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27일 일요일

우연히 발견된 한센병균의 미스터리

우연히 발견된 한센병균의 미스터리

성체세포를 줄기세포 유사상태로 전환시켜

 
사이언스타임즈 라운지 월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벤허’는 아카데미상 11개 부문 수상과 함께 제작 기간 10년, 출연진 10만명 등의 전설적인 기록을 지니고 있다. 영화 중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단 15분간의 전차 경주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1만5천명이 4개월간 연습을 했을 정도로 명감독의 열정이 녹아 있는 명화 중의 명화이다.
▲ 영화 '벤허'의 한 장면
줄거리는 고대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벤허라는 유대 청년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그린 내용이다. 특히 한센병에 걸린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한센병자들이 모여 사는 골짜기에 수용되어 있다가 물어물어 찾아온 벤허를 만난 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일어난 기적으로 깨끗이 치유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성경에는 한센병을 진단하고 정결하게 하는 법을 소개해 놓은 레위기를 비롯해 많은 곳에서 한센병이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한센병은 하나님을 거역한 부정과 저주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중세 시대에는 한센병자들이 마녀에 버금가는 혹독한 학대를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경상도에서는 문둥이라는 말이 욕설로 통용되고 있을 만큼 옛날부터 한센병자들은 멸시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한센병 환자들이 보리밭에서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속설까지 널리 퍼져, 아무리 그악스러운 아이도 ‘문둥이가 잡아간다’는 한 마디면 울음을 뚝 그쳤다.

일제가 1916년부터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격리 수용한 소록도에서는 학대와 비인간적인 행위까지 행해지곤 했다. 환자들은 힘겨운 노역에 시달리면서 강제 불임수술까지 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문턱이 높아 방에 물을 가득 채워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물방이라는 독방에 환자들을 가둬 겨울에 얼어죽이기도 했다.

오늘날엔 그저 평범한 피부병일 뿐
한센병이 이처럼 천형(天刑) 취급을 받은 이유는 단 하나, 신경과 피부조직이 괴사해 피부와 근육, 뼈 등이 오그라들어 썩고 손발에 진물이 나는 등 심각하게 변형되는 외양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센병은 저주의 상징도 아니며 유전병도 아니다. 성적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 감염되지도 않으며, 전염성이 그리 높지 않아 격리가 필요한 질환도 아니다. 오늘날엔 발병하더라도 리팜피신 600㎎을 단 한 번만 복용하면 3일 이내 전염성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며, 병형에 따라 다르지만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치도 가능하다. 때문에 지금은 보통의 피부병으로 다루어진다.

그런데 최근 한센병균인 미코박테리움(Mycobacterium leprae)이 성체세포를 줄기세포 유사상태로 전환시킨 다음 서로 다른 유형의 세포로 성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우연히 밝혀져 주목을 끌고 있다. 이를 이용할 경우 새로운 줄기세포 요법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규 한센병자 발병이 한 해에 수 명에 그쳐 소멸단계에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매년 20여 만 명의 사람들이 한센병으로 진단받고 있다. 그런데 한센병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가 있다. 한센병균이 전신으로 퍼지는 과정과 신경을 광범위하게 손상시키는 이유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

한센병균은 사람 사이에서만 전염되는데, 아메리카에 서식하는 아르마딜로를 숙주로 이용해 사람에게 전염되기도 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한센병 환자나 아르마딜로, 유전자변형 마우스를 대상으로 한센병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한센병균이 줄기세포 유전자 활성화시켜
이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연구진은 한센병균이 슈반세포(Schwann cells)를 선호한다는 점에 착안, 마우스의 슈반세포를 분리해 한센병균에 감염시키는 실험을 했다. 그러자 슈반세포가 줄기세포 유사상태로 전환되어, 성숙한 슈반세포에서 발현되는 유전자가 불활성화되고 줄기세포에서 발현되는 유전자가 활성화된 것.

슈반세포란 말초신경계의 일부로서, 전선의 피복처럼 신경을 둘러싸 전기신호의 누출을 차단하는 세포이다.

이처럼 슈반세포의 역분화로 탄생한 줄기세포는 인체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한센병균이 무임승차해 줄기세포가 다른 세포와 통합될 때 한센병균을 감염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따라 연구진은 한센병균이 슈반세포의 가소성을 일깨운다는 결론을 내렸다. 가소성이란 세포가 미성숙 상태로 되돌아가 다른 유형의 세포로 전환되는 능력을 일컫는다. 건강한 슈반세포의 경우 신경이 손상된 후 손상된 신경을 복구․재생할 때 가소성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세균에 의해 가소성이 촉발된 사례가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진은 아직까지 한센병균이 슈반세포를 역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을 알아내지 못했지만, 앞으로 그 기작이 밝혀질 경우 한센병균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전에 이를 차단하는 등 한센병의 조기진단 및 치료법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연구진은 한센병균이 앞으로 실험실에서 성체세포를 줄기세포로 전환시키는 데도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같은 우연한 발견이 잊혀져가는 질병의 연구에 매달린 연구진에 내린 하늘의 보답이라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이성규 객원편집위원 | 2noel@paran.com

저작권자 2013.01.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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