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7일 목요일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백민석(2)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백민석(2)

한국 사이버펑크가 넘어서야 할 가이드라인




한국SF를 찾아서 '러셔'에서 온라인 시뮬레이션 게임을 연상시키는 체제와의 투쟁은 진정성의 결여라 볼 수 있는가?

'러셔'는 사회모순 및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인간들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이 턱없이 부족하기에, 모비와 메꽃 그리고 길드를 포함한 반정부 세력의 저항운동은 마치 PC 앞에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치루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가가 반정부 집단들을 일컫는 명칭으로 굳이 ‘길드’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러한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러 번 죽어도 다시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지는 게임과는 달리 단 한 번이라도 죽으면 영원히 아웃인 현실세계임에도 소설의 저항운동 참가자들은 양자의 경계선을 의식하지 않는 듯 처신한다. 이러한 간극, 배경설정의 심각함에 대비해 경박하고 게임처럼 움직이는 주요 캐릭터들의 괴리는 부조리함을 넘어서 독자들의 몰입을 저해할 수 있다.
시위는 원래 혁명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 <러셔>, 문학동네, 2003년, 141쪽

저항세력의 반정부 운동이 게임 같아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투쟁하는 인물들의 진정성 결여 문제뿐 아니라 저항운동에 대한 작가의 성격규정에서도 기인한다. 저항세력이 호흡구체 시설들을 파괴하는 목적은 정부를 전복하는 데 있지 않다. 그들은 그럴 능력은 둘째 치고 그럴 의지조차 없다. 다만 올바른 환경보호정책을 수립하는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그린피스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방책을 모색할 따름이다.

그래서 이들은 양자포와 9밀리 퓨전 디스럽터 건 같은 첨단 화력과 수륙양용에 비행까지 가능한 호버탱크로 무장하고서도 자기들은 단지 시위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 건 크게 하고 나면 시위의 생존자들은 서로 다시 만나지 않고 해산하겠단다, 진짜 시위처럼. 이런 식의 치기어린 장난이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저항세력의 순진한 계산대로라면, 그들의 무력시위로 호흡구체들과 이것들을 총괄하는 두뇌시스템을 파괴해 시정부의 환경정책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재고되도록 압박할 수 있어야 한다.

시위의 목적은 시의 하늘에서 대기정화 프로젝트를 걷어버리는 것, 호흡구체가 전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시정부를 향해. 시위가 성공해 대기오염수치가 올라가면 사람들이 병원으로 실려 가기 시작하면 정부도 별 수 없을 것이었다. 좀 더 그럴듯한, 좀 더 근본적인 환경정책을 강구하게 될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에게도 길드에게도 세상을 바꿀 힘은 없었다. 세상을 바꿀 힘은 정부에 있다. 시위는 그래서 한다.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닌 정부에 경고하기 위해. 그녀들이 가진 힘이란 어찌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단지 경고 한번 하려는 것인데도 목숨을 놓고 베팅해야 한다.
--- 122~123쪽

하지만 생각해보라. 강대국의 전면침공이 아닌 다음에야 설사 국내 일부 불만세력이 특정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심각한 테러를 가한다 해서 어떤 정부가 두 손 들고 그들의 요구를 전향적으로 검토할까? 예컨대 시정부의 번지르한 환경정책이야말로 실제로는 위험을 방치하는 기만술책에 지나지 않으며 그로 인해 시정부 요인들이 엄청난 반사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는 복선이 전후에 삽입됐더라면 저항세력의 목숨을 건 무장공격이 지금처럼 독자들에게 괴리감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대로라면 모비와 메꽃 그리고 길드 구성원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빗발치는 총알 속을 뛰어들어야 할 동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게임처럼 묘사하는 전투상황이 부조리한 측면을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극대화해주는 면이 있을지 모르지만 작품의 설정에 대한 독자의 진지한 공감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러셔'의 경우 그것이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의아스럽다.1)

영미권 사이버펑크 전통에 충실한 백민석의 '러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 과학소설계뿐 아니라 그 바깥의 문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영미권 사이버펑크 문학은 후기 산업사회를 지탱하는 젓줄의 하나인 사이버 네트워크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부조리한 주인공의 부조리한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신을 에워싼 실존적 상황이 부조리하기에 자신 또한 부조리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은 선악의 잣대와는 무관한 캐릭터다.

이러한 명제는 위에서 열거했듯 '러셔'에서도 부단하게 변주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질곡 속에서 사이버펑크가 창조해낸 인간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쾌락과 욕망을 달성하려 할 뿐 고상하거나 순수한 이상 따위에는 눈길 한 번 돌리지 않는다. 모비와 메꽃 그리고 길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어떤 목적을 갖고 궁극의 큰 그림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이버펑크 문학에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배후의 거대인공지능이다. '뉴로맨서'가 전형적인 예다. '러셔'에서도 변하지 않는 궁극의 꿈과 목표를 이루려는 캐릭터는 저항세력이 아니라 시정부의 환경정화 프로젝트와 직결돼 있는 권력자(초월자) ‘질’과 그를 전체의 부분으로 편입시키는 도시의 집단지성 네트워크이다.

