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9일 화요일

“소설 쓰는 과학자, 생소하세요?”

“소설 쓰는 과학자, 생소하세요?”

[릴레이 인터뷰] 이병준 ETRI 스마트노드연구팀 선임연구원

 
지금 대부분의 우리는 과학과 소설이 서로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과학은 이성이고 소설은 감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던 많은 수학자와 과학자는 본래 철학과 문학에 뛰어난 소양을 보여왔다. 결국 글이란 것은 풍부한 감성을 소유한 사람이 쓰는 게 아니라, 냉철한 분석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 알맞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이병준 박사는 마치 21세기에 살고 있는 고대 철학자 같다. 뒤끝을 흐리지 않는 말투와 간결하고 명료한 화법, 더불어 사물을 바라보는 냉철함은 누가 봐도 객관적인 과학자의 면모지만 연구실 뒤에서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신화와 허구를 한데 뒤섞는 필력은 문학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평일에는 연구실에서, 주말에는 블로그 앞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이병준 박사를 직접 만났다.

미래 인터넷을 연구하다

이병준 박사가 현재 진행하는 연구 분야는 ‘미래 인터넷’이다. 미래 인터넷이란 대중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개념이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개념은 아니었다. 현재는 미래 인터넷의 기술 후보가 한두 가지로 좁혀졌지만, 초창기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이 미래 인터넷 기술이 될지’ 알지 못했다.
▲ 이병준 ETRI 스마트노드연구팀 선임연구원 ⓒ황정은

미래 인터넷이란 현재 인터넷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기술들을 총칭하는 것이다. 이병준 박사는 현재의 인터넷은 이미 기술적 한계 지점에 도달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현 인터넷의 한계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IP 네트워크가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IP 네트워크는, 새로 할당할 수 있는 주소부터가 고갈된 상태죠. 석유와 마찬가지로, 가용 자원이 이미 한계 지점에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기술적인 혁신도 정체 상태입니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사용자의 요구를 신속하게 만족시킬 방법이 없는 것이죠.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려면, 새로운 네트워크 기술이 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 인터넷 연구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스마트폰과 휴대용 태블릿 PC가 대중화되면서 단말기의 이동성이 극대화되어 가고 있는 것도 문제다. 기존 IP 네트워크 위에서 끊김 없는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굉장히 복잡한 구조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유지·보수비용이 증가하고, 이는 고스란히 사용자의 경제적 부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병준 박사가 속한 연구팀은 지난해 아이콘(ICON)이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 라우터를 개발했다. 'ICON'은 ICN(Information-Centric Networking) 기술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어보자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기존 네트워크의 한계를 ICN이라는 미래 인터넷 기술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다. ICON의 가장 큰 장점은, 동영상이나 화상회의, 온라인 강의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콘텐츠를 끊김없이 전송할 수 있으면서도, CDN(Content Delivery Network)보다 높은 네트워크 효율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그래머의 이야기를 쓰다

이병준 박사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프로그래머다. 지금은 국내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지만, 그의 학창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는 글을 쓰기 원했던 문학도였다. 고등학교 때 영문학과에 진학하겠다고 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컴퓨터공학과로 전공을 바꾸었다.

“처음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내 방에 항상 책을 가득 채워 넣어 주셨죠. 특히 소설책이 많았습니다. 그 책들에 빠져 살다보니, 소설가가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글을 써서는 먹고살기 힘들 거라고 하셨고,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평소 관심이 있던 컴퓨터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글쓰기는 취미로도 할 수 있고, 막상 업(業)으로 삼으면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때문에 이병준 박사는 글쓰기는 취미로 곁에 두면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집필활동’은 자신의 블로그(www.buggymind.com) 상에서 이뤄지고 있다. '프로그래머'(가제)라는 제목으로 연재되고 있는 소설은, 단행본 분량으로 치자면 벌써 4권째에 접어들었다.

“내가 잘 아는 것을 글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래머들의 인생과 고민을 소재로 삼았죠. 큰 계획 없이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벌써 2년 넘게 쓰고 있습니다. 그냥 프로그래머들의 에피소드만 다루면 재미없을 것 같아 그리스 로마신화를 뼈대로 삼았는데, 그러다 보니 분량도 많아지고 스토리도 복잡해졌어요.”

지금부터 소개할 사람은 ‘박사’가 아닌, ‘작가’ 이병준이다. '프로그래머'의 줄거리는 올림푸스(OLYMPUS)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팀이 겪는 12가지 고난과 그것이 해결되어 가는 과정을 골격으로 삼고 있다. 이 ‘12가지 고난’은 ‘헤라클레스의 12업’에서 착안한 것으로,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업을 닦기 위해 수행하는 열두 가지 과제 각각을 프로그램 개발 중에 만나는 문제로 환원한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저승 문턱까지 찾아가 생포한 케르베로스(Kerberos)는 사실 보안 솔루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케르베로스를 잡아오는 이야기는 ‘OLYMPUS 시스템에 발생하는 보안 문제를 찾아내는 것’으로 바꾸었죠.”

출판사와 출간 일정이 논의되고 있는 중이라, 완결되면 이 소설은 시중에서 종이책으로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이병준 박사의 책과의 인연은 소설을 쓰기 시작한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다수의 책을 번역하면서 필력을 쌓아온 그는 “번역을 하다 보니 내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며 소설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그렇다면 프로그램 개발과 소설을 쓰는 것 중 어떤 일이 더 재미있을까. 대답은 의외였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재미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 소프트웨어 개발과 글 쓰는 것 모두 더 나은 무언가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소설 쓰는 과정과 아주 비슷합니다. 글이 쓸 때마다 다른 것처럼, 소프트웨어 역시 만들 때마다 조금씩 다르죠. 물론 그럴 때마다 조금씩 나아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웃음) 어떤 표현이 더 나을지 항상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점은 비슷해요. 가령 책을 쓸 때는 어떤 단어가 더 적합할까 고민한다면,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어떤 코드가 더 효율적일지를 항상 따져봐야 해요. 그러니 둘 중 어느 것이 더 재미있다고 하기는 어렵죠.”

과학과 소설, 두 가지 모두 재미있고 사랑하는 일이지만 때론 대한민국의 과학자로서 마음이 씁쓸해질 때도 있다고 그는 고백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자들이 일하는 만큼 올바른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그렇죠. 잦은 야근과 높은 업무 강도에 비해 초라한 임금도 그렇지만, 일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일터가 아직 많습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일에 대한 열정만큼은 세계 1위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고, 그들의 자부심이 상처받지 않도록 배려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에게 매우 현실적이면서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과학자라는 직업은 다른 직업들과 결코 다를 게 없습니다. 다른 직업들이 그렇듯, 이 분야도 애정과 열정이 없으면 오래 하기 힘들죠. 환상에서 출발하면 애정은 금방 식습니다. 자신이 과학을 좋아하는 감정이 진짜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해요. 더불어 과학에 어울리는 적성을 가졌는지 파악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죠. 특히 수학에 적성이 맞아야 합니다. 개발자도 예외는 아니에요. 훌륭한 소프트웨어를 만들려면 더더욱 그렇죠. 제가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수리 능력 떨어지는 과학자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는 아주 잘 압니다. (웃음)”

하지만 코드를 만드는 일에는 누구보다 열정이 있었기에 다른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었다는 이병준 박사. 그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와 발견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만큼, 과학에 대한 진지한 마음가짐과 그에 걸맞은 노력을 겸비한다면, 절대 과학자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저작권자 2013.02.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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