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속에서 진화하는 신인류의 미래
SF관광가이드/해저도시 이야기 (5)
SF 관광가이드 마지막으로 바다 속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인간들을 소재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작품들을 몇 편 소개하고자 한다. 해저도시나 물 속에서 살 수 있는 인간이란 소재는 말 그대로 눈길을 끄는 독특한 설정에 불과하지 그것이 작품의 주제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네 작품은 SF적인 배경 위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학 본연의 주제에 충실히 다가서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소설의 고전으로 남을 만하다.
먼저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제4 간빙기 第四間氷期, 1959>를 보자. 이 장편은 물 속에서 살 수 있는 인간개조공학의 경이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먼저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제4 간빙기 第四間氷期, 1959>를 보자. 이 장편은 물 속에서 살 수 있는 인간개조공학의 경이뿐만 아니라 그것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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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베 코보의 <제4간빙기> 초판 단행본 표지. ⓒ講談社 |
일본 과학자 카츠미 박사는 정부 제재로 자신이 발명한 예측 컴퓨터를 정치적 전망예측에 쓸 수 없게 되자 평균적인 개인의 인생 예측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예측 데이터 적용대상이었던 한 사내가 의문의 살인을 당하고 박사의 아내마저 신원불명의 간호사에게 이상한 가루약을 먹고 낙태 당한 다음 태아까지 빼앗기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이런 일을 벌인 조직은 지구온난화가 심화되어 조만간 육지 대부분이 물에 잠기리라는 전망 아래 인간이 수중호흡 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던 중이었다. 태아는 이를 위한 어린 실험체였다. 살해당한 남자는 이러한 용도의 태아 밀거래에 관여했다가 비밀누설을 우려한 조직으로부터 제거된 것이다. 계속되는 협박전화에도 요지부동이자 카츠미 박사마저 조직에 납치된다.
조직으로부터 박사는 앞으로 도래할 수서인(水棲人) 사회에 방해가 될 요주의인물이라는 이유로 처형판결을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협박전화를 걸고 납치까지 불사하며 처형판결을 내린 장본인은 바로 미래의 카츠미 자신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범인은 예측기계가 현재의 카츠미에다 나름의 미래 변수를 추가하여 새로 만들어낸 카츠미의 또 다른 인격이었다.
예측기계는 카츠미 몰래 수서인들이 살아갈 신세계를 차근차근 준비해 왔던 것이다. 형 집행 두 시간을 앞두고 박사는 예측기계가 모니터에 투사해 주는 미래의 수서인간 사회를 목도(目睹)한다.
화면에는 2백여 명의 아이들이 마치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 수서 개를 쫓아다니거나 수중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닌다. 이들이 장성하면 해저의 공장과 광산 그리고 유전 등에서 근무하게 되리라. 대부분의 가정이 자녀 중에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수서인(水棲人)을 두게 되자 수서인간에 대한 세간의 편견은 자취를 감춘다.
해저도시가 완성되고 수서인들의 사회가 형성되자 그들은 독자적인 정부를 갖게 된다. 아울러 매년 30m 이상씩 해수면이 상승하며 조만간 제4간빙기의 종말을 예고한다. 다시 세월이 흘러 수서인으로 자란 카츠미의 아이가 수면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민 작은 섬에 오른다. 아이는 바람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하지만 아가미가 오래 버티기 힘들다고 아우성친다. 이제 아이에게 속한 세상은 이곳이 아니다. 육지는 이제 신인류에게 바다만큼 낯선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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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앤 슬론쥬스키의 <바다로 가는 문>. 물이 많은 이 행성 주민들의 삶에 관한 고찰은 유토피아 이야기와도 접목된다. ⓒRowan Williams |
서구 과학소설 중에는 앞서 언급했던 피터 와츠의 장편 <불가사리 Starfish, 1999>와 조앤 슬론쥬스키(Joan Slonczewski)의 장편 <바다로 가는 문 A Door Into Ocean, 1986> 그리고 모린 맥휴(Maureen McHugh)의 장편 <하루의 반은 밤 Half the Day is Night, 1994> 등이 바다 속 세상을 무대로 한 수준 높은 심리극을 보여준다.
