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세력, ‘친일파’가 아니다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 4대 사건이 있다. 갑신정변(1884), 갑오경장(1894~1896), 독립협회(1896~1898), 그리고 상해임시정부(1919~1945)로 우리의 현대사를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이러한 시대의 변혁기에 개혁을 주도했던 인사들의 정치적 지향성,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주역들이 추진했던 제도개혁들은 1948년에 탄생한 대한민국 헌법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우리의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인문학의 대중화와 진흥을 목적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아홉 번째 강좌가 1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올해 마지막 강좌다.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한국 근현대사)는 ‘대의 민주주의공화국 탄생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주제로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라는 내용을 갖고 첫 강의를 시작했다.
특히 이러한 시대의 변혁기에 개혁을 주도했던 인사들의 정치적 지향성, 그리고 이러한 사건의 주역들이 추진했던 제도개혁들은 1948년에 탄생한 대한민국 헌법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알아보는 일은 우리의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인문학의 대중화와 진흥을 목적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아홉 번째 강좌가 1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올해 마지막 강좌다.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한국 근현대사)는 ‘대의 민주주의공화국 탄생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주제로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라는 내용을 갖고 첫 강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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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인문강좌는 우리의 관심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인문학의 대중화와 진흥을 위해 마련되었다. 매주 토요일 3시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다. 사진은 유영익 한동대 명예교수가 강의하고 있는 모습 ⓒScience Times |
조선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다
지금으로부터 128년 전인 1884년 12월 4일에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한국 근대 역사에 있어서 무신, 다시 말해서 군대를 거느린 군인이 아니라 문신(文臣)이 주도한 최초의 유혈 쿠데타로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역사적 사건이다.
이 쿠데타는 애국심에 불타는 젊은 민족주의 관료들이 임오군란(1882) 이후 가중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에 반발하여 그 당시 집권하고 있던 청에 우호적인 민씨(閔氏) 족벌체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집권함으로써 조선의 자주독립을 확보하려는데 있었다.
또한 일본의 개화와 현대화에 앞장서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1868) 이후의 일본의 개혁정치를 본받아 구미(歐美) 지향의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조선을 아시아에서 일본과 대등한 문명국으로 발전시킬 목적으로 단행한 거사였다.
그렇지만 이 쿠데타는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성사시킨 군사 쿠데타와는 달리 쿠데타의 주인공들이 거사 성공에 필수요건인 자체의 무력을 구비하지 못했다. 주한 일본공사관의 군사적 지원에만 의존했다가 일본 공사가 결국 지원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거사 3일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三日天下’, 조선은 청의 식민지로 전락
‘三日天下’로 끝난 갑신정변은 그 후의 한국 역사 전개에 심대한 역효과를 초래했다. 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간섭정책을 일층 더 강화하여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9년간 조선을 청의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한국인의 독립과 개화노력을 억압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정부가 1880년대 초부터 추진했던 개화와 자강운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은 완전 독립을 이루지 못한 반독립 상태의 국가로 머물러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갑신정변 이후 청이 조선에서 펼친 보호국화 정치는 1905-194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자율적 근대화 운동을 좌절시킨 주 요인이 되었다.
우리는 한국 근대사에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갑신정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국 역사 발전에 아무런 긍정적 기여를 하지 못한, 말하자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해야 마땅한 것일까? ‘친일’이라는 감정을 씌워서 말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들은 1875년 전후에 형성된 개화당(開化黨, 일명 독립당)의 멤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핵심인물은 개화당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다섯 사람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을 간단히 요약해 보자.
조선 사회의 지배계급인 양반 가운데서도 세력이 큰 가문의 출신으로서 박영효를 제외하고 모두 과거문과에 합격한 수재들이었다. 평균 연령은 만 26세로 어떻게 보면 국정 운영에 필요한 행정 경험이 비교적 부족한 관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물정에 밝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주도
그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 개화에 일찌감치 눈을 뜬 박규수의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오경석, 유홍기, 이동인 등 양반대열에 오르지 못한 중인(中人)들과 불교 승려들이 중국과 일본에서 반입한 서양문물 소개서들을 입수하여 탐독하면서 서구세계의 근대적 문명에 대해 상당히 수준 높은 식견을 갖추었던 지식인들이었다.
