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화풍, 과학에서 출발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미술 역시 하나의 문화적 산물이다. 과학기술은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실을 모방하는 미술의 인상주의와 사실주의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는 석학인문강좌가 24일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의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5번째 마지막 강연이다.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는 석학인문강좌가 24일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의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 5번째 마지막 강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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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 ⓒScience Times |
서울대 이해완 교수의 사회로 오종환 서울대 교수, 김승환 조선대 교수, 정수경 홍익대 강사가 토론에 참가했다. 다음 주부터는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한국 근현대사)가 ‘대의 민주주의 공화국 탄생의 역사적 기원’을 주제로 5번의 강의를 펼친다.
인상주의의 성립에 대한 설명에서 그 사회적 요인으로 현대 도시 속에서의 외로운 개인의 출현과 그에 따른 시각적 주관성의 원리를 언급했다. 인상주의가 미술의 발전을 규정짓는 결정적인 유파로 등장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
고립된 단독의 개인은 순전히 시각적 인상을 수용하는 인상주의자들에게는 아주 적합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인이라면 인상주의자들에게는 단순히 빛을 반사하는 무표정의 자연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물이 반사하는 빛 또는 인상의 기록”이라는 인상주의자들의 주장은 “시각적 주관성”이라는 그들의 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각적 주관성”은 인상주의에 대한 일반적 설명인 “사물이 반사하는 빛 또는 인상의 기록”이라는 주장이다. 사물이 반사하는 빛의 기록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과학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가 성립하면서 나타난 소외된 개인이라는 현상과 인상주의의 연관 관계라고 요약할 수 있다.
내가 언급한 시각적 주관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눈에 의해 대상이 구성된다는 그런 의미로서가 아니라, 주어진 대상에 대한 수동적 인상을 카메라처럼 눈이 그대로 수용한다는 의미에서다. 나의 사고나 감정과는 무관하게 단순히 내 망막에 비치는 인상이라는 그런 의미로서의 개인의 주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은 fine art가 아닌 plastic art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fine art란 말은 beauty(가치)와 art(기술)의 결합이다. 이제는 파인 아트라는 말과 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처럼 미의 개념의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지 않은 가운데 오히려 양자가 분리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때, 파인 아트란 말은 그 존재 이유를 잃고 만다.
그 같은 사실을 예시해주는 사례가 있다.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확대돼 온 예술의 폭을 열거해 보면 좋다. 그 중에는 사진이나 영화도 있으며, 만화나 광고를 포함해 다양한 시각미술이라 이름 붙이는 현상들이 열거될 수 있다.
18세기 독일 미학의 창시자 바움가르텐이 ‘감성의 학문’으로서 미학을 제시했듯이 현재의 미학자들에게는 새로운 미학을 구축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fine arts)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말과 체제와 개념을 수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런 개념을 올바로 정립할 수 있을 때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현상을 포함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의 성립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시대의 예술 혹은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 시대의 소산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기의 회화에 대해 과학기술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미술의 개념이 바뀌었다고도 볼 수 있다. 화가도 수학을 통해 인간이라는 자연(human nature)에 관해서도 그 조화로운 비밀을 밝혀내고 그것을 회화로 그려낼 수 있다는 뜻인가?
그 당시는 그렇다. 회화가 자연을 모방함에 있어 한갓된 개별 양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자연(universal Nature)을 모방한다면, 그 회화는 아름다운 것이 된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런 것을 모방한 회화는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르네상스란 고대 그리스로 회귀하자는 이야기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그런 보편적인 자연의 구현에 대해서도 모방이란 말을 적용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별개 문제다. 다만 당시 르네상스 이론가들은 그 모방 개념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차용해 거기에도 적용했다.
특히 다빈치의 그림에서 나타난다. 비례(比例) 문제다. 황금분할이 나타난다. 르네상스 사람들은 수학이 완벽한 것을 안겨준다고 생각했다. 자기들 입장에서 수학을 갖고 정형화하려 했다는 점에 그들의 특징이 있다.
상상력이 예술의 창조에 중요한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상상력이 진정한 예술의 창조력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을 한다. 상상력과 예술의 창조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예술이 창조적 상상력만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거나 극단적으로 정신병자들의 그림들도 상상적 창조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들의 소산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예술 창조에 있어서 상상력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진정 상상만으로 예술 창조가 가능할 수 있을까? 사실 그러한 입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 미술가들이 있다. 나는 그러한 예술과 그러한 예술을 정당화하는 이론에 대해서 이견(異見)을 표하고 싶다. 상상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예술 창조로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의 예술은 과학이라는데 그렇다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청중 가운데 질문)
압축적으로 도식화하자면 고전주의는 합리적 규칙을 중시하는 ‘모방’ 개념을 중시한다. 반면 낭만주의는 인간 내면의 감정과 상상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영감’ 개념을 강조하는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고대와 달리 고전주의는 합리적 규칙을 통해 ‘본질을 모방’ 할 수 있다고 보았고, 낭만주의는 영감이 뮤즈라는 신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인 상상력이라 보았다. 예술을 일종의 과학으로 보는 견해는 고전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인상주의의 성립에 대한 설명에서 그 사회적 요인으로 현대 도시 속에서의 외로운 개인의 출현과 그에 따른 시각적 주관성의 원리를 언급했다. 인상주의가 미술의 발전을 규정짓는 결정적인 유파로 등장하게 된 것은 무엇인가?
