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30일 수요일

‘동시발견’ 논쟁은 과학 발전의 상징

‘동시발견’ 논쟁은 과학 발전의 상징

다윈의 동시대 진화론자 월리스 재평가

 
과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는 동시발견이라는 것이 있다. 동시발명도 있다. 과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로 똑같은 이론을 거의 같은 시기에 여러 사람이 발견하거나,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경우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환경적인 여러 맥락에서 어떤 특정이론이 태동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그렇다.

이러한 경우 과거에도 마찬가지로 학술지에 먼저 내는 사람이 그 이론에 대한 우선권(priority)을 갖게 되고, 명예와 부를 얻는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우선권이 지적재산권, 특허권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더욱 중요한 문제로 더욱 부각되고 있다.

미적분에서 뉴턴과 라이프니치의 우선권 다툼
▲ 미적분법 발견의 우선권을 놓고 독일의 라이프니치와 영국의 뉴턴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위키피디아
동시발견의 대표적인 경우가 수학분야의 미적분이다. 이 미적분법은 뉴턴(1642~1727)과 라이프니치(1646~1716)에 의해 거의 동시에 발견되었다. 오늘날 수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 등의 기초과학은 물론 전자공학, 기계공학 등의 응용과학에서도 널리 쓰이는 중요한 이론이다. 현대과학의 기술문명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그러나 이론 발견의 우선권(priority)을 둘러싼 논쟁들 중 이처럼 격렬하고 오래 지속되었던 경우도 드물다. 사실 안을 들여다 보면 싸움에 불을 지르고, 서로 상대방이 도용했다고까지 주장하게 되는 것은 당사자들이 아니다. 주위의 추종자들 때문이었다.

뉴턴과 라이프니치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99년 라이프니치에게 적의를 품고 있던 스위스의 한 수학자가 라이프니치의 미적분은 뉴턴의 것을 도용한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논쟁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라이프니치는 이에 즉각 항의했다. 약간은 경솔하게도 1705년 뉴턴이야말로 자신의 것을 도용했다는 것을 은근히 비치는 내용의 글을 썼다. 그러자 다시 옥스포드 대학의 수학자 존 케일(John Keil 1671-1721)이 라이프니치야말로 비겁한 도용자라고 강경하게 비난하였다.

분개한 라이프니치는 왕립학회에 케일을 제소하였다. 학회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의 학회장이 뉴턴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상대로 학회는 1715년 “미적분의 최초 발견자는 뉴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논쟁은 이후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심지어 영국과 독일 양국의 국민감정까지 개입되면서 격렬하게 지속되었다. 당사자 두 사람이 다 죽은 지 한참을 지나서도 논쟁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오늘날에는 두 사람이 각각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견했다는 것으로 돼 있다. 발견은 뉴턴이 빨랐으나 발표는 라이프니치가 빨랐다는 것이 정설이다.

로그(log)의 발견도 그렇다. 네이피어(John Napier 1550~1617)와 뷔르기(Jobst 1552~1632)에 의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물리학 분야의 열역학 제1법칙으로 알려진 에너지보존의 원리는 1842년부터 1847년 사이에 무려 4명의 과학자들에 의해 각기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이어(Julius R. Mayer), 줄(James P. Joule 1818~1819), 콜딩(Ludvig A. Colding 1815~1888),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가 그들.

생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 이상 잊혀 있던 멘델(1822~1884)의 유전법칙 이론은 1900년 네덜란드의 더프리스(Hogp de Vries), 독일의 코렌스(Karl Correns 1864~1933),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Erich Tschermak 1871~1964) 등 세 명의 생물학자에 의해 다시 발견돼 발표됐다.

라이트 형제도 끈질긴 노력으로 ‘최초의 발명가’로 공인 받아
이론이라는 기초과학이 아니라 발명품이라는 응용과학의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비행기의 발명자로 라이트 형제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마터면 최초 발명자가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랭글리(Samuel P. Lanngley 1834~1906)로 잘못 기록될 뻔했다.

웨스턴 대학의 교수였던 랭글리는 스미소니언협회 회장을 지낼 정도로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약자의 편에 섰던 라이트 형제는 오랜 시간을 끈 진상 규명 노력 끝에 비로소 최초의 비행기 발명자로 공인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학문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에서 유전법칙만큼이나 획기적인 업적인 진화론은 역시 다윈의 몫이다. 그러나 거의 비슷한 이론이 같은 시기에 월리스(Alfred R. Wallace)에 의해서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승자는 다윈이었다. 월리스의 업적은 지난 150년 동안 묻혀졌다.

