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9일 화요일

한국 BEST SF작가 10인, 김영래(2)

한국 BEST SF작가 10인, 김영래(2)

지상에서 가장 무서운 기생충은 인류



한국SF를 찾아서 지난 회에서도 약술했다시피 김영래의 장편 '씨앗'은 이기적인 다국적 기업들이 환경파괴에도 불구하고 종자전쟁을 벌이며 한국 땅의 산천까지 좌지우지하려 드는 위기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시국에 주인공 사미승은 절을 찾아온 떠돌이 사내와 조우한다. 생면부지의 그를 주지인 탄해 스님은 살갑게 맞는다. 떠돌이 사내의 등짐에는 인터폴이 알면 경을 칠 씨앗 종자들이 한가득이다. 그는 주지의 묵인 아래 사찰 부근의 황무지를 갖가지 꽃과 식물이 무성한 옥토로 일궈낸다.

여기서 종자의 밀수와 밀매는 단지 암시장에서의 유통차원이 아니라 박탈당한 씨앗주권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이란 성격을 띤다. 종자거래법을 앞세워 인터폴 특수전담반이 다국적 기업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고 다녔지만 씨앗 밀수꾼과 밀매 상인들이 자기네 나라에서는 의적이나 대도(大盜)처럼 추앙되는 현실이었다.

떠돌이 사내의 소문이 퍼지자 지역 경찰은 주지를 찾아와 체포에 협조해달라고 하나 탄해 스님은 믿을 만한 사람이 사찰 안의 일을 돕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한편 씨앗박물관의 신임 관장은 떠돌이 사내를 초대하여 자신의 거사를 도와달라고 유혹한다. 씨앗 유통을 원천봉쇄하여 자기들 잇속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 하는 거대기업의 우두머리들을 식물의 독으로 말살하자는 것이다.

독을 독으로 제압하라! 그날부터 넋이 나간 사람마냥 기가 죽어 있는 떠돌이 사내에게 사미승이 연유를 묻는다. 사내는 관장이야말로 바로 자기 마음 속에 품었던 악(惡)과 다를 바 없다고 토로한다. 사랑으로 세상을 되돌리려는 실천을 해온 그에게도 폐부에는 세상을 이렇게 만든 원수에 대한 증오의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던 것이다. 이를 깨달은 떠돌이 사내가 혼돈한 마음에 도망치려 하자 주지 스님은 가꾸던 꽃밭을 가을까지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다독인다.

이윽고 떠돌이 사내의 흥겨운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쑥쑥 자라던 꽃들이 만개할 무렵 그는 종적을 감춘다. 사미승의 또래 친구였던 아이 하나와 함께. 주인공 사미승은 떠돌이 사내가 세상을 주유할 기회를 자신이 아닌 다른 아이에게 준 사실에 두고두고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십여 년이 흘러 사찰 주변의 녹지가 드디어 완연히 되살아나고 늘 잿빛 구름 투성이던 하늘이 갈라지며 햇살이 비칠 때 주인공은 깨닫는다. 그는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씨앗으로 심은 것이라고.
▲ 대재앙으로 인류가 종말을 맞는 주제를 다룬 초기 주요작, 리차드 제퍼리스의 <런던 이후; 1885년>와 메리 셀리의 <최후의 인간; 1826년>. 이것들은 극소수 생존자들의 분투에 초점이 맞춰진 감상적인 작품들이지만, 김영래의 <씨앗>은 현재의 환경재앙을 방치하다간 어떠한 불행이 닥칠지 구체적이고 과학적으로 되짚어본다는 점에서 훨씬 더 현실성을 띤다. ⓒProject Gutenberg

과학소설 역사상 대재앙으로 인한 인류의 종말을 계고(戒告)한 초기 주요작품으로는 리차드 제퍼리스(Richard Jefferies)의 '런던 이후 After London; 1885년'와 메리 쉘리(Mary Shelley)의 '최후의 인간 The Last Man; 1826년'이 흔히 거론된다. 김영래의 '씨앗' 역시 유사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전작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앞의 두 작품은 과학적인 엄밀성보다는 세기말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극소수 사람들의 처절함에 초점을 맞춘 다분히 감상적인 운명론에 치우쳐 있지만, 후자는 현재를 방치하고 있는 우리의 실수가 조만간 회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이기 때문이다.