고립된 단독의 개인은 순전히 시각적 인상을 수용하는 인상주의자들에게는 아주 적합한 주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인이라면 인상주의자들에게는 단순히 빛을 반사하는 무표정의 자연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물이 반사하는 빛 또는 인상의 기록”이라는 인상주의자들의 주장은 “시각적 주관성”이라는 그들의 원리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각적 주관성”은 인상주의에 대한 일반적 설명인 “사물이 반사하는 빛 또는 인상의 기록”이라는 주장이다. 사물이 반사하는 빛의 기록은 “세계에 대한 객관적-과학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가 성립하면서 나타난 소외된 개인이라는 현상과 인상주의의 연관 관계라고 요약할 수 있다.
내가 언급한 시각적 주관성의 원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눈에 의해 대상이 구성된다는 그런 의미로서가 아니라, 주어진 대상에 대한 수동적 인상을 카메라처럼 눈이 그대로 수용한다는 의미에서다. 나의 사고나 감정과는 무관하게 단순히 내 망막에 비치는 인상이라는 그런 의미로서의 개인의 주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은 fine art가 아닌 plastic art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기본적으로 fine art란 말은 beauty(가치)와 art(기술)의 결합이다. 이제는 파인 아트라는 말과 체제가 성립되기 이전처럼 미의 개념의 관계가 그렇게 긴밀하지 않은 가운데 오히려 양자가 분리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때, 파인 아트란 말은 그 존재 이유를 잃고 만다.
그 같은 사실을 예시해주는 사례가 있다.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확대돼 온 예술의 폭을 열거해 보면 좋다. 그 중에는 사진이나 영화도 있으며, 만화나 광고를 포함해 다양한 시각미술이라 이름 붙이는 현상들이 열거될 수 있다.
18세기 독일 미학의 창시자 바움가르텐이 ‘감성의 학문’으로서 미학을 제시했듯이 현재의 미학자들에게는 새로운 미학을 구축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술(fine arts)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말과 체제와 개념을 수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런 개념을 올바로 정립할 수 있을 때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현상을 포함하여 새롭게 등장하는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의 성립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 시대의 예술 혹은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 시대의 소산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기의 회화에 대해 과학기술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미술의 개념이 바뀌었다고도 볼 수 있다. 화가도 수학을 통해 인간이라는 자연(human nature)에 관해서도 그 조화로운 비밀을 밝혀내고 그것을 회화로 그려낼 수 있다는 뜻인가?
그 당시는 그렇다. 회화가 자연을 모방함에 있어 한갓된 개별 양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자연(universal Nature)을 모방한다면, 그 회화는 아름다운 것이 된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런 것을 모방한 회화는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르네상스란 고대 그리스로 회귀하자는 이야기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그런 보편적인 자연의 구현에 대해서도 모방이란 말을 적용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별개 문제다. 다만 당시 르네상스 이론가들은 그 모방 개념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차용해 거기에도 적용했다.
특히 다빈치의 그림에서 나타난다. 비례(比例) 문제다. 황금분할이 나타난다. 르네상스 사람들은 수학이 완벽한 것을 안겨준다고 생각했다. 자기들 입장에서 수학을 갖고 정형화하려 했다는 점에 그들의 특징이 있다.
상상력이 예술의 창조에 중요한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상상력이 진정한 예술의 창조력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하지 않냐는 생각을 한다. 상상력과 예술의 창조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예술이 창조적 상상력만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거나 극단적으로 정신병자들의 그림들도 상상적 창조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들의 소산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예술 창조에 있어서 상상력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진정 상상만으로 예술 창조가 가능할 수 있을까? 사실 그러한 입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대 미술가들이 있다. 나는 그러한 예술과 그러한 예술을 정당화하는 이론에 대해서 이견(異見)을 표하고 싶다. 상상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이 예술 창조로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의 예술은 과학이라는데 그렇다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청중 가운데 질문)
압축적으로 도식화하자면 고전주의는 합리적 규칙을 중시하는 ‘모방’ 개념을 중시한다. 반면 낭만주의는 인간 내면의 감정과 상상력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영감’ 개념을 강조하는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고대와 달리 고전주의는 합리적 규칙을 통해 ‘본질을 모방’ 할 수 있다고 보았고, 낭만주의는 영감이 뮤즈라는 신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인 상상력이라 보았다. 예술을 일종의 과학으로 보는 견해는 고전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 2012.11.26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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