올해는 월리스 사후 100년이 되는 해다. 영국정부가 추모사업으로 파묻혔던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에 착수한 것은 그를 진화론의 동시발견자로 격상시키기 위한 일환이다. 또한 영국의 과학적 양심을 과시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진화론, 생명공학은 영국의 자존심
▲ 다윈과 동시대의 진화이론가인 월리스에 대한 재조명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진화론은 영국의 자존심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영국은 과학기술 모든 분야에서 앞서 있었다. 2차대전 전까지 영국은 독일과 더불어 세계 과학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대전 후 과학기술의 지배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유전공학을 포함해서 생물학은 여전히 영국이 우세하다. 복제연구도 그렇고 생명공학도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이러한 양상은 과학저널에서 나타난다. 세계 최고 권위의 과학학술지로 자주 인용되는 사이언스와 네이처는 미국과 영국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영원한 맞수이기도 하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심은 영웅을 만들어내는 과학스타 제조기의 역할을 하며 때로는 스타 과학자를 궁지로 내몰기도 한다.

지난 2005년 세계 최초로 인간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만든 황우석 교수를 세계적 과학자로 만든 것은 사이언스다. 그러나 황 교수 연구팀의 실험에 쓰인 난자 일부가 소속 연구원이 제공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윤리적 의혹을 제기해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발단이 돼 논문의 진위 여부 논란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든 것은 네이처다.

사이언스는 황 교수를 스타로 만들었으나 네이처는 그 스타를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황 교수의 거짓이 상당 부분 드러난 그 뒤에는 사이언스와 네이처라는 막강한 저널 간의 치열한 경쟁이 작용했다. 네이처는 적어도 생명과학 분야에서만큼은 결코 지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면 영국 정부가 재조명하려는 다윈과 동시대의 진화론자인 월리스는 어떤 인물일까? 다윈과 마찬가지로 자연사학자인 그는 토지측량과 건축에 종사하면서 동식물을 채집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웨일즈 출신으로 아버지 월리스는 13세기에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유명한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의 후손이다.

그는 아마존 강 유역과 말레이 군도에서 답사연구를 했으며 아시아에서 오스트리아에 걸쳐진 동물군의 단절현상이 나타나는 월리스 선(Wallace Line)을 발견하였다. 이 선은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사이를 가르는 일종의 가상의 선이다.

선의 서쪽에서는 아시아에 서식하는 동물만 발견되며, 동쪽에서는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의 동식물이 발견되는 등 상반되는 모습을 보인다. 세계의 동식물 분포 연구에 상당히 도움을 주는 자료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연구는 독자적으로 제안된 자연선택이론이다. 그는 동물의 경고색과 종(種)의 분리를 설명하는 월리스 효과(Wallace Effect) 등을 발달시켜 19세기 진화론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러한 동물 종의 분포와 지리학의 연관 연구에 대한 기여로 그는 ‘생물지리학(biogeography)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다윈도 그랬듯이 월리스도 진화의 개념을 맬더스의 ‘인구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변종(變種)이 본래의 형에서 나와 무한히 떨어져 나가는 경향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그리고 다윈의 연구가 심원함을 인정하고 진화론에 관한 책인 ‘다위니즘'을 1889년 출판하기도 했다.

다윈, 월리스 능력 인정해서 도움을 많이 줘
“다윈이 월리스의 생각을 훔쳤다”는 세간의 비난과 달리 그는 다윈과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윈도 그를 상당히 대단한 학자로 평가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인정 받지 못하는 월리스를 도왔다.

아마존 탐사를 마치고 월리스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 18개월 동안 보험금과 남은 물건들을 팔아 생활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아마존의 원숭이에 대해’ 등 여섯 편의 학술 논문과 ‘아마존 팜 나무의 활용’과 ‘아마존 여행’이라는 두 저서를 썼다. 이때 다윈 등 진화론이론가들을 만났다. 다윈은 학문적 차원에서 그의 가치를 인정했다.

월리스는 아마존에 이어 말레이 군도를 탐사했다. 그는 채집한 각종 신기한 식물과 곤충들을 팔아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철도와 광산에 투자한 것이 잘못되어 돈을 완전히 날렸다. 그러나 다윈의 경제적 도움으로 1872년부터 1876년 사이에 25편의 논문을 쓸 수 있었다. 또 1881년 다윈의 도움으로 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국가로부터 인정 받아 연간 200파운드의 연금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었다.

월리스는 1913년 11월 7일 올드 오챠드의 시골집에서 90세에 사망하였다. 뉴욕타임즈는 그를 "새로운 세기의 생각을 일깨운 진화와 혁명을 이룬 담대한 발견을 이룩한 다윈, 헉슬리, 스펜서, 이엘, 오웬과 함께한 지성인들의 집단에 소속한 마지막 거인이었다"라고 칭송했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3.01.30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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