있는 문학 장르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오히려 과학소설은 때때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종교적인 배경이나 설정을 깊숙이 끌어들이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소설만큼 종교적인 주제를 민감하게 의식하는 장르도 드물다. 과학이란 토대 위에서 출발하는 문학이다 보니 과학소설은 그와 정반대에 선 종교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과학소설은 인간에게 떨어지래야 떨어질 수 없는 종교라는 부분을 도외시할 수 없다.

어쩌면 과학소설이야말로 종교와 가장 궁합이 맞는 소재인지도 모른다. 인류사는 한편으로는 종교와 과학의 갈등을 담은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 중세 수도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과학자나 과학 철학자였듯이, 미항공우주국(NASA)처럼 전형적인 과학부서에 근무하는 과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종교인이다. 이는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다한들 사람이 항상 합리적으로만 사고하고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위 사진의 왼쪽은 지동설을 주창한 코페르니쿠스 오른쪽은 유전법칙으로 유명한 멘델이며, 둘 다 성직자 출신이다. ⓒWikimedia Commons

이처럼 흥미진진한 소재를 두고 과학소설이란 대중문학이 뒷짐만 서고 있겠는가? 과학소설에서 종교를 활용하는 수준은 비단 원시적이거나 비과학적인 종교를 단순히 논박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과학소설은 때로 인간의 존재조건에 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종교적인 경험에 대해 또는 신앙의 독창적인 해석에 대해 일반문학의 시각에서는 엄두 낼 수 없거나 꿈꿔보지 못한 통찰을 부여한다.

사실 우리에게 종교와 과학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다. 원시시대에는 종교가 그들에게는 세상을 설명해주는 철학이자 과학이었다. 왜 홍수가 일어나는지, 왜 천둥이 치는지 설명해줄 과학적 수단이 전무한 상태에서 종교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설명수단이었다. 과학기술이 문명발달을 촉진함에 따라 종교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들고 과학이 그 자리를 서서히 대치해왔지만, 아직도 종교는 이 세상에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수도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과학자나 과학철학자였듯이, 미항공우주국(NASA)처럼 전형적인 과학부서에 근무하는 과학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종교인이다. 이는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다한들 사람이 항상 합리적으로만 사고하고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 같은 논리회로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인간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마음이다. 환경 또한 인간이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를 에워싼 세상과 우주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넘어선다. 백년 천년 뒤에도 인류는 우주의 비밀을 완전히 풀어내지는 못할 테고, 따라서 상당수 사람들이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본질상 종교와 다름없는 정신체계를 믿고 있을 공산이 크다.
도리어 과학소설에서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면 독자 대중에 대한 파급력과 반향이 증폭된다.

만약 우리가 핵무기나 환경재난 등으로 자멸하지 않고 과학기술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간다면 언젠가는 은하계 전역을, 혹은 머리털자리 대은하단 전역을 마음껏 누비는 날이 올지 모른다. 그 와중에 우리는 비록 생김새는 천양지차일지언정 지성과 품성 면에서 우리와 맞먹거나 또는 그 이상인 존재들과 조우할 확률이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이럴 경우 지구의 종교인들이 믿고 있는 신앙체계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한 세계는 비단 지구만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할까?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니 동식물을 포함한 온갖 만물을 관장 하랬다는 성경의 창세기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걸까?
▲ 외계인 예수가 강림한다면 당신은 흑인 예수나 인디오 예수가 강림하는 것보다도 더 충격을 받을 것인가? 당신에게 예수란 어떤 고정관념의 현신인가? ⓒDoug Rizio

원천적으로 종교가 없는 종족이라면 모를까, 어떤 형태로든 종교로 인식될 수 있는 신앙체계를 지닌 외계종이 유일신이자 우주의 절대자를 받든다면 우리의 하느님이 그들에게도 같은 하느님일까?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종교였던 유태교가 기독교로 변형 확장되며 온갖 종족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 종교로 발전했듯이, 우리의 종교 역시 그들에게 문호를 거리낌 없이 개방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의 종교를 허락도 없이 멋대로 자기 종족 스타일로 다듬으면 이단이라고 호통쳐야 할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굳이 우주 멀리까지 나아갈 것도 없다. 단적인 예로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 외계인의 전령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소재 혹은 주제는 비종교인과 종교인 모두에게 자신의 사회와 우주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미국의 SF잡지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Asimov's Science Fiction' 1983년 11월호에 커버스토리로 실린 마이클 비숍(Michael Bishop)의 단편 <가말리엘 십자가의 복음 The Gospel According to Gamaliel Crucis, 1983>이 좋은 예다.

이 작품은 구세주의 도래라는 민감한 주제, 다시 말해 예수의 두 번째 강림을 다루었다. 문제는 이 구세주가 단지 외계인이라는 과학소설 특유의 발상에서 그치지 않고 그 생김새가 거대한 사마귀 행색을 하고 있다는데 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발상은 확률 상 논리적인 타당성이 있지만 독자들의 반발을 살 게 뻔했다. 당시 이 잡지의 편집이사였던 아시모프1) 또한 이 단편의 게재를 결정하기까지 상당한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지면을 통해 밝혔을 정도다.2)
▲ 마이클 비숍의 단편 <가말리엘 십자가의 복음, 1983>은 거대한 사마귀 모양의 외계인이 천년왕국을 구현하기 위해 내려온 제2의 예수라면 당신은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던진다. ⓒASF

하지만 개인적인 공감의 차원을 떠나 비숍의 가정은 분명 과학적으로 일리가 있다. 만일 우주에 우리 인류 말고도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진정한 우주의 하느님은 우리나 그들이나 똑같이 배려해주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육신의 겉모습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 즉 내면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정체성(identity)일 터이기에 예수가 어떤 형상을 하고 재림하든 하등 상관할 바 아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모프는 <가말리엘 십자가의 복음>이 혹여 야기할 분란에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유달리 과학소설은 그 속성상 여타의 문학 장르보다 종교적인 접근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인류와 최초로 접촉한 외계종의 문명발전단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선을 훌쩍 넘어설 경우 그러한 문명에서 온 존재들은 우리 눈에 거의 신이나 다름없어 보이지 않을까?

