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25일 화요일

총대표회 헌법수립에 기여

총대표회 헌법수립에 기여

안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을 목적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22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유영익 한동대학 석좌교수(한국 근현대사)는 ‘상하이/한성 임시정부의 건국 청사진과 대한민국 헌법’이라는 그의 4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 ⓒScience Times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과 비슷한 시기에 필라델피아에 총대표회 탄생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4월 14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총대표회‘로 약칭)가 개막되었다.

4월 16일까지 사흘간 진행된 이 대회에는 서재필과 이승만을 위시해 정한경•임병직. 조병옥 •장택상. 유일한, 김혜숙 등 해방 후 남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인사들이 다수 참가해 각종 결의안을 토의하고 채택한 다음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하고 또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 대회는 3•1운동 직후 미국에서 소집된 최초의 대규모 한인 정치집회로서 1919년 9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과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 및 정부 운영 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쳐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행사였다. 그럼에도 그 동안 학계에서 심도 있는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 명칭조차도 합의되지 않은 상태이다.

총대표회에 대한 연구 거의 안 이루어져
총대표회는 서재필과 이승만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그들은 정한경과 공동명의로 이 회의를 소집했고 3일간 회의를 주관함으로써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이들은 대회에 참가한 한인 애국지사들과 함께 3•1운동 후에 설립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할 것을 다짐하면서 앞으로 건설하려는 새 나라의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을 선도했다. 즉, 서재필과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신대한(新大韓)의 비전을 구상하고 제시한 것이다.

결국, 필라델피아 대회를 계기로 마련된 한민족의 미래 국가의 상(像)은 1948년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필라델피아 총대표회 결의안의 채택 과정과 그 내용을 분석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이념적 뿌리를 재발견하는 의미를 지닌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총대표회에서 언급된 일부 내용들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 건설론=서재필과 대회 참가자들은 3•1운동을 기해 유교(儒敎) 이념으로 이어온 조선 왕조(대한제국)의 유서 깊은 군주제 전통을 헌신짝 같이 버리고 그 대신 기독교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할 것을 다짐했다.

서재필은 3•1운동 이후 한국인이 벌이는 독립운동을 ‘조국의 독립과 기독교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운동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이 같은 생각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이승만은 4월 7일 ‘미국 연합통신(UP)의 어느 기자와 인터뷰할 때, “이번 독립운동에 우리의 목적은 동양에 처음으로 예수교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승만은 또 ‘필라델피아 총대표회 종지’를 소개하는 글에서 “그 요지는 우리나라를 회복한 뒤 정부를 미국 제도로 할 수 있는 대로 모본해 공화정치와 기독교 문명을 숭상하는 나라를 만들어 종교와 통상과 언론 등 모든 사회의 자유를 이루겠다는 뜻을 선고함”16)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이 뜻을 재천명했다. 정한경 역시 그가 기초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에서 이와 같은 취지를 밝히고 있었다.

미국식 공화제 정부 수립론=서재필을 위시한 대회 참가자들은 새로 수립될 신대한이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국일 것을 기대했다. 서재필과 그의 동지들은 신대한이라는 국가의 정체로서 선호했다는 사실은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직, 선포된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신국가의 정체로서 공화제를 표방했던 사실과 함께 한국 정치사상 획기적, 혁명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 총대표회에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공화제를 채택하겠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미국식’ 공화제(대통령중심제)를 특별히 강조했는데 이 점은 다른 임시정부들과 차별화된다.

정부수립 후 10년간 중앙집권 필요=서재필과 대회 참가자들은 3•1운동을 계기로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벗어나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 운영하기를 바랐지만, 일반 대중의 교육수준이 저급하고 그들의 민주주의적 자치경험이 부족한 점 등을 고려한 나머지 새로 수립될 대통령 중심의 공화제 정부는 건국 후 10년간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목표와 열망’의 제2조, 즉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를 세우기로 제의해 교육을 일치케 할지라. 앞으로 오는 10년 동안에는 필요한 경우를 따라서 권세를 정부로 더욱 집중하며 또 국민 교육 발전되고 자치의 경험이 증가할진대 그에 관리상 책임의 공권(公權)을 더욱 허락할 일”이라는 문구에 잘 요약되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서재필과 참가자들은 신정부가 수립된 다음 적어도 10년간 선의(善意)의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하고 그 기간에 국민교육을 북돋아 민중에게 민주주의 정치 훈련을 베푼 다음 민도(民度)의 향상 정도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민중의 참정권을 확대한다는 일종의 교도민주주의 내지 민주주의 훈정(訓政)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한경, 여섯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이승만

총대표회, 43년 헌법수립에 영향 끼쳐
서재필과 이승만은 구한말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지성인.정치가들이었다. 그들은 정한경과 함께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를 대한인국민회의 권위를 빌어 소집했다. 이 대회는 3.1운동을 기해 분출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공포하며 ‘만주 접경에 수립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를 지지를 선포함으로써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본격화시킬 목적으로 소집되었고 또 친(親)서재필, 이승만계 인사들의 단합대회의 성격을 띤 회합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대회에 참가한 대표들 가운데 다수가 해방 후 남한에서 이승만과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 과정과 제1공화국 행정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는 주요 인물들이었다. 나아가 이 대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던 다섯 개의 결의안들 가운데 제3항은 신대한의 건국 이념과 구체적인 통치 방법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이념이 실제로 1948년 대한민국 건국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물론, 서재필과 이승만 등의 정치 구상은 철저히 친미적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특수한 입장에서 한국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음속 깊이 한국을 사랑했던 한국계 미국인 내지 재미 한국 독립운동가로서 일찍이 조국에서 개혁운동을 펼쳤던 경험을 살리고 미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살면서 국제적 안목을 가지고 한국 문제를 심사 숙고한 끝에 짜낸 합리적 사고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정치 구상은 한국 독립에 관심이 있는 많은 국내외 지성인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지녔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재필.이승만과 비슷한 경력을 가진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창호•김규식•조소앙•신익희 등도 그들의 구상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공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서재필과 이승만 등 총대표회 참가자들의 신대한 건국 구상은 1919년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필라델피아 총대표회에서 채택된 결의안 가운데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에 내포된 미국식 공화제 채택 주장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안창호 등에게 수용되어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추진된 제1차 헌법개정에서 임시정부의 의원내각제 정부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데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등에 표출된 미국식 대통령중심제 선호 사상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 당시 제헌국회 의장직을 맡았던 이승만을 통해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총대표회 참가자들이 구상했던 신대한 건국 청사진 가운데 건국 후 10년간 훈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1948년 이후 이승만이 12년간 남한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함으로써 사실상 실현되었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12.24 ⓒ ScienceTimes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