<불가사리>는 캐나다 출신 해양생물학자1)가 쓴 하드 SF다. 이것은 외견상 개조인간들의 해저 탐사라는 과학소설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동시에 바다 속 세계(외우주)와 주인공의 내면(내우주)이 하나로 공명되게 안배되어 있다는 점에서 B급 과학소설은 도저히 흉내내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에 다다른다. 바다 속에서의 진귀한 경험은 다름 아닌 주인공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해저화산 인근의 지열발전 타당성 조사를 위해 심해에 장기체류할 인력이 절실했던 한 다국적 대기업은 뇌인지학자에게 어떤 유형의 사람이 알맞을지 자문을 구한다. 그 결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자들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타인에게 모진 학대를 당했거나 오히려 반대로 그런 몹쓸 짓을 한 사람들이야말로 보통사람들보다 심해 환경에 더 잘 적응하리라는 것이다. 학대자들은 그들이 병적으로 선호하는 학대의 대상으로부터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있고, 피학대자들은 고통스런 기억을 수면 위에 두고 와 머리 속을 비울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하나같이 유년기 이래 감내해야 할 깊은 상처를 마음속에 지녔거나 타인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들이 해저기지 근무요원으로 선발된다. 겉보기에 이러한 인원 구성은 그럴듯해 보인다. 기지 바깥의 어둠이 실제로 일부 요원들에게는 안도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점차 숨어 있던 문제의 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일부 요원들은 끝내 해저기지에서의 격리생활을 견뎌내지 못해 정신쇠약 증세를 보인다. 그중에는 실종되는 이까지 나온다. 이제 요원들은 오히려 함께 있음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불안감을 야기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이들 역시 환경에 인위적인 변화를 준다해도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악몽으로부터 완전히 탈출한다는 것은 헛된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절감한다.
정신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가운데 여주인공은 회사가 과연 그들을 지상으로 돌려보낼 의사가 있는지, 나아가서는 자신들이 과연 돌아갈 의사가 있는지조차 헷갈려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상한 레이저가 기지에서 멀지 않은, 소속불명의 또 다른 시설물에서 나오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렇다면 회사는 요원들에게 지시한 프로젝트 외에 이곳에 또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제까지 세상과의 소통에 심드렁했던 여주인공은 답을 찾아 나선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답을 찾아내는 길이기도 하다.
<불가사리>는 해양 전문가가 쓴 소설답게 일반인들에게 낯선 해저환경에 관한 풍요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기업의 탐욕과 그릇된 경영 그리고 인간 영혼의 유연성 같은 굵직한 주제들을 함께 다룬다. 피터 와츠는 하드한 과학(물리학, 화학, 지질학)과 이른바 소프트한 과학(심리학, 사회학)을 한데 잘 엮어냄으로써 일반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릴러를 빚어낸 것이다.
<바다로 가는 문>의 작가 또한 생물학에 조예가 깊다. 조앤 슬론쥬스키는 생태학적 페미니즘에 비폭력 혁명이란 주제를 접목하여 물로 뒤덮인 외계 행성에 사는 지적 존재들의 유사 유토피아 사회를 진지하게 탐구한다.
유전공학적 개입을 통해 전부 여성들만 태어나는 이 행성의 주민들은 ‘함께 나누는 이들’이라 불린다. 어느 날 바깥세상에서 온 ‘함께 나누지 않는 이들’의 위협을 받게 되자, 세계관의 혼란에 빠진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행성에 가서 (그들에게는 외계인인) 한 이방인 청년을 데려온다.
이러한 실험은 어떤 갈등이든 폭력과 압제 없이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가는 ‘함께 나누는 이들’의 생활방식이 보편성을 띤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시험대가 된다. 유토피아 이야기는 그 실현가능성보다는 우리 현실에 대한 개선의 여지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문학이란 점에서 무대가 외계의 바다로 바뀐다 해서 본질이 달라질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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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린 맥휴의 <하루의 반은 밤>. ⓒTor |
해저도시를 무대로 한 보디가드의 이야기인 장편 <하루의 반은 밤>은 부조리소설의 얼개를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에 관심을 기울인다. 베테랑 군인 데이빗 다이(David Dai)는 아프리카 평원을 떠나 카리브해 아래의 해저도시로 가서 재력가의 자손이자 은행가인 메일라 링(Mayla Ling)의 보디가드로 고용된다.
정부와 재계의 주요 인사들은 죄다 보디가드를 기용하는 것이 이 해저도시의 관행이지만, 메일라는 자신에게 보디가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둘은 불편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메일라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업을 교섭하던 중 그녀를 해치려는 테러리스트들의 이목을 끌게 된다. 이 와중에 데이빗은 자기 나름대로 폭력으로 점철된 자신의 과거의 악몽에 다시 직면해야 한다. 고용인인 링이 삶에서나 사업에서나 늘 확신을 갖지 못하듯이 데이빗 또한 과거의 후회스런 일에 더 이상 종사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기회를 찾으려 절치부심한다.
