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17일 토요일

독한 병원균, 이이제이 전법으로 무찌른다

독한 병원균, 이이제이 전법으로 무찌른다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4)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몸에 염증이 생겼거나 감기에 걸렸을 때 항생제를 며칠 먹고 나서 속이 불편했던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무식한 항생제가 우군 적군 안 가리고 마구 베어버린 결과 장내미생물의 밸런스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회복이 돼 수 주 뒤에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운이 없으면 심각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수술 등으로 입원한 환자가 장기간 강한 항생제 처방을 받을 경우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데 최악의 경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실제 미국에서는 매년 수만 명이 이런 식으로 사망하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클로스트리디움 디피실리(Clostridium difficile, 이하 C. 디피실리)라는 악명높은 병원균이 관여한다.

C. 디피실리는 건강한 사람의 대장 안에 있기도 하지만 다른 장내미생물의 기세에 눌려있다. 그런데 항생제 복용으로 장내미생물이 죽거나 힘이 떨어질 때 확 퍼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녀석은 균주에 따라 병원성에 큰 차이가 나는데 병원성이 강한 종류는 장내 면역계를 교란해 심한 염증반응을 일으키고 설사, 열, 식욕부진, 구토, 위막성대장염 등의 증상을 수반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C. 디피실리를 없애려면 반코마이신 같은 또 다른 강력한 항생제 처방을 해야 하는데 증세가 호전됐다고 항생제를 끊으면 C. 디피실리가 다시 우점종이 되면서 병증이 나타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진퇴양난인 셈이다.

분변으로 감염 치료

지난달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미국감염질환학회 연례모임에서 미국 헨리포드병원의 마유르 라메시 박사는 다소 엽기적인 C. 디피실리 퇴치법을 소개해 화제가 됐다. 즉 감염 환자에게 건강한 사람의 분변 즉 똥을 약으로 써서 치료하는 방법이다. 분변을 물에 타 항문을 통해 환자 대장으로 넣어주면 치료는 끝이다. 그렇다면 분변의 어떤 성분이 작용하는 것일까.

C. 디피실리가 꼼짝 못하는 강력한 항생제가 들어있는 건 아니고 바로 분변에 섞여있는 장내미생물이 환자 대장을 우점하고 있는 C. 디피실리를 무찌른 결과다. 한마디로 오랑캐(미생물)로 오랑캐를 무찌르는 즉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인 셈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원시적인 방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강석기

라메시 박사의 발표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 49명 가운데 43명이 완전히 회복됐고 두 명만이 효과가 없었다. 나머지 네 명은 다른 이유(원래 병)로 사망했다고 한다. 놀라운 결과다. 그렇다면 분변 속의 어떤 미생물이 C. 디피실리의 천적일까?

이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연구결과가 온라인의학학술지인 ‘플로스 병원체(PLOS Pathogens)’ 10월호에 실렸다. 영국 생어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쥐에 병원성이 강한 C. 디피실리 균주 027/BI를 넣어 장이 탈이 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건강한 쥐의 분변을 넣었는데 사람에서처럼 회복되는 걸 확인했다. 그 뒤 분변을 배양해 여러 분획으로 나눈 뒤 각각 효과를 확인했는데 ‘혼합물B’라는 분획만이 027/BI를 퇴치하는 능력을 보였다. 연구자들이 혼합물B에 들어있는 미생물을 조사한 결과 6종이 확인됐는데 그 가운데 3종은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종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6종 가운데 하나만 빠져도 027/BI를 퇴치하는 능력이 사라졌다. 즉 6종의 미생물이 네트워크를 이뤄 협동해야 병원균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 앞으로 사람의 분변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효과를 내는 미생물을 선별해 배양한 뒤 프로바이오틱스 즉 생균제를 만든다면 분변을 직접 투입하는 번거로운 치료법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출산 때부터 장내미생물에 노출돼

이처럼 우리 몸에 우군(또는 적어도 해가 없는)인 세균으로 적군인 세균을 통제해 치료효과를 보는 방법이 세균요법이다. 분변을 이용하는 치료법은 분변세균요법(fecal bacteriotherapy) 또는 분변미생물상이식(facal microbiota transplantation)이라고 부른다. 사실 분변세균요법은 최근에 나온 치료법은 아니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58년 위막성대장염 환자 4명에게 건강한 사람의 분변을 관장을 통해 넣어줘 치료했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당시는 병의 원인을 몰랐지만 이 환자들 역시 C. 디피실리가 주범이었을 것이다.

그 뒤 분변세균요법은 의사들 사이에 ‘마지막 수단 요법’이라고 불리며 이도저도 안 될 때 어쩔 수 없이 시도하는 치료법으로 간간히 쓰여 왔지만 최근 인체 건강을 유지하는데 장내미생물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되면서 이제는 분변세균요법이 C. 디피실리 감염증에 ‘표준 요법’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궤양성 장염이나 심지어 비만과 당뇨에도 분변세균요법이 시도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한글판이 나온 ‘좋은 균 나쁜 균’이라는 책을 보다가 우리 몸에 다른 사람의 분변을 넣어주는 게 어쩌면 그리 낯선 경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민망한 내용인데 보통 산모가 출산을 할 때 대변이 조금 흘러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이는 산도를 빠져 나올 때 얼굴이 산모 항문을 향한다. 그 결과 대변이 좀 묻는데 이를 통해 엄마의 장내미생물이 아기 입을 통해 아기 대장으로 흘러간다고. 이게 우연인지 아니면 장내미생물의 빠른 정착을 위한 진화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얘기다.

출산과 수유과정(젖꼭지 주변의 미생물)을 통해 멸균 상태인 아이에게 엄마의 미생물이 전해지면서 인간은 일찌감치 미생물과 공존을 시작한다. 그런데 과학이 지나치게 발달하다보니 적을 무찌른다고 항생제를 남용하게 됐고 결국 우리의 우군이 비틀거리는 틈을 타서 또 다른 적군이 활개를 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 분변세균요법이니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로 간다는 생각이 든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 kangsukki@gmail.com

저작권자 2012.11.1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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