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7일 월요일

독립협회, 한국 민주주의 시발점

독립협회, 한국 민주주의 시발점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 말까지 약 30개월간 존속했던 독립협회가 우리나라 근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비록 보수세력의 반대로 좌절됐지만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달사에서 금자탑과 같은 시민단체다.
▲ 유영익 한동대 석좌 교수 ⓒScience Times
이 단체를 통해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이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고 한국 역사상 최초로 의회설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면 외세 열강의 침입 속에서 한국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긍심을 고취하려고 했던 독립협회는 어떤 길을 걸었을까?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제고와 일반대중의 이해증진을 위해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가 15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유영익 한동대학 석좌교수는 ‘독립협회 개혁운동의 획기적인 의의’라는 주제로 그의 세 번째 강의를 시작했다.

독립협회, 한국의 대의민주주의 발전에 기여
독립협회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착실한 대학 교육을 받은 걸출한 인물인 서재필弼)과 윤치호가 이끌었던 단체이다. 그리고 독립협회가 시도했던 의회설립운동은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설립한 배재학당의 졸업생들이 깊이 관여했던 운동이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다. 이곳에 있는 장로교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홀렌백(John W. Hollenback) 장로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펜실베이니아주 윌키스 바레(Wilkes Barre)에 있는 해리 힐만고등학교(Harry Hillman Academy)에서 2년간 공부한 끝에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 학교 재학 중에 교장 집에 기거하면서 교장의 장인(은퇴한 법관)으로부터 미국역사, 서양철학,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 등에 관해 많이 배웠다. 홀렌백이 장차 선교사가 되겠다면 계속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했다. 다시 워싱턴 DC로 가서 미국 육군 의학도서관(Army Surgeon -General Library)의 동양 의학서적 담당 사서로 취직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현재의 조지 워싱턴 대학 야간부 대학을 거쳐 이 대학의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개인 병원을 개업했고 미국 여성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재혼했다. 31세가 되던 1895년에 갑신정변의 동지 박영효의 설득으로 조국에 돌아오게 된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은 1896년 4월의 일이다. 한글과 영문판으로 엮은 이 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이 신문을 통해 주권수호론, 천부인권설, 법치주의, 남녀평등, 기독교 옹호론 등을 조리 있고 명쾌하게 설파했다.

그는 서구 계몽사상의 민주주의 이념을 흡수하여 국민의 생명과 사유재산,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국민평등, 국민주권 국민참정권 사상 등을 주장하였다. 전형적인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독립신문 창간은 당시 내무대신으로 있던 유길준의 권고와 협조가 컸다. 서재필은 주로 박영효 지지자들과 손잡고 독립협회를 창립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1897년 11월 배재학당에서 열린 협성회 창립기념식에서 200여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여기에서 그는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일 수도 있다”라는 과격한 발언을 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정부는 12월 13일부터 미국공사관과 서재필 추방에 관한 교섭을 개시했다.
▲ 우리나라 개화의 선각자 서재필의 젊은 시절의 모습
서재필은 1895년 말부터 1898년 5월까지 약 2년 반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무엇보다 독립신문이라는 한글신문을 출판해 한국 대중에게 자유, 평등, 인권, 법치주의, 의회, 정당 등 서구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과 제도에 관련된 지식을 보급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또한 배재학당에 출강하여 강의와 토론회를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서구 문명과 민주주의 정치제도 등에 대해 가르치면서 장차 한국에서 대의 민주주의 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독립문을 건축함으로써 한국인의 마음속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려 하였다. 또한 독립관을 개축하여 그곳에서 통상회라는 이름의 토론회를 만들어 일반인들이 민주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교양과 토론방식 등을 터득하게 하였다.

