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2일 월요일

예술은 낭만인가

예술은 낭만인가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예술은 낭만인가? 낭만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어쩌면 예술은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매도 당하는 것은 아닐까? 예술은 다른 분야의 창의적인 작업이다.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10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오병남 서울대 명예 교수는 ‘낭만주의: 상상과 감정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주제로 3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상상과 감정으로서의 예술
▲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 ⓒScience Times
‘로맨틱(romantic)’이라는 말은 ‘고전적(classical)’이라는 의미보다 훨씬 분명하다. 18세기를 통해 문학과 그 밖의 예술영역에서 비평의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말은 중세의 프랑스어인 ‘로망즈’(romanz)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중세 시대의 로맨스(romance)는 이 속어를 갖고 운문으로 쓰여진 공상적이고 괴팍하고 가당치 않은 기사들의 이야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한 함축 때문에 그 말은 르네상스 이후 문학을 포함해 고전주의의 미술에 반대되는 새로운 예술의 경향을 뜻하는 용어로 퍼져나갔다.

이 같은 의미로 이해된 ‘로맨틱’이라는 말이 영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다. 그것은 공상적인 것에 대한 광범위한 취미를 대변하기 위해 사용됐다. 이 같은 사실은 S. 존슨(1709-84)이 편찬한 ‘사전(1755)’에서 ‘로맨틱’이라는 말을 풀이하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낭만은 거칠고, 허황된 것으로 취급

“로맨틱(Romantick)은 거칠고, 있을 것 같지 않고, 허황되고, 공상적이고, 야생적인 풍경을 담고 있는 로망스(romance)를 닮은……” 이라는 의미로 풀이되고 있다. 로맨틱이라는 말이 상상적으로 표현된 것의 특성을 지시하는 말로 사용됐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 형식의 명료성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부정적 의미에서였다.

그러한 낭만적 예술은 18세기 말에 민족주의적 경향을 띤 독일 문화론자들의 영향 때문에 당대의 경향을 대변하는 편리한 용어로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런 중에 그 말은 그것이 과거에 지녔던 부정적인 의미를 서서히 퇴색시켜 갔다.

마침내 19세기 낭만주의에 이르러서 그 말은 미래 사회의 변화를 기약하는 말로까지 그 의미가 바뀌었다. 과거 사람들이 생각했듯 '가당치 않고', '허황'된 것이라는 생각 대신 진지하고 정직하고 자발적인 인간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로 차츰 그 의미가 바뀌어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직접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어떤 경험들을 강조하는 예술적 경향의 특성을 지시해 주는 말로 이해됐다. 이러한 경향과 더불어 정념(passion), 정감(sentiment), 감정(feeling), 정서(emotion), 감성(sensibility) 등의 개념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예술적 창조와 취미의 영역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18세기에 낭만은 ‘아름다운 감성’으로
독일의 Fr. 슐레겔(1772-1829)이 '로맨틱'이라는 말에 부여한 의미를 대비해 보면 이 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얼마나 감소되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감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을 경시했던 당대의 풍조와는 달리, Fr. 슐레겔은 이 말을 '고전적'(classical)이라는 말에 대조시켜 사용하면서, 그것을 '진보적인 보편적 시'라고 부른 예술적 표현의 형식을 규정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존슨의 ‘사전’ 이후 40년 사이에 왜 그 같은 변화가 초래 되었을까? 이 사이에 서구 세계에는 두 개의 커다란 혁명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의 독립전쟁(1776)과 프랑스의 대혁명(1789)과 같은 정치혁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제적인 입장에서 봉건영주의 장원제도를 대체시킨 산업혁명이다.

따라서 자유의 개념을 자각해 가는 중에 경제구조의 변화가 초래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새로운 중간 계층과 새로운 삶의 방식이 수반됐다. 이 같은 사실은 모든 분야에서의 새로운 사고와 문화의 잉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낭만주의는 새롭게 펼쳐진 세계 속에서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고를 지시하는 말이 되어 갔다.

철학 분야에서는 전통적인 신고전주의적 예술의 경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던 합리주의가 서서히 퇴조해 가고 있는 중에 자아, 혹은 주관을 강조하는 독일의 관념론이 잉태되고 있었다. 그러는 중 예술의 영역에서는 낭만주의로 인도되는 취미의 경향과 그것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비평이 서서히 작동되기 시작했다.

우선, 고딕풍의 건축과 중세 취미의 부활을 거론할 수 있다. 신고전주의 강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강령이 확립되기 이전의 먼 과거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고대 이론을 보다 깊이 연구하거나 그것마저 완전히 거부하거나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들 중 빈켈만은 그리스 고전 미술의 본질을 자기의 감성의 입장에서 재해석하는 데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마저 거부한 사람들은 중세를 선망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른바 중세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건축이 예술에 의미를 부여
왜냐하면 중세로 눈을 돌린 사람들은 로마-르네상스적 고전주의가 그리스를 모델로 한 신고전주의 쪽으로 바뀌었다 해도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적인 것은 로마적인 것만큼이나 차갑고 규칙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거기에도 그들 주변에 싹트고 있던 새로운 민족 감정과 예술의 필수요소라고 믿고 있었던 강렬한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들은 한동안 유럽을 속박하였던 르네상스 이래의 합리적 전통을 탄핵하고, 그 대신 그것을 자신들 민족 전통으로 대체하여 장려했다. 따라서 그들은 미술을 통해 고전주의가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주의를 거부했으며 르네상스가 항상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던 것과는 달리 예술이 자연을 극복하거나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연은 단순한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무한하고 복잡한 것이어서 그렇게 만만하게 간주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그런 중에 그들의 눈에는 오직 옛 건축 ― 조롱적으로 ‘고딕(Gothic)’이라고 불린 건축 ― 만이 그들의 바람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중세 건축에는 고전적인 규칙에 반대되는 요소, 지방 토착의 고유한 특색, 민족사의 기념물, 그리고 자연과 같이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형식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건축가들에게 있어서 중세의 성당은 어떤 의미나 비례도 없는 무질서한 덩어리였고, 로마의 작품의 통일성과 기품에 비교할 수 없는 열등한 것이었다. 그들은 쓸데없이 많은 고딕의 장식을 고전의 엄격성에, 고딕의 거침을 고전의 완결성에, 고딕의 연약함을 고전의 견고함에, 고딕의 기괴함(bizzaria)을 고전의 우아함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딕의 비규칙성을 고전의 규칙성에 대조시켰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11.12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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