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과학, 소통하는 과학
과학소통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전환 필요
과학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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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병준 전자신문 부장 ⓒ강병준 |
정치에서 흔히 소통을 이야기할 때 쓰이는 게 ‘협상 이론(Costly signaling)'이다. 협상이나 타협에 앞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행동이나 말을 뜻한다. 이 때 행동은 진짜일수도, 거짓일수도 있다. 누구도 알지 못한다. “협상중인 상황에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반대로 “상대방 의지가 확고한지 아니면 그냥 허풍에 불과한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한 기본 절차다. 정치적인 테이블에서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해 정확한 상황 인식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이론이다.
학문적인 접근까지 시도될 정도로 소통은 어려운 문제다. 하기야 정치판에서는 쓰는 용어와 말에 따라 극명하게 이해가 엇갈린다. 불필요한 오해를 낳기도 십상이다. 자칫 잘못된 시그널로 오판하는 상황도 쉽게 발생한다.
과학 분야는 어떨까. 아이러니컬하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가장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분야지만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큰 화두다. 과학자와 비과학자는 물론 같은 과학자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심지어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작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학은 우리 삶과 별개 영역으로 자꾸만 멀어진다.
국가적인 지상 과제 혹은 거대 담론 차원에서 과학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과학을 생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통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과학을 우리 삶과 별개로 “막연히 필요하다”는 당위성 수준으로 인식한다. 정작 삶의 원리와 생활의 지혜가 과학 이론에 있고 일상의 궁금증을 과학으로 풀 수 있다는 데 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생활 속에 과학이 뿌리 내리지 못하는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소통의 문제다. 우스갯소리로 사용하는 주파수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언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식 장벽이 높다. 언어는 과학과 기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물론 과학 분야에서는 수학과 전문적 기호를 좋아한다. 그러나 자연에 숨겨진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과학 지식을 밝혀내거나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일은 말과 글로 이뤄진다. 과학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는 과정에서도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심지어 수학적인 논리와 체계도 어떤 형태로 말과 글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반응과 결과는 천양지차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과학 분야에 몸 담아 과학 지식이 어느 정도 있다는 준전문가조차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전문 학술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커뮤니티만의 용어가 필요하다.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만큼 학술성과를 정확하게 알리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일반인에게는 다소 난해하고 의미가 명확하지 않지만 커뮤니티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쓸 때 성과가 더욱 빛나는 부수적인 기대 효과도 있다. 아니면 그냥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면 그만이라고 맘 편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자꾸만 우리 생활에서 과학이 멀어지는 이유다. 과학 분야가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한다면 제 아무리 호기심에서 출발한 과학이라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끼리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문가 보다 비전문가를 더 많이 만나는 게 현실이다.
가장 빠른 개선책은 대화가 달라져야 한다. 영어도 아니고 우리나라 말도 아닌 언어 형태부터 고쳐야 한다. 전문적인 내용이 포함되면, 영어 단어에 우리말 토씨를 붙인 정체불명의 해괴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문 용어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수식어까지 영어 그것도 약어를 쓴다. 이런 대화에 익숙해진 과학자가 일반인과 대화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반인이 별개 부류로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소통을 위한 과학 언어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때로는 전문 용어를 활용한 소통이 중요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과학이 일반인이 쓰는 말과 글을 철저하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과학에 관심을 고취시키고 과학지식을 높이고 기술 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따져봐야 한다. 과학자의 연구 개발 목적은 과학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과학자의 언어는 모두가 이해하고,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일반인이 외면한 과학은 영원히 우리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늘 편하게 통용되는 전문용어를 일반인 용어로 ‘번역하는’ 일은 피곤한 작업이다. 과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도 나름 노력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과학성과를 이론화하는 것 못지않은 창조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소통을 위해서는 감내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을 과학자를 훨씬 빛나게 하는 지름길이다.
소통을 위한 또 하나 해결 방안은 과학 나눔 활동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이 없었으면 민주주의도 불가능했다’고 토로했다. 과학자가 인류애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인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의미다. 소통을 위한 중요한 행동이 과학 나눔이다. 그동안 과학은 유능한 과학자를 양성하고, 과학에 우호적인 사회 환경을 만들기 위한 쪽으로 한정됐다.
성과가 있었지만 반대로 과학기술의 사회 참여가 아주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과학기술 발전과 투자는 사회적 관심과 동떨어져 존재로 인식됐다. 과학자도 이제는 사회적 갈등과 격차 해소에 기여해야 한다. 사회봉사와 재능의 사회 환원도 필요하다. 과학 상식과 합리적 사고방식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원자력 문제나 불산 유출사건 등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무지에 의한 혼란과 사회 현안을 과학이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 정확한 과학지식과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행복한 인생을 가꾸는 데 기여해야 한다.
