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5일 화요일

다원(茶園)에 가면 여유와 위안이

다원(茶園)에 가면 여유와 위안이

녹차의 본고장 보성을 가다

 
지리산의 정기와 남해안의 따뜻한 바람을 맞으면서 비옥한 토양에서 자라난 녹차. 녹차는 2천여 년 동안 우리의 삶과 더불어 꾸준히 사랑 받아왔다. 때로는 아픈 사람의 치료제로, 수도자에게는 심신을 수련하는 수양차로, 선비에게는 한가한 마음의 여유를 갖는 한량차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근래에는 차의 여러 가지 기능성 물질이 과학적으로 밝혀짐에 따라 종합건강식품으로서의 역할도 중요시되고 있다. 단순히 음료를 넘어 여러 가지 식품에 첨가시켜 여러 종류의 제품으로 새롭게 나고 있다.
▲ 비가 막 갠 후의 보성다원의 겨울 모습. 멀리 산등성이에 걸린 옅은 안개구름이 계단식으로 된 녹차 밭과 주위의 커다란 삼나무들과 어우러지면서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다. 오후 5시 40분경에 촬영한 사진이다. ⓒ김형근

취재차 순천에 내려간 기자가 겨울의 녹차 밭을 감상하기 위해 보성으로 향한 것은 지난 2일 느지막한 오후 4시였다. 봄을 재촉하는 단비가 막 그친 그 시간, 차창으로 보이는 산과들의 모습에서 코끝에 감도는 상쾌한 공기와 더불어 봄의 내음을 맡을 수가 있었다.

보성녹차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이 길가에 쓰인 안내표시를 보면서 무작정 보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50여분 후 도착한 곳은 보성녹차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보성다원(寶城茶園)이었다. 이 다원은 주식회사 대한다업이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대한다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성다원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맑고 경쾌한 계곡물 소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곧 이어서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아름드리 삼나무들이 오솔길을 따라 방문객을 차 밭으로 인도한다. 아마 차 밭을 구경하기 앞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하라는 주문인 것 같다.

삼나무 오솔길은 너무나 반가웠다. 길이 한적하면서 예쁘거니와 고향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삼나무는 기자가 자란 서귀포에서는 숙대나무라고 부른다. 나무의 제주도 방언이 ‘낭’이라서 ‘숙대낭’이라는 말로 통한다.

바람이 거센 제주에서는 방풍림으로 주로 사용된다. 우선 키가 크고 옆 가지가 많아서, 특히 밀감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밭 둘레에 이 나무를 심는다. 북풍을 막기 위해 집 뒤뜰에도 많이 심는다. 아마 이곳 보성다원의 삼나무들도 그런 목적으로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3~4km에 걸쳐 5만 그루는 족히 될 것으로 보인다.

다원의 한 관계자는 작년에 태풍으로 수천 그루의 삼나무들이 쓰러졌다고 한다. 보성다원의 녹차 밭은 꽤나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다. 바람이 세차다. 그래서 주위에 이렇게 많은 삼나무들을 심었다.

보성다원의 녹차 밭은 좀 특이하다. 산을 계단식으로 깎아 만들었다. 경사가 심한 것이 마치 절벽을 깎아 만든 밭으로 착각할 정도다. 비가 갠 뒤 녹차 밭 꼭대기에는 자욱한 안개구름이 걸려 있었다. 희미한 석양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녹차 밭은 하나의 출렁이는 바다가 된다. 계단식으로 된 녹차 밭 나무들이 물결을 이루어 파도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그 밭 속의 방문객은 ‘녹해(綠海)’ 속에 흔들거리는 조각배가 된다.

백제 고찰들의 터에서 자생 차 발견돼
보성의 차는 백제 고찰 대원사와 벌교의 징광사 터에 자생하는 차를 보더라도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재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 토공조에서 보성의 작설차를 꼽고 있다. 이후 1741년의 보성군지에도 보성은 차가 으뜸이라는 기록이 있다.

