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7일 목요일

연구실 나온 과학자… 무용실서 ‘얼씨구’

연구실 나온 과학자… 무용실서 ‘얼씨구’

매주 화요일마다 양반춤 삼매경

 
“자, 팔을 들고! 휘- 하며 저은 후, 가볍게 어깨를 드세요!”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4일,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체육관 2층에서는 우리 귀에 익숙한 전통가락이 새어나왔다. 매주 화요일마다 대전 출연연의 연구원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양반춤 강습이 한창이었던 것. 이날 강의에는 일이 바쁜 연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춤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가득 찬 대전 내 연구소 직원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대전 고유문화 담고 있죠”
저녁 6시 반. 해가 훌쩍 져버린 저녁 시간이지만 아직도 연구소 내 몇몇 연구실의 불은 환히 밝혀져 있었다. 이 가운데 바쁜 시간을 쪼개 ‘춤의 신세계’를 찾은 과학자들이 있었다. 이들 과학자들은 저마다 고된 업무로 지친 기색이 엿보였지만 수업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 정은혜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이 대전 내 시민과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양반춤을 지도하고 있다. ⓒScienceTimes

현재 대전에서는 대전 시민과 대덕특구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대전양반춤’ 수업이 진행 중 이다.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인 정은혜 충남대 교수가 직접 지도하는 이 춤은 이름 그대로 한밭 양반들의 기상과 능청 등 여러 가지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많은 대중들이 ‘왜 하필 양반춤인가’라고 궁금해 할 수 있지만 예부터 대전과 충청이 ‘양반’으로 유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의아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부터 ‘충천도 양반’이라는 말이 전해져 왔으며 유독 충청지역에서 ‘양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상호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정은혜 감독이 직접 창작한 춤은 ‘여자를 돌 같이 대하는 학구적인 선비가 미인을 얻는다’는, 간단하면서도 위트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우리 전통 춤사위와 만나며 흥을 더하고 있다. 특히 항상 학구열로 불을 지피는 대전 지역 연구원들과 춤 속 양반의 모습이 비슷하게 비춰진다며, 춤을 배우는 ‘학생’들은 연신 웃음을 이어갔다.

‘대전양반춤’은 과학인들의 창의력 향상과 과학과 예술의 만남으로 지역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기획된 창작물인 만큼, 독창성이 매우 눈에 띈다. 한국무용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을 주로 하는 정은혜 감독이 자신의 독창적인 무용관과 세계관을 담아 만든 작품이다.

이날 연구원들을 지도하던 정 감독은 “대전을 소재로 한 한국의 춤 콘텐츠가 없다고 생각해 이것을 만들게 됐다”며 “뿌리 있는 예술을 만들고 이것을 대전 연구원들과 함께 나누길 바라는 마음에 재능기부 차원에서 교육을 시작하게 됐다”고 전했다.

제발 ‘왜’ 냐고 묻지 마세요

예술과 가장 먼 거리에 있을 것만 같은 과학자들이 춤을 배운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는 의아한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매칭이 안 되는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과학자들이 다양한 예술활동을 취미생활로 즐기며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넘나들곤 한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연구를 주(主) 업으로 삼는 직업의식이 어디로 가진 않는 법. 정은혜 단장은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춤을 지도하며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왜’ 라고 말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한 손을 옆으로 쭉 내뻗는 동작 하나에도 ‘왜 그런 동작을 하느냐’는 질문이 나온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연구를 주로 하는 분들이다 보니 춤을 가르쳐드릴 때도 ‘왜’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합니다. 예술하는 사람은 가슴을 때리는 무언가를 느끼면 자연스럽게 팔이 뻗어나가게 되는데, 수업에 참여하는 연구원 분들은 이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하니 정말 어렵습니다. 천문연구원에 재직중인 한 박사님은 양반춤의 이론부터 알고 싶다고 합니다. 아마 과학자분들을 대상으로 춤을 가르치려면 무용학개론부터 개설해야 하는 건 아닌지 싶습니다. (웃음)”

사정이 이렇다보니 6개월 과정으로 계획한 양반춤의 진도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머리로 이해가 돼야 몸을 움직이는 과학자들과 함께하는 만큼, 본의 아니게 ‘이론’과 ‘실습’을 병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과학자분들이 정말 질문이 많으시다”라는 정은혜 감독의 말 한마디에 함께 있던 연구원 ‘학생’들은 계속해서 웃음을 터트렸다.

“춤, 어렵지만 매력적”

춤을 배우는 과정에서도 어쩔 수 없이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는 눈에 띄었다. 모두들 국내 과학계를 이끄는 뛰어난 인재들이지만, ‘과학’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몸 짓’만으로 거울 앞에 서니 박자는 계속 앞서가고 동작은 수학공식처럼 머릿속에서만 빙빙 맴돌 뿐인 듯 했다.

이처럼 아직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문가처럼 능숙한 춤사위를 선보이진 못하지만, 참여한 연구원들은 나름대로 장족의 발전을 했다며 스스로 감탄하기도 했다. 더불어 춤이 어렵지만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어서 매우 신선하다고 말했다.

표준연 광도센터의 조혜리 연구원은 “원래부터 무용을 좋아했지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다. 그런데 정은혜 교수님의 ‘양반춤’ 강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신청했다. 그동안 무용이 배우고 싶었던 나 자신에게 선물을 한다는 생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러시아에서 온 라이사 갈바쉬(Raisa Kharbash ․ LG화학연구원)는 “한국에 온 지 8년이 되었는데, 한국문화에 대해 계속 공부하고 싶었고, 양반춤을 접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의 전통춤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의 춤과 여러모로 달라 매우 흥미롭고 어떤 면에서는 다소 어렵기도 하지만, 정 교수님이 춤 동작을 알려 주면서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설명해주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된다”고 소감을 전했다.

표준연에서 진행되는 양반춤 수업은 과학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정은혜 감독은 “연구를 주로 하는 과학인들이 우리의 전통 춤을 배우며 새로운 융합의 역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대전양반춤 홍보위원인 박숙영 씨는 “결과와 성과를 중시 여겼던 과학분야에서 예술의 결합으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박숙영 홍보위원은 “최근 들어 과학에서도 창의연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전공분야를 넘어 새로운 분야를 받아들이고 융합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창의력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나오는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 등의 문화를 다양하게 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양반춤을 배우는 것은 이곳 과학자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함께 양반춤을 배운 연구원과 시민들은 오는 5월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대전시립무용단이 선보이는 ‘양반춤’ 공연에 함께 출연할 예정이다. 새로운 사고로 발상의 전환을 얻기 위한 과학자들의 순수한 도전은 지금도 계속 된다.


황정은 객원기자 | hjuun@naver.com

저작권자 2013.01.1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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