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몇 년 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미술관 앞에서 가슴이 뛰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고흐는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였기 때문이었다. 2002년 어느 날 ,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던 필자마저도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가
그린 `론강의 별밤`을 보았을 때 온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고흐 미술관에서 그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흐 미술관은 실망스러웠다. 고흐 그림에서 등장하는 소용돌이와 노랑색은 여러 그림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고흐의
대표작에서 느껴졌던 강한 감동은 필자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필자는 "나는 정말 그림에 너무나도 무식해"라며 스스로를 탓해다. 감히 위대한 화가인
고흐의 그림에 실망하려 들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를 읽으면서 고흐 미술관이 다시 떠올랐다. 성공한 이들은 한가지 일에 1만 시간의
노력을 투자한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서였다. "혹시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본 고흐의 그림들은 그가 1만 시간을 투자하기 전에 나온 그림들이
아니었을까? 1000시간, 아니 5000시간을 투자한 시점에서 그린 그림이었길래 아직 대가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 끝에 필자는 고흐의 자살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오랜 좌절과 실패 끝에 1만 시간의 법칙을 채우고 드디어 성공의 문 앞에
도달했는데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우리는 고흐처럼 놀라운 성과를 이룬 사람을 만날 때면 천재성이나 번뜩이는 아이디어에서 그 비결을 찾는 경향이 있다. 필자도 고흐 미술관에서
고흐의 천재성을 찾으려 했던 것 같았다. 고흐가 느꼈을 영감의 흔적을 찾으려 했었다. `론강의 별밤`이 나오기까지 자양분이 됐던 실패와 좌절의
흔적들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뽀로로`를 창조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최종일 아이코닉스 대표를 인터뷰했을 때도 그랬다. 인터뷰 전 조사에서
필자의 눈을 가장 끌었던 것은 어느 한 주간지에 실렸던 기사였다. 이 기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최 대표는 주말에 자녀와 함께 TV
애니메이션을 보는 도중에 무릎을 친다. "제가 웃는 부분에서 아이도 똑 같이 깔깔대며 웃는 거에요. 재미있는 장면마다 웃지 않고 꾹 참고 관찰을
했죠. 그랬더니 `웃음 포인트`마다 정확하게 즐거워하더라고요. 그때 확신했어요. 아이가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교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기기 위해서 애니메이션을 본다는 것을요." 이날 이후부터 최종일 대표는 유아용 애니메이션 시장에 뛰어든다. 교육용 애니메이션이
대세이던 유아용 시장에서 즐기는 게 목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 결과 탄생한 게 뽀로로였다.
왜 이 같은 스토리가 필자의 눈길을 확 잡았을까? 아이와 함께 TV를 볼 때 찾아온 번뜩이는 영감이 뽀로로가 탄생한 배경이라는 스토리가 왜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 왔을까? 아마도 필자는 뽀로로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번뜩이는 천재성을 찾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최종일 대표를 만났을 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뽀로로의 착상 뒤에는 오랜 좌절과 실패의 시간이 묻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최 대표가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것은 1995년부터였다. 뽀로로가 나온 것은 2003년이니까, 8년여 동안 실패를 맛본 셈이다. "첫
번째 작품보다 두 번째 작품이 좋고, 두 번째 작품보다 세 번째 작품이 더 나은 식으로 작품은 발전했어요. 그러나 사업적으로는 성과가 비례하지
못했어요."
작품의 질은 계속 좋아지는데 성과는 나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원인을 찾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번민하고 고민했을까?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그 같은 번민과 고민의 조각들은 무의식 아래로 축적된다. 8년간 최 대표의 무의식 속에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조각들이 쌓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같은 정보의 조각들이 순간적으로 재배열되면서 놀라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된다는 게 심리학자들의 얘기다. 최 대표가 TV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유아용 엔터테인먼트 애니메이션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위대한 아이디어와 영감은 거저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수년 간의 실패와 좌절 끝에 얻어진다는 게 최종일 대표와 고흐로부터 필자가 얻은
결론이었다. 물론 실패와 좌절은 사람에게 큰 트라우마(trauma)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마틴 셀리그만 펜실대학교 교수는 "트라우마 후에
쇼크가 아니라 성장을 얻을 수 있다"며 "실패로부터 배우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실패와 좌절 없이 얻어진 위대한 아이디어와 혁신은
없다.
http://blog.naver.com/chemnote/80162873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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