소설 '씨앗'은 나락에 몰렸던 얼마 되지 않는 사찰 주변의 숲이 다시 완연히 되살아나기까지 무려 오십여 년의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했음을 일깨워준다. 만일 2030년에 탄해 스님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없었다면 지운 스님(장성한 사미승의 법호)이 그 과실을 맛볼 수 있었을까?

생태계가 무너져도 되돌릴 수는 있다. 그러나 부패한 공권력에 맞서, 제 이익밖에 모르는 독과점 다국적 기업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헌신적인 메시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그러한 구원이 이뤄진다 한들 즉각 실현되는 것 또한 아니다. 오십여 년! 희망은 그렇게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다. 작가는 '씨앗'을 통해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나락의 끝까지 몰리기 전에 해법을 찾으라고 설득한다.

이 장편의 미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식물 생태계 전반은 물론이고 품종 하나하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 그리고 애정이 듬뿍 느껴진다. 단지 식물사전에서 수집한 서지정보로는 이처럼 마음을 움직이는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망가진 땅을 어떻게 단계별로 되살리는가에 관한 설명도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다.

둘째로 환경재앙을 예방하거나 회피하려는 노력이 그저 그때그때의 단기 미봉책이 아니라 이른바 ‘인타라망(因陀羅網)’으로 집약되는 사상운동의 소산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는 만큼 인위적인 가공 그리고 산업적 이해에 따른 분리와 절단으로 자연을 조각조각 끊어 놓으면 인간도 그 한 부분인 이상 분절의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상이다.

'씨앗'에서 탄해 스님은 묻는다. 흙과 나무를, 물과 물고기를 어찌 분리할 수 있느냐고. 모든 존재는 우리의 거울이며 세상과 우주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의 몸은 하나로 묶인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그물이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삼아 분리 및 착취하는 짓은 인타라망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로 궁극에 가서 우주와 세계뿐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까지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이 때문에 작가는 탄해 스님의 입을 빌어 인류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무서운 기생충이라고 극언한다.

반면 '씨앗'에서 불교사원은 월터 M. 밀러 2세(Walter M. Miller, Jr.)의 장편소설 '라이보위츠를 위한 송가 A Canticle for Liebowitz; 1957년'의 주무대인 카톨릭 수도원처럼 인류문명의 마지막 보루다. '라이보위츠를 위한 송가'에서 카톨릭 수도원이 전면 핵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세상에서 구문명의 지식을 온전히 지켜내 후세 문명이 빠르게 재기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해줬듯이, '씨앗'에서 숲속의 작은 사찰은 멸종을 향해 치닫는 생태계의 암울한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다양한 식물종자들을 보관하고 싹틔워 끝내 자연과 다시 만나는 교두보였다.

▲ <씨앗>에서 불교사원은 월터 M. 밀러 2세의 장편소설 <라이보위츠를 위한 송가; 1957년>의 주무대인 카톨릭 수도원처럼 인류문명의 마지막 보루다. 후자의 경우에는 환경오염 대신 전면핵전쟁이 인류문명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다. ⓒSpectra

셋째로 단지 환경재앙의 추이에 대한 고찰에 그치지 않고 (앞의 줄거리 요약에서 보듯) 그로 인한 인간계의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간과 인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나아가 국가와 국가, 대륙과 대륙 간에 19세기 식 약탈적 제국주의가 회귀하는 상황에 대한 예견을 두고 단지 가상이라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인간사회의 양면성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무척 예리하다.
고장원 SF칼럼니스트 | sfko@naver.com

저작권자 2012.06.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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