우리 사회 전체의 균형 발전과 소외받는 계층을 위해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미국에서는 성별·인종·지역에 따라 과학 소통에 차이가 크다고 보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여성과 소녀를 위한 프로그램’, 소수민족을 위한 ‘과학과 일상경험 계획’ 등 다양한 성공 프로그램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 과학기술정책을 사회공공정책 일환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과학기술발전과 재난·재해 등 사회문제와 연계된 활동을 추진한다. 과학과 사회의 대화 및 지구 미래 대안 모색을 위한 ‘STS포럼(교토포럼)’, ‘사회기술 연구개발센터(RISTEX)’ 운영, 정부와 시민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전망-학술로부터의 제언’ 프로젝트 등 다양하다.
4월은 과학의 달이다.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과학기술처 설립과 맞물려 1968년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정했으니 벌써 46회째를 맞는다. 올해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새 정부 출범 이 후 첫 과학 기념일이다. 박근혜 정부는 과학기술을 국정 현안으로 꼽았다. 알다시피 박 대통령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첫 이공계 출신 국가 원수다. 이래저래 올해 과학의 날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벌써 정부기관·지방자치단체·연구기관 주최 과학 이벤트가 줄을 잇고 있다. 4월 한 달에만 총 700여 건에 달한다.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는 과학 행사가 열린다고 보면 된다. 21일 서울 광화문 광장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는 한국과학창의재단 주최하는 ‘2013 가족과학 축제’ 등 풍성한 행사가 열린다.
일제 강점기 시절 ‘과학 데이’까지 포함하면 우리나라에 ‘과학’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진지 거의 100년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크게 발전했지만 분위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국민계몽운동으로 시작한 과학 데이 슬로건이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였다. 기본 정신은 ‘우리의 모든 생활 방법을 과학적으로 개선하자!’, ‘다 같이 손잡고 과학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기하자!’ 등이었다. 마치 판박이처럼 지금의 과학 대중화, 생활로서 과학 문화 운동 정신과 다르지 않다. 무감해서인지 분위기도 100년이라는 세월이 있지만 크게 변했다는 걸 느끼지 못하겠다.
결국 과학이 아직도 일상에 뿌리 내리지 못한 것이다. 우리 옆에 있는 과학이 아니라 별세계에 있는 과학 정도의 수준이라는 이야기다. 근본 원인은 소통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과학은 자칫 외톨이로 전락할 수 있다. 생활 속의 과학, 출발은 소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 본연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과학의 달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학문적인 접근까지 시도될 정도로 소통은 어려운 문제다. 하기야 정치판에서는 쓰는 용어와 말에 따라 극명하게 이해가 엇갈린다. 불필요한 오해를 낳기도 십상이다. 자칫 잘못된 시그널로 오판하는 상황도 쉽게 발생한다.
과학 분야는 어떨까. 아이러니컬하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가장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분야지만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큰 화두다. 과학자와 비과학자는 물론 같은 과학자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심지어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정작 다르게 이해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학은 우리 삶과 별개 영역으로 자꾸만 멀어진다.
국가적인 지상 과제 혹은 거대 담론 차원에서 과학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과학을 생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근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통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과학을 우리 삶과 별개로 “막연히 필요하다”는 당위성 수준으로 인식한다. 정작 삶의 원리와 생활의 지혜가 과학 이론에 있고 일상의 궁금증을 과학으로 풀 수 있다는 데 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생활 속에 과학이 뿌리 내리지 못하는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소통의 문제다. 우스갯소리로 사용하는 주파수가 다르다는 이야기다.
주파수를 맞추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언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보이지 않는 인식 장벽이 높다. 언어는 과학과 기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물론 과학 분야에서는 수학과 전문적 기호를 좋아한다. 그러나 자연에 숨겨진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과학 지식을 밝혀내거나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 일은 말과 글로 이뤄진다. 과학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는 과정에서도 언어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심지어 수학적인 논리와 체계도 어떤 형태로 말과 글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반응과 결과는 천양지차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과학 분야에 몸 담아 과학 지식이 어느 정도 있다는 준전문가조차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전문 학술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커뮤니티만의 용어가 필요하다. 전문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만큼 학술성과를 정확하게 알리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일반인에게는 다소 난해하고 의미가 명확하지 않지만 커뮤니티 내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쓸 때 성과가 더욱 빛나는 부수적인 기대 효과도 있다. 아니면 그냥 전문가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면 그만이라고 맘 편하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이 자꾸만 우리 생활에서 과학이 멀어지는 이유다. 과학 분야가 ‘그들만의 리그’라고 생각한다면 제 아무리 호기심에서 출발한 과학이라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끼리야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문가 보다 비전문가를 더 많이 만나는 게 현실이다.