▲ 인간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거대인공지능의 음모를 그린, 윌리엄 깁슨의 장편소설 <뉴로맨서>의 코믹북 버전 표지. 백민석의 <러셔>도 이러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Epic(1989년 10월)

그러나 '러셔'의 대단원에서 진지함의 깊이야 어쨌든 간에 이제까지 시정부의 환경정화시설 전체를 산산이 날려버리려 고군분투해온 모비와 메꽃을 도시의 초월자 계급이 장악한 집단지성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선뜻 귀의해버리는 결말은 논란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나중에 가서 독자는 모비와 메꽃이 시종일관 ‘질’이란 시정부 핵심인사에게 놀아난 장기 말이었음을 알게 된다. 질은 모비에게 호흡구체 라인의 중앙통제실에 접근할 수 내부정보를 흘리는 대가로 자신을 죽여 달라고 의뢰한다. 하지만 이는 따지고 보면 ‘질’이 모비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함을 보여주려는 시위나 다름없다. 청부자살로 육체는 명을 다했지만 질의 정신은 시정부를 실제로 움직이는 배후인 집단지성 네트워크로 전송돼 영생을 예약한다. 질은 육신을 갖고 권력을 농단하는 현세의 삶으로도 모자라 도시를 지배하는 집단지성의 일원으로 다시 부활한 것이다.

모비와 메꽃이 질의 유혹에 곧바로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마 집단지성이 두 남녀를 원한 까닭은 경쟁력 향상을 위한 우수자원 확보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전부 다 질 같은 인간형만 있다면 도시를 지배할 수 있는 잠재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그들 사정일뿐 모비와 메꽃은 이제까지 의심해온 시정부의 기만성을 적나라하게 인식하게 된 순간 그들과 손을 잡고 군체(群體)의 일부가 돼버린다. 이른바 ‘초월자’ 계급에 편입되는 영광 때문에 그동안의 투쟁 목적을 가뿐히 잊어버리게 된다. 아서 C. 클락의 '유년기의 끝'에서 외계지성의 진화조작으로 인류의 아이들이 거대 군체로 재탄생하며 저마다 삶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비극과 무엇이 다를까? 이렇게 맥없이 무너질 것이라면 무엇하러 그동안 책 한 권 분량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까? 작가는 결말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의 사이버펑크가 넘어서야 할 최소한의 가이드라인
백민석의 '러셔'를 총평한다면 필자는 한 가지 장점과 두 가지 아쉬움으로 요약하고 싶다. 영미권 사이버스페이스의 틀을 그대로 가져오는 대신 물리적 실체가 드나들 수 있는 가상차원을 창안했다는 점에서 '러셔'는 한국의 사이버펑크 문학 중에서 시공간의 독특한 차별화에 성공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반면 내용 구성과 전개에서는 사이버펑크의 전통을 살리되 한국적인 특색이나 백민석 고유의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게임 같은 전투 장면의 연출은 캐릭터들의 부조리한 내면을 깊이 있게 그려내는 데 기여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작품을 이끌어온 중심인물이자 저항세력의 최후 생존자들인 모비와 메꽃이 시정부 앞잡이인 질의 제안에 쉽게 동화되는 대단원은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돌연 혼란스럽게 만든다.

만일 '러셔'에다 영미권의 사이버펑크 문학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무정부주의적 자유분방함뿐 아니라 진정성을 담보한 정치적 색채를 덧입혔더라면 어땠을까? 혹여 군사정권의 장기집권 이래 정치적 굴곡이 심했던 한국 역사를 사이버펑크적 시각으로 재조망 하는 작업이 '러셔'에서 검증될 수 있었더라면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못지않게 한국의 과학소설사에서 새로운 한 획을 그었을 것이다.

사실 2012년 현재도 한국에서 사이버펑크 문학은 미래형이다. 영미권에서는 일찌감치 1980년대의 실험기를 거쳐 1990년대까지 절정을 이루었으며 21세기에도 포스트 사이버펑크라는 잔향(殘香)을 남기고 있는 사이버펑크 문학이 아직까지 한국의 과학소설계에서는 충분히 성숙된 면모를 보여주는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백민석의 '러셔'를 해외의 동일계열 우수작들과 맞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과학소설 문학계 밖에서 시도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국내의 과학소설 작가들이 사이버펑크 장르를 둘러싸고 고심해온 바를 넘어서는 내공과 완성도를 지녔다는 점에서 백민석의 '러셔'는 국내 작가들이 사이버펑크 작품을 쓰기 위해 넘어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 됐다.

1) 문학에서 게임적 설정을 도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러셔>에서 그러한 설정이 유기적으로 동화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고장원 SF칼럼니스트 | sfko@naver.com

저작권자 2012.06.0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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