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 1일 금요일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백민석(1)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백민석(1)


 


한국SF를 찾아서 한 때 엽기 코드의 작가로 알려졌을 만큼 현대산업사회의 극한을 그로테스크한 시각으로 그려내길 주저하지 않은 백민석의 작품 이력에서 과학소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사이버스페이스와 차별화되는 가상차원을 무대로
하지만 동기가 무엇이건 간에, 과학소설계 밖의 작가라 해도 사이버펑크 색채가 농후한 소설을 쓰자면 아무래도 해당 하위 장르의 역사적 전통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백민석의 장편 과학소설 <러셔; 2003년>(문학동네 간행)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러셔>는 엄밀히 말해 영미권 사이버펑크 문학이 쌓아올린 내러티브 틀을 충실하게 답습하는 차원에 머물러 이를 두고 한국형 사이버펑크의 비전을 논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과학소설 100년사’에서 이 작품을 따로 언급하는 까닭은 2000년대에 발표된 국내 창작과학소설 가운데, 특히 장편을 기준으로 할 때 백민석의 <러셔> 만큼 사이버펑크 장르에 관해 깊은 관심과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영수의 <디북>이 사이버스페이스 상의 자아 정체성과 실존에 대한 흥미로운 화두를 던진 바 있으나 단편이라는 점에서 파급력이 떨어진다.)
▲ 백민석의 <러셔> ⓒ문학동네

<러셔>의 세계는 네트웍을 지배하는 시스템에 맞서는 개인들과 소집단들의 삶을 그린다는 점에서 사이버펑크 철학의 기본형에 충실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스템은 미국 작가들이 흔히 즐겨 쓰는 왜색 풍 자본주의 사회의 탈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 대중을 기만하고 그들만의 이권을 영구히 공고히 하고자 획책한다는 점에서는 오십보백보다.

뚜렷한 이유는 밝히고 있지 않으나 수십 년 전 지구상의 대기에 대재앙이 일어나 맨 공기를 호흡하다가는 폐질환에 걸려 죽을 수밖에 없는 근미래, 시(市)정부는 더럽혀진 공기를 정화하기 위해 도시 곳곳에 일명 ‘호흡구체’라는 대형 공기정화기들을 설치한다. 여기서 걸러진 유독물질들과 도시가 배출하는 쓰레기들은 ‘샘 샌드 듄’이라 불리는 가상차원의 세계에다 무단 폐기한다. 지구의 대기 전체를 정화하는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제쳐두고 저비용 고효율이란 명분 아래 시정부는 가상차원에 대한 일방적 착취를 통해 당면한 위기를 유예한다.

백민석이 창안한 이 가상차원은 소설 <뉴로맨서>와 영화 <매트릭스>에서와 같은 단순한 사이버스페이스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눈길을 끈다. 기존의 사이버펑크 작품들에서 그려지는 사이버스페이스는 실제 물리공간이 아니라 전자 데이터가 오가는 네트웍 상의 추상화된 개념공간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전원 스위치를 내리면 꺼지면서 존재 의미 자체가 즉각 0이 되는 곳이다. (물론 이는 개념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단말기의 관점에서 본 설명이고, 현실적으로는 무수히 많은 단말기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어 이것들이 동시에 셧다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반면 ‘샘 샌드 듄’은 사방이 온통 모래투성이 사막이지만 엄연히 물질이 실존하는 공간이며 현실세계의 물건과 사람이 멀쩡하게 들락거릴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사이버스페이스, 즉 허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맴브레인(Membrane) 이론이나 초끈 이론이 연구 중인 10 ~ 11차원 우주의 자투리 공간에 더 가깝다.

백민석이 이러한 첨단 우주론들을 참고해서 창안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우주가 실은 4차원 시공연속체(3차원의 공간과 1차원의 시간)가 아니라 최소한 10차원에서 11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나머지 차원들은 빅뱅이 일어나자마자 4차원 시공연속체의 틈새(일명 칼라비-야우 다양체) 속으로 아주 작게 돌돌 말려들어가 버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차원들에 대한 근거는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우주론 차원에서뿐 아니라 중력을 포함한 우주의 근원적인 힘들의 상관관계와 근본속성에 대한 이론물리학 연구로부터 유추된 결과인 만큼 진위여부를 떠나 진지한 과학적 논의의 대상인 것만은 분명하다.1) 만일 미래의 인류가 나머지 차원들 중 일부를 조작하여 우리에게 익숙한 4차원 시공연속체 바로 곁에 놓고 소통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으리라.