데이빗이 실종되자 그를 테러리스트로 판단한 정부는 고용주인 메일라마저 요주의 인물로 보고 바깥세상으로 나갈 비자 발급을 거부한다. 이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데이빗을 찾아내는 것이다. 작가는 세상을 내리누르는 수압 아래의 폐쇄공간에서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불안한 내면에 주목함으로서 밀도 높은 심리소설을 빚어냈다.
위의 네 작품은 이야기의 무대가 바다 밑 깊은 곳이라 해도 진정한 과학소설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인간의 고뇌를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함을 새삼 일깨워준다. 단지 기이한 풍물담 내지 모험담만으로는 경박한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며, 과학적 근거의 고찰에만 매몰되어도 문학이 아닌 과학 에세이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주요 추천작품 (국내 소개작은 밑줄 표시):
▶ <수학적인 마법 Mathematical Magic, 1648> / John Wilkins
▶ <해저 2만 리그 20,000 Leagues Under the Sea, 1869> / Jule Verne▶ <해저 수정도시 The Crystal City Under the Sea,1896> / Andre Laurie
▶ <침몰한 세계 The Sunken World, 1928> / Stanton Coblentz
▶ <물고기인간 The Amphibian, 1928> / Alexander Beliaev▶ <마라코트 심연 The Maracot Deep, 1929> / Arthur Conan Doyles▶ <녹색의 여인 The Green Girl, 1930> / Jack Williamson
▶ <수권(水圈) 속으로 Into the Hydrosphere, 1933> / Neil R. Jones
▶ <그들은 아틀란티스를 발견했다 They Found Atlantis, 1936> / Dennis Wheatley
▶ <해저왕국 Undersea Kingdom, 1936> / 극영화
▶ <야간공습 Clash of Night, 1943> / Henry Kuttner & C. L. Moore
▶ <표면장력 Surface Tension, 1952>(중편)2) / James Blish▶ <해저 탐사 Undersea Quest, 1954> / Jack Williamson & Frederik Pohl
▶ <목적지 무한 Destination Infinity, 1956>(잡지 연재 당시 제목은 <분노, Fury,
1947>) / Henry Kuttner & C. L. Moore
▶ <해저목장 The Deep Range, 1957> / Arthur C. Clarke
▶ <해저도시 City Under the Sea, 1957> / Kenneth Bulmer
▶ <은색도시 너머 Beyond the Silver Sky; 1961년> / Kenneth Bulmer
▶ <얼굴들의 격류 A Torrent of Faces, 1967> / James Blish & Norman L. Knight
▶ <우주의 수영선수들 Space Swimmers, 1967> / Gordon R. Dickson
▶ <카스트의 동굴들 The Caves of Karst, 1969> /Lee Hoffman
▶ <루모코 프로젝트 전날 The Eve of Rumoko, 1969>(중편)3) / Roger Zelazny▶ <정상의 바다 Ocean on Top, 1973> / Hal Clement
▶ <신의 고래 Godwhale, 1974> / T. J. Bass
▶ <실험 The Experiment, 1980> / Richard Setlowe
▶ <바다로 가는 문 A Door Into Ocean, 1986> / Joan Slonczewski
▶ <대지의 종말 Land's End; 1988년> / Jack Williamson & Frederik Pohl
▶ <심연 Abyss, 1989> / 극영화▶ <해왕성의 가마솥 Neptune’s Cauldron, 1981> / Michael J. Coney
▶ <틈새 A Niche, 1990>(단편)4) / Peter Watts▶ <바다의 삶 Mercycle, 1991> / Piers Anthony
▶ <하루의 반은 밤 Half the Day is Night, 1994> / Maureen McHugh
▶ <물의 세계 Waterworld, 1995> / 극영화▶ <불가사리 Starfish, 1999> / Peter Watts
▶ <타이폰의 아이들 Typhon’s Children, 1999> / Toni Anzetti
| 1) 피터 와츠는 동물보호재단과 정부 그리고 수산기업들에게 고용되어 멸종위기에 놓인 해양 포유동물들에 관한 연구를 10년 이상 해왔다. 2) 2010년 오멜라스에서 펴낸 작가선집 에 수록되었다. 3) 2010년 북스피어에서 펴낸 로저 젤라즈니 선집 <집행인의 귀향>에 수록되었다. 4) 이 단편은 행복한책읽기에서 펴낸 선집 <하드SF 르네상스 1, 2008>에 수록되었다. |
저작권자 2013.02.19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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