가장 빠른 개선책은 대화가 달라져야 한다. 영어도 아니고 우리나라 말도 아닌 언어 형태부터 고쳐야 한다. 전문적인 내용이 포함되면, 영어 단어에 우리말 토씨를 붙인 정체불명의 해괴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문 용어는 물론이고 일상적인 수식어까지 영어 그것도 약어를 쓴다. 이런 대화에 익숙해진 과학자가 일반인과 대화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반인이 별개 부류로 생각하지 않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
소통을 위한 과학 언어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때로는 전문 용어를 활용한 소통이 중요하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과학이 일반인이 쓰는 말과 글을 철저하게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과학에 관심을 고취시키고 과학지식을 높이고 기술 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따져봐야 한다. 과학자의 연구 개발 목적은 과학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과학자의 언어는 모두가 이해하고, 수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을 필요가 있다. 일반인이 외면한 과학은 영원히 우리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늘 편하게 통용되는 전문용어를 일반인 용어로 ‘번역하는’ 일은 피곤한 작업이다. 과학적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도 나름 노력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과학성과를 이론화하는 것 못지않은 창조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소통을 위해서는 감내해야 한다. 그것이 과학을 과학자를 훨씬 빛나게 하는 지름길이다.
소통을 위한 또 하나 해결 방안은 과학 나눔 활동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이 없었으면 민주주의도 불가능했다’고 토로했다. 과학자가 인류애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인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겠다는 의미다. 소통을 위한 중요한 행동이 과학 나눔이다. 그동안 과학은 유능한 과학자를 양성하고, 과학에 우호적인 사회 환경을 만들기 위한 쪽으로 한정됐다.
성과가 있었지만 반대로 과학기술의 사회 참여가 아주 소극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과학기술 발전과 투자는 사회적 관심과 동떨어져 존재로 인식됐다. 과학자도 이제는 사회적 갈등과 격차 해소에 기여해야 한다. 사회봉사와 재능의 사회 환원도 필요하다. 과학 상식과 합리적 사고방식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원자력 문제나 불산 유출사건 등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무지에 의한 혼란과 사회 현안을 과학이 적극적으로 풀어야 한다. 정확한 과학지식과 합리적 사고방식으로 행복한 인생을 가꾸는 데 기여해야 한다.
우리 사회 전체의 균형 발전과 소외받는 계층을 위해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미국에서는 성별·인종·지역에 따라 과학 소통에 차이가 크다고 보고 이를 완화하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여성과 소녀를 위한 프로그램’, 소수민족을 위한 ‘과학과 일상경험 계획’ 등 다양한 성공 프로그램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일본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 과학기술정책을 사회공공정책 일환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과학기술발전과 재난·재해 등 사회문제와 연계된 활동을 추진한다. 과학과 사회의 대화 및 지구 미래 대안 모색을 위한 ‘STS포럼(교토포럼)’, ‘사회기술 연구개발센터(RISTEX)’ 운영, 정부와 시민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전망-학술로부터의 제언’ 프로젝트 등 다양하다.
4월은 과학의 달이다.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과학기술처 설립과 맞물려 1968년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정했으니 벌써 46회째를 맞는다. 올해는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새 정부 출범 이 후 첫 과학 기념일이다. 박근혜 정부는 과학기술을 국정 현안으로 꼽았다. 알다시피 박 대통령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첫 이공계 출신 국가 원수다. 이래저래 올해 과학의 날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벌써 정부기관·지방자치단체·연구기관 주최 과학 이벤트가 줄을 잇고 있다. 4월 한 달에만 총 700여 건에 달한다.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는 과학 행사가 열린다고 보면 된다. 21일 서울 광화문 광장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는 한국과학창의재단 주최하는 ‘2013 가족과학 축제’ 등 풍성한 행사가 열린다.
일제 강점기 시절 ‘과학 데이’까지 포함하면 우리나라에 ‘과학’이라는 용어가 익숙해진지 거의 100년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크게 발전했지만 분위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게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국민계몽운동으로 시작한 과학 데이 슬로건이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였다. 기본 정신은 ‘우리의 모든 생활 방법을 과학적으로 개선하자!’, ‘다 같이 손잡고 과학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기하자!’ 등이었다. 마치 판박이처럼 지금의 과학 대중화, 생활로서 과학 문화 운동 정신과 다르지 않다. 무감해서인지 분위기도 100년이라는 세월이 있지만 크게 변했다는 걸 느끼지 못하겠다.
결국 과학이 아직도 일상에 뿌리 내리지 못한 것이다. 우리 옆에 있는 과학이 아니라 별세계에 있는 과학 정도의 수준이라는 이야기다. 근본 원인은 소통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과학은 자칫 외톨이로 전락할 수 있다. 생활 속의 과학, 출발은 소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 본연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과학의 달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작권자 2013.04.19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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