1898년 3월 11일 그는 독립협회 회원들로 하여금 러시아의 절영도(絶影島) 조차요구에 반대하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명칭의 대중집회, 오늘날 ‘데모(시위)를 열도록 했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렇게 시작된 만민공동회는 그 후 독립협회 멤버들과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정부 압력단체로 발전하면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서재필을 이은 윤치호, 그러나 독립협회 종말을 고하고 말아
서재필이 1898년 4월에 제창한 의회설립운동은 독립협회의 제2대 회장 윤치호에 의해 실천에 옮겨졌다. 그는 갑신정변 실패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미국 감리교 단체가 세운 중서학원(中西學院 Anglo Chinese College)에 입학하여 영어로 영문학과 수학 등을 배우고 기독교 세례도 받았다.

그는 다시 미국으로 가 테네시주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Vanderbilt College)과 조지아주의 에모리 대학(Emory College)에 입학하여 영문학, 신학, 법제사, 정치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그 후 상하이의 모교로 돌아가 영문학과 교수로서 영어를 가르쳤으며 중국 여성과 결혼했다.

윤치호는 1898년 3월에 초대 회장 안경수가 수원 유수(留守)로, 그리고 초대 위원장 이완용이 전북 관찰사로 임명되어 지방에 내려간 뒤 독립협회의 회장대리 직을 맡으면서 협회의 실질적인 대표가 되었다. 이 때 그는 독립신문의 주필 직도 맡았다.

독립협회는 1898년 8월 28일 윤치호를 회장에 그리고 이상재를 부회장으로 선출하면서 명실상부한 정치단체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윤치호를 비롯한 독립협회 지도부는 박정양의 개혁주의 내각과 협력하여 민선의회(民選議會)를 설립, 국민참정권을 실현하려는 의회설립운동을 개시하였다.

국왕의 최고 자문기구인 중추원을 근대적 의회와 같은 기구로 개편 활용함으로써 대한제국을 대의제를 구비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 일부 급진파 인사들이 박영효와 서재필 복귀운동을 펼치면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박영효는 1895년 7월 대역죄 혐의로 외국으로 도피,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었으며 서재필 역시 고종의 눈 밖에 나 1898년 5월 추방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개혁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려 했던 독립협회의 종말은 대한제국의 종말로 이어졌다. 당시 고종황제와 보수 세력은 독립협회의 말살을 계획했다. 사진은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축하기념촬영에 들어간 일본군 장성들과 공사관 직원들의 모습.

독립협회 종말과 함께 대한제국도 종말을 고해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때까지 계속 광화문 앞이나 종로에서 데모를 하고 있던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킬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서울 주재 외국 공사들의 의견을 타진하였는데 대부분의 공사들은 순찰을 통해 해산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일본 특명전권공사 가토 마스오(加藤增雄)만은 “일본에서도 유신(維新)의 초기에 역시 군대로 민회(民會)를 압제한 일이 있다”고 대답함으로써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했다. 총칼을 사용하자는 것이다.

가토의 권고에 고무된 고종황제는 12월 22일부터 군대 동원을 개시하고 이어서 25일 조칙을 통해 그 동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범한 ‘죄목’ 11가지를 지적한 다음 경찰과 군부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탄압하라고 명하였다.

그는 조칙 말미에서 “처음에는 충군(忠君)한다, 애국한다 함에 좋았으나 끝에 가서는 패륜(悖倫)하고 난국(亂國)함에 의구지심이 생겼다”라고 독립협회를 비난했다. 이로써 1896년에 설립된 독립협회는 30개월 만에 해산되었고 독립협회가 시도한 모처럼의 의회설립운동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05년 11월 18일 고종황제와 그의 측근 대신들이 일본의 특파대사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위협에 꼼짝없이 굴복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데서 증명된 바와 같이 대한제국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립협회의 주역들은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을 이끌었던 개혁가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훨씬 더 유력한 입장에 서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종황제와 그를 에워싼 보수 정치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군대를 당해낼 만한 자체의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라는 애국단체를 파괴함으로써 자신과 대한제국의 묘혈(墓穴)을 판 셈이 돼버렸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2.12.1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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