가장 최근에 이어진 차 재배에 대한 기록은 1939년 일제강점기의 경성화학에 대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야산 30ha에 차 종자를 파종해 차를 재배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면서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한다. 1957년에 들어서 대한다업이 경성화학의 야산을 인수, 다시 녹차 재배에 나선다.

이어 1962년에는 본격적으로 차 가공에 나섰고 재배면적도 50ha로 확대했다. 이 사업에 동양홍차가 가세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보성의 차 농사는 당시 정부의 국산품 애용운동과 맞물려 성장했다. 그러나 어느 해 극심한 추위로 인해 생산량이 급속히 줄기도 하고 가짜 홍차와 저품질의 차로 인해 외면을 받기도 하였다.
▲ 초록으로 갈아 입었을 때의 보성다원의 모습. 위의 겨울 모습을 촬영한 위치와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촬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계절이나 날씨의 변화에 따라 색다른 느낌을 준다. ⓒ보성다원

추락된 녹차의 이미지를 되살리기 위해 차 가공 공장을 생산업체가 직접 운영하면서 좋은 제품으로 소비자를 만나게 하는 노력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노력이 알찬 결실을 맺어 명실공히 국내 최대의 녹차산지로 보성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보성다원이 위치한 인근 지역인 영천리 도강마을에서 차 재배를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계절의 여왕 5월이면 어김없이 나오는 사진이 있다. 바로 그 해의 첫 찻잎을 따는 풍경이다. 희뿌연 안개 속에 푸른 차 밭이 펼쳐지고 붉은 바구니를 옆에 낀 아낙들이 차를 따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사진동호회 회원들의 성지순례지
사진 동호회를 중심으로 녹차 밭의 풍경을 담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보성은 사진가들이 말하는 일명 '성지순례' 코스에 들어 있다. 보성의 차 밭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보성다원 제1농장은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입장료 3천원을 내고 들어가 낮은 산을 한 바퀴 돌고 오면 차 밭을 구경할 수 있을 뿐만 산림욕도 할 수 있다. 방풍림으로 심은 삼나무가 숲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일하는 모습을 담으려면 봇재를 넘어 18번 국도를 타고 영천리로 가야 한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넓게 펼쳐진 차 밭과 영천 저수지까지 어우러진 풍경을 담을 수 있다. 그러나 기자는 날이 어두워 이곳 방문을 접어야 했다.

원래 차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차의 메카인 중국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이야기한다. “평생 동안 매일 다른 차를 마셔도 죽을 때까지 모두 마셔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다양한 차는 일반적으로 찻잎의 형태, 산지, 품종, 채엽 시기, 건조방법, 가공방법 등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해서 분류한다. 한 가지 찻잎을 가지고서도 가공을 달리하면 색(色), 향(香), 미(味)에 확연한 차이점이 나타난다. 그리고 수확하는 시기에 따라서도 다르다.

녹차의 종류는 주로 잎을 따는 시기로 구분
커피는 잎이 아니라 열매로 만든다. 그러나 커피 애호가들도 커피를 선택할 때 원두의 품종과 원산지를 체크한다. 품종과 원산지에 따라 맛이 차이가 있으며, 차와 마찬가지로 수확시기나 가공법에서 차이가 난다. 녹차에 대해서만 설명해 보기로 하자. 우선 채엽의 시기를 기준으로 한 분류다.

화전차와 화후차: 24절기 가운데 차와 관계 있는 절기는 청명(淸明)과 곡우(穀雨)다. 청명 이전에 딴 차를 화전차(火前茶)라고 한다. 명전차(明前茶)라고도 한다. 청명과 곡우 사이에 딴 차는 화후차(火後茶)로 불린다. 명전차는 봄을 준비한 새순이기 때문에 맛과 향이 응축돼 있어 최고급 차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리적 위치상 생산하기가 어렵다. 보통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따서 만들어진다.