▲ <러셔>에 등장하는 가상차원은 멤브레인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4차원 시공연속체의 틈새(일명 칼라비-야우 다양체)가 우리 눈에 보이는 차원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그림은 칼라비-야우 다양체의 예들 ⓒ헌터's 이글루


<러셔>에서는 권력자들이 이 공간을 무제한으로 쓰레기를 내다버릴 수 있는 공터 정도로만 여기는 탓에 장차 재앙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화근을 키우고만 있다. 왜냐하면 샘 샌드 듄에 갈수록 늘어나는 정체불명의 폴립들은 임계수치를 넘어선 쓰레기 투하가 이 가상차원의 세계에도 또 다른 환경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만일 호흡구체들로 연결된 두 차원의 틈새가 무방비로 열리거나 일정한 조건 아래 존재하도록 조작된 가상차원의 시공간이 틀어지는 날에는 그 동안 무단 투기했던 공해물질과 쓰레기더미는 물론이요, 그로 인해 암 덩이처럼 불어난 수수께끼의 폴립들이 우리세상으로 홍수처럼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현상유지에만 급급한 시정부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으며 재앙의 규모만 눈덩이처럼 키울 뿐이다.

소설에서는 이러한 시정부에 맞서는 이들을 총칭하여 ‘러셔’라 부른다. 말 그대로 ‘돌파하는 자’라는 뜻으로, 출신 성분을 떠나 시정부 권력에 맞서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도시의 주민들은 노동자와 기술자, 능력자 그리고 초월자의 네 등급으로 능력2)이 타고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이렇게만 들으면 같은 신분끼리 이해관계로 똘똘 뭉치는 일종의 신분사회 같지만, 이 세상에서도 일부 뜻있는 기술자와 능력자들은 자발적으로 무장(武裝) 길드를 결성하여 구렁이 담 넘어 가듯 구린 속내를 은폐하는 시정부의 환경정책을 바꾸려 한다. 이러한 의사표현의 극단은 호흡구체들과 이 네트웍을 총괄하는 심장부에 대한 파괴공작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사이버펑크 계열의 작품에서 권선징악이나 선악의 이분법을 기대하는 독자는 아마 없으리라. 부조리에 절어 악취 나는 꽃이 반드시 집권세력의 둥지에만 피는 것은 아니다. 저항 길드들은 저마다 시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바로 잡겠다며 운동자금을 끌어 모으지만, 구성원들의 면면을 보면 주정뱅이, 약쟁이, 겁쟁이, 전투에 부적합한 신체장애자들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시정부의 기간산업시설을 파괴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모금한 군자금으로 개인적인 치부를 하거나 크게 경을 치기 전에 달아날 궁리하기에 바쁘다.

그렇다고 해서 길드의 무기력함을 비웃으며 독자행동을 고집하는 능력자 ‘모비’와 길드 소속이지만 그를 따라나선 여성 ‘메꽃’의 경우에도 딱히 별난 사명감이 있지는 않다. 둘 다 사회정의 구현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과는 번지수가 한 참 다른 녀석들이다. 능력자 중에서도 비교적 뛰어난 편에 속하는 모비는 자신의 능력을 보란 듯이 발휘하고 싶은 욕심에, 그리고 메꽃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에 목숨을 걸만큼 값어치 있는 일이 없기에 시정부를 상대로 한 파괴운동에 가담한다.

메꽃이 길드에 가입했던 까닭은 길드의 일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가치 있어 보여서가 아니었다. 삶이, 산다는 게, 그런 일에 목을 매도 좋을 만치 값어치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 <러셔>, 문학동네, 2003년, 168쪽
1) 하버드 대학의 물리학자 리사 랜들(Risa Randall)은 원래 우주의 중력은 지금보다 더 커야 하지만 중력의 일부가 나머지 차원들로 새어나갔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중력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맴브레인 이론에서는 한 우주 내에서 뿐 아니라 초공간을 매개로 다른 평행우주 간에도 중력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크게 육체적인 운동신경과 두뇌활동능력으로 나눠진다.

■ 작가 백민석의 간략한 이력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민석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 후 1995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내가 사랑한 캔디>로 데뷔했다. 장편으로는 과학소설인 <러셔; 2003년> 외에 <헤이, 우리 소풍 간다; 1995년>와 <내가 사랑한 캔디; 1996년(단행본 기준)>, <불쌍한 꼬마 한스; 1997년> 그리고 <목화밭 엽기전; 1998년>이 있으며, 단편집으로는 <16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1997년>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2001년> 그리고 <죽은 올빼미 농장; 2003년>이 있다.

엽기적인 문화코드를 도발적인 상상과 충격적인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장기인 그의 작품세계는 동성애, 근친상간, 집단성교, 수간, 정신질환자의 환각, 미성년자 납치, 살해, 아동 포르노, 암매장, 전자오락, 가상세계, 대재앙 이후의 세계 등에서 보듯이 비정하다 못해 냉혹한 극한의 경계를 탐구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반사회적인 인물이 단골로 등장하며, 그의 유일한 과학소설인 <러셔>의 주요 캐릭터들 역시 이러한 전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003년 발표된 <죽은 올빼미 농장>을 이후로 절필했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고장원 SF칼럼니스트 | sfko@naver.com

저작권자 2012.06.0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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