또한 그들 대부분은 1880년대 초에 일본과 미국에 파견된 외교사절단과 제도시찰단의 일원, 또는 고문자격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화된 일본의 제도와 문물, 그리고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제도와 문물을 직접 시찰하고 조사한 경력을 가진 관료들이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세상물정을 잘 아는 아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김옥균은 주변인물들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글 잘하고 시문과 서화를 다 잘한 호탕했던 인물로 상당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비록 미국에 가본 일은 없지만 일본을 처음 방문할 때 배에서 황준헌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애독할 정도로 미국에 대해 호기심과 호감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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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당시 세상물정에 밝은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
그는 또한 요코하마에 있는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과 빈번히 교류하면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관한 책들을 빌려 읽고 그들에게 조선 선교의 문을 열어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역사가 부른 김옥균, 언더우드 토지 매입에 도움을 주기도
실제로 그는 1883년 여름에 서울을 방문한 일본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를 고종에게 소개함으로써 고종으로부터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설치하는 권한을 얻어내는데 일조했다.
1884년에는 한국에 파견된 최초의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가 서울 중심부에 토지를 매입하려 할 때 이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러한 친미(親美)적인 행동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1884년 10월 25일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전 서울 주재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에게 사자를 보내 개화당의 정변 계획을 미리 통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1884년 11월에 이르러 청•프 전쟁이 예상과 달리 청국에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일본정부의 대(對)한반도 정책에 변화가 일어났다. 청나라가 한반도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일본세력이 후퇴하게 된 것이다. 아예 손을 뗐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만약 청•프전쟁이 애당초 김옥균과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예상했던 대로 프랑스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청이 패전의 궁지에 몰렸더라면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성공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김옥균과 그의 일당을 경솔하고 무모한 모험가들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갑신정변은 조선왕조 건국 이래 처음으로 한국인이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에 대하여 독립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려 했던 애국적 거사로서 근대 한국 민족주의 발달사에 있어 획기적 의의가 있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주변 강대국의 침략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적개심을 고취시킨 점에서 정신사적으로 불멸의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독립운동을 논할 때 1905년 이후의 항일운동에 치중한 나머지 그에 선행하는 항청(抗淸)독립운동을 간과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종래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친일파’로 간주해 온 학계 일각의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물론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역들이 거사할 때 일본공사관의 무력 지원에 의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정부의 사주에 의해 정변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들은 거사 결정을 일본측과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했으며 그렇게 결정했다. 따라서 김옥균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은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기 보다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정치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용일파(用日派)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역사가 부른 김옥균, 언더우드 토지 매입에 도움을 주기도
실제로 그는 1883년 여름에 서울을 방문한 일본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 목사를 고종에게 소개함으로써 고종으로부터 기독교 학교와 병원을 설치하는 권한을 얻어내는데 일조했다.
1884년에는 한국에 파견된 최초의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목사가 서울 중심부에 토지를 매입하려 할 때 이 일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러한 친미(親美)적인 행동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1884년 10월 25일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전 서울 주재 미국 공사 푸트(Lucius H. Foote)에게 사자를 보내 개화당의 정변 계획을 미리 통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1884년 11월에 이르러 청•프 전쟁이 예상과 달리 청국에 유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일본정부의 대(對)한반도 정책에 변화가 일어났다. 청나라가 한반도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일본세력이 후퇴하게 된 것이다. 아예 손을 뗐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만약 청•프전쟁이 애당초 김옥균과 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예상했던 대로 프랑스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청이 패전의 궁지에 몰렸더라면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성공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때문에 김옥균과 그의 일당을 경솔하고 무모한 모험가들이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갑신정변은 조선왕조 건국 이래 처음으로 한국인이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에 대하여 독립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려 했던 애국적 거사로서 근대 한국 민족주의 발달사에 있어 획기적 의의가 있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주변 강대국의 침략주의에 대한 경계심과 적개심을 고취시킨 점에서 정신사적으로 불멸의 가치가 있다. 오늘날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이 독립운동을 논할 때 1905년 이후의 항일운동에 치중한 나머지 그에 선행하는 항청(抗淸)독립운동을 간과한 것은 잘못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종래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친일파’로 간주해 온 학계 일각의 견해는 재고되어야 한다. 물론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역들이 거사할 때 일본공사관의 무력 지원에 의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정부의 사주에 의해 정변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들은 거사 결정을 일본측과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했으며 그렇게 결정했다. 따라서 김옥균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은 일본에 이용당한 친일파라기 보다 일본을 이용하려 했던 정치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용일파(用日派)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자 2012.12.03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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