일찍이 아서 C. 클락은 고도로 발달한 외계의 과학기술 문명은 우리 눈에 마술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라 말했으며,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수준 차이가 현격한 두 문명이 서로 만난다면 흔히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보듯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치열한 우주전쟁 따위는 어불성설일 뿐더러 마치 신 종족이 인간 종족을 지배하는 듯한 인상을 줄 것이라 주장했다. 예를 들어 아서 C. 클락의 걸작 장편 <유년기의 끝 Childhood's End, 1953>에 등장하는 외계종족들인 오버로드와 오버마인드는 호전적인 인류를 단숨에 무력화시킨 다음 일정한 교화기를 거쳐 이 어린 종족이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속성 진화할 수 있도록 일방적으로 개입한다. 이러한 존재들 앞에서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등장하는 우주전쟁 따위는 가당치도 않다.
▲ 기독교 교리를 옹호하고 과학을 배격하기 위해 씌어진 반(反)과학소설인 C. S. 루이스의 <우주 삼부작 Space Trilogy, 1938~1946> 시리즈 ⓒ홍성사

한편 C. S. 루이스(Lewis) 같은 작가는 무신론의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기독교 교의론자로서 주장을 펼치는데 과학소설을 이용한다. 다시 말해 루이스는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기 쉬운 과학소설 작가의 통념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과학소설을 쓴다. 그의 <우주 삼부작 Space Trilogy, 1938~1946>이 대표적인 예로3), 그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건대 과학만능의 사고야말로 인류를 망치는 악덕이라 인류는 다시 종교에 귀의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서 반과학소설적 논지를 펼치기 위해 과학소설을 이용하는 역설적인 사례를 남겼다.

어차피 과학소설 자체가 작가 자신이 귀속된 사회에서 일궈내는 정신적 산물인 이상 종교와 어떤 식으로든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지 않을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는 신부였지만 지동설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일각에서는 종교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골치 아프다고 여겨 아예 의도적으로 그러한 요소를 배제하는 작가들도 있다. 스스로 실토했듯 아이작 아시모프가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인사이다.
“나는 내가 쓰는 이야기들에서 종교를 아예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꼭 들어가야 하는 경우를 빼곤… 그리고 내가 종교적인 모티프를 가져올 때면, 여지없이 그 종교는 막연하게나마 기독교의 냄새를 풍기는데, 이는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이지 내가 기독교인인 탓이 아니다. 냉담한 독자라면 내가 기독교를 우스꽝스럽게 조롱한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상 종교를 배제한 채로 과학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아이작 아시모프, <골드 Gold, 1995>, pp. 297~302

깊이가 있는 과학소설이라면 종교를 무조건 폄하거나 선뜻 받아들이는 대신 일상의 인간적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 더욱 풍요롭고 자유분방한 사고실험의 확장을 꾀한다. 과학소설이 과학기술과 사회의 변화가 맞물리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장르로서의 정체성을 존속시키기 위한 의무라면,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주요 독립변인들 중 하나로서 종교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주부터 소개할 몇몇 목록은 종교적 주제들과 과학소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개괄적으로 보여줄 것이다.
1) '엘러리 퀸의 추리잡지 Ellery Queen's Mystery Magazine'와 '앨프리드 히치콕의 추리잡지 Alfred Hitchcock's Mystery Magazine'의 예에서 보듯이 그 무렵 해당 장르의 유명인사 이름을 빌려 잡지가 창간되는 붐이 일었기에, 1977년 데이비스 출판사(Davis Publications)의 조 데이비스(Joel Davis)가 아시모프에게 과학소설 잡지 창간을 위해 이름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아시모프는 편집자 노릇은 거절했지만 대신 편집이사로 일하면서 1992년 작고할 때까지 잡지 [아시모프의 과학소설]에 컬럼을 기고하고 독자들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실었다. 현재 [아시모프의 과학소설]은 1년에 10번 발간되며, 3/4월호와 10/11호는 더블사이즈로 나온다.

2) 아시모프가 부담을 느낀 까닭은 이제까지 종교를 소재로 한 과학소설이 없지는 않았지만 막상 그 수를 세어보면 별로 많지 않다는 현실과 맞물린다. 과학소설은 흔히 외삽이라는 형식을 이용한다. 겉보기에는 이질적인 세계와 등장인물들이 우글거리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그 플롯의 이면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는 얼마든지 우리의 현실과 삶에 접목되기 일쑤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독자들은 아무리 요란하고 괴상한 이야기라 해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외삽법에 종교라는 테마를 집어넣으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3) <침묵의 행성 Out of the Silent Planet, 1938>, <페렐렌드라 (또는 금성여행) Perelandra (aka Voyage to Venus, 1943>, <그 가공할 힘 That Hideous Strength, 1946> 등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홍성사에서 2009~2012년 사이 번역출간하였다.

고장원 | sfko@naver.com

저작권자 2013.04.29 ⓒ ScienceTimes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