우전(雨前): 첫물차라고도 한다. 곡우(4월 20일, 봄비가 내려 땅과 곡식을 기름지게 하는 절기) 전에 찻잎을 수확해 만든 차다. 가장 고급스런 녹차로 한겨울 추위를 이긴 첫 찻잎을 직접 손으로 따서 만들며, 찻잎 양 옆에 아기 잎 두 장이 받쳐주는 모양이 특징이다. 어린 찻잎으로 만들어 차의 맛과 향이 은은하고 순하다. 생산과정이 복잡해 양이 극히 적고, 한정수량만 생산된다.

세작(細雀): 두물차라고도 한다. 곡우 이후에서 4월 말, 늦게는 입하(5월 5일) 전에 따서 만든 차다. 잎이 다 펴지지 않은 것만을 따서 만든 차로 찻잎이 조그마한 참새의 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소위 작설차라는 것이 바로 세작이다.

작설차를 두고 동의보감에서는 기(氣)를 내리게 하고, 뱃속의 오래된 음식을 소화시키며, 머리를 맑게 해주고 이뇨작용을 해 당뇨를 치료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 선호되는 녹차 종류다.

중작(中雀): 세물차라고 한다. 세작 수확 이후(입하부터) 5월 중순까지 채엽한 차로 품질은 대작보다 고급이고, 세작보다는 싼 편이다. 일반적으로 흔히 시중에서 볼 수 있는 녹차로 보면 된다. 창(처음에 돋는 움)과 기(피기 시작된 잎)가 모두 펴진 후에 잎을 1~2장 따서 만들며, 색과 맛이 넉넉하다.

첫 맛이 더 강하고 뒷맛이 떫어 세작이나 우전보다는 떨어지지만 녹차 고유의 색과 향을 즐길 수 있다. 차 빛깔이 맑고, 향이 은은하고 상쾌하며 비타민과 항산화 물질이 풍부하다. 품질이 떨어질지 모르나 녹차의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대작(大雀): 끝물차라고 한다. 중작 채엽 이후인 5월 하순~6월 초까지 따서 만든 차로 중작보다 더 굳은 잎을 따서 만든 다소 거친 차다.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차라고 할 수 있다. 탄닌이라는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약간 떫은맛이 느껴지지만 다양한 좋은 성분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다.
▲ 녹차는 오랫동안 아시안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우리나라는 이미 백제시대부터 녹차를 즐겨 마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옛 절터 근처에서 자생하는 차나무들이 발견되고 있다. ⓒmindbodygreen.com

이외에도 제조공정에 따라 덖음차와 증제차가 있다. ‘덖음’은 순수 우리말로 곡식이나 찻잎 등을 물이나 기름 없이 볶아서 익히는 것을 말한다. 증제차는 찐 것을 말한다. 하동녹차는 주로 덖음차이고, 보성차는 증제차다. 어떤 사람들은 다양한 맛을 내기 위해 두 차를 섞어 마시기도 한다.

어떤 차가 좋을까? 거기에는 별다른 규칙이 없다. 녹차에 아주 민감한 '애다가(愛茶家)'가 아닌 이상 차의 종류를 그렇게 가릴 필요가 없다. 비싼 차, 싼 차 가릴 것 없이 차의 진한 향을 다 느낄 수 있으며 성분도 꼭 같다. 느낌의 차이일 뿐이다.

초록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다원(茶園)에서 찍은 사진만으로도 위안을 찾을 수 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할 때 다원은 어떻게 변할까? 또 비가 올 때는 어떤 모습일까? 기자가 경험한 황량한 겨울 모습도 좋다.

다원은 차를 재배하는 단순한 농장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여유와 위안을 주는 곳이다. 봄이 되면 작은 사진기 하나 달랑 들고 정말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여름에는 계곡이 있어서 시원하다. 자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3.02.0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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