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BEST SF작가 10인, 김영래(1)
사려 깊은 과학소설
한국SF를 찾아서 김영래는 과학소설 작가가 아니거니와 구태여 과학소설이란 장르를 이용하겠다고 남달리 의식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장편 <씨앗>은 작가가 후기에서 밝혔듯이 자신의 인생을 관통해온 생명존귀사상과 환경 운동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일반 대중에게 설파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다만 현재 시제로 그린 기존 장편 <숲의 왕>과 달리 근미래 시공간을 무대로 하면 작가가 의도한 바를 더욱 강렬하고 인상적으로 전달할 수 있겠다고 여긴 결과물이 <씨앗>이다.
김영래의 <씨앗>, 순문학작가의 사려 깊은 과학소설 하지만 생각해보라. 예프게니 자먀찐(Yevgeny Zamyatin)의 <우리 We; 1921년>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 1932년> 그리고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웰즈(Wells)와 베르느(Verne)의 작품들, 심지어 메리 쉘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 1818년>가 출간될 당시 그것들을 과학소설이니 장르문학이니 하고 규정할만한 개념적 틀이 있기나 했는가? 오늘날 이 걸작들을 과학소설의 범주 안에 넣는 까닭은 1920년대 말 룩셈부르크 이민자 출신 미국 사업가 휴고 건즈백(Hugo Gernsback)이 과학소설 개념을 정의하고 그전까지 나온 선구적인 고전들을 한 울타리에 몰아넣은 이래 앞의 고전 목록이 과학소설이란 장르문학의 위상과 때깔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불현듯 해외 사례를 예로 드는 이유는 김영래의 <씨앗> 역시 작가의 취지나 출발점이 애초 무엇이었든 간에 과학소설의 장르범주 및 정의와 깊게 맞물리는 교점으로 진입한데다가 그러한 문학적 사상적 성과가 녹녹치 않기 때문이다.
<씨앗>은 2080년대에 살고 있는 주인공 화자가 그로부터 오십여 년 전인 2030년대, 즉 그가 불과 여덟 살 때 한반도를 포함해 지구 전역에 일어났던 재앙을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천애고아로 절에 버려져 사미승으로 자란 여덟 살의 주인공이 마주한, 지금으로부터 불과 이십여 년 뒤의 근미래 세상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대기오염과 지구온난화를 방치하다 못해 갈수록 사람들이 악화시킨 나머지 생태계가 하루가 다르게 괴멸되기 시작한다. 풀씨를 뿌려봤자 아무 것도 자라지 않을 만치 지력이 약화된 도시 주변의 산들은 걸핏하면 바람과 빗물에 기대 도시를 덮친다. 임시처방에 불과한 축대와 사방공사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무너져 내리는 돌과 모래의 홍수에 속수무책이다. 한없이 자연을 괴롭히니 견디다 못한 자연이 인간에게 그 괴로움을 되먹임 하는 형국이랄까. 인과응보! 사람들은 먼지와 모래를 피해 해안가로 도시를 옮겨가지만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 목을 조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계속 되풀이된다. 갑자기 몰리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무리한 간척사업은 조수간만의 리듬을 해쳐 툭하면 해일이 일어난다. 식수도 턱없이 부족해 허덕인다. 인구압에 맞는 식수량을 확보하느라 지하수를 마구 퍼 올린 탓에 지하수 층에 생겨난 공동(空洞)으로 짠물이 스며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지구온난화 때문에 해수면까지 상승하니 해안 습지가 자취를 감추고 해안선은 사람들이 간척한 거대한 콘크리트 띠로 대체된다. 도시가 옮겨가며 버려지는 땅은 늘어만 가고 풀 한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로 변한다. 타격은 곧바로 생물계로 이어진다. 생태계 교란으로 곤충과 새들이 떼죽음 당하고 전염병이 창궐한다. 연안 바다에 플랑크톤이 사라지고 물고기가 떠난다. 자연이 온통 숨을 죽인다.
환경의 괴멸, 자원의 태부족은 인간들의 다툼을 격화시킨다. 멸종 식물이 늘어나자 종자도둑질이 성행한다. 이는 개인 차원 뿐 아니라 국가 간 대륙 간 약탈로 비화한다. 파올로 바치갈루피(Paolo Bacigalupi)의 장편 <와인드업 걸 The Windup Girl; 2009년>에서와 같이 김영래의 <씨앗>에서도 다양하고 풍부한 원시림과 생물군을 보유했던 제3세계는 다시 한 번 열강(列强)의 희생양이 된다. 종자를 채취해 보관, 분양하는 사업은 어느새 석유와 철강처럼 전세계 네트웍을 장악한 거대복합기업의 본업으로 자리 잡는다. 그 중에서도 세계종자은행이야말로 금융계의 IMF처럼 이러한 거대기업들의 카르텔이 어느 나라에서나 합법적으로 군림하게 하는, 구조적인 악의 본산이었다. 이제 종자은행은 지역과 국가를 막론하고 씨앗의 거래와 유통 질서 그리고 씨앗의 융자와 대출 등 제반 업무를 독점한다. 종자은행을 거치지 않은 씨앗의 불법유통은 혹독한 법적 제재를 받는다, 마약사범이나 위조지폐범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따지고 보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주인공 화자는 선진국들의 제3세계 농업수탈 전략전술의 역사적 연원을 중간에 언급하며 2030년대의 환경재앙에서도 같은 착취구도가 재현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일찍이 1960년대 아시아의 전근대적 농업국들은 미국이 개발한 다수확 신품종 벼를 수입 해다 농사를 지었다. 수확량은 대폭 늘었지만 아시아의 가난한 농부들은 매년 미국으로부터 볍씨를 사야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신종 벼는 병충해에 약해 농약과 화학비료까지 사야 했고 늘어난 수확량을 감당하기 위해 경운기까지 돌려야 했다. 그 결과 농업국들은 쌀 수확량이 늘어나도 끝없이 미국에 빚을 지는 악순환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가뭄에 부자는 허리띠를 졸라매면 되지만 빈자는 굶어죽는다. 환경의 대재앙은 선진국과 부국들에게는 또 다른 사업기회지만 후진국과 빈국들에게는 다시 한 번 생존권을 놓고 이리저리 치이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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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2012.06.11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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