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8일 일요일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박민규(2)

한국 BEST SF작가 10인, 박민규(2)

대한민국 가장의 소외를 그리다

 
한국SF를 찾아서 단편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켰어요>와 <슬(膝)>은 대한민국이란 후기 산업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 쓰는 아버지들에 바치는 헌사다. 갈 때까지 가보는 박민규의 스타일답게 전자는 포복절도할 만치 희화적으로, 후자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처절하게 그려진다.

정통 과학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풍자우화에 가까운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켰어요>는 오십 줄에 들어선 초로의 자동차 세일즈맨이 한 없이 경쟁에서 밀리다보니 가장으로서의 부양책임을 다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화성에까지 가서 판촉 활동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자면 저승에 가서라도 물건을 팔 각오를 다져야 하는 것이 현대산업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나이든 가장들의 숙명이 아니겠느냐고 시사하는 듯하다.

황당할수록 더욱 아프게 와 닿는 풍자소설답게 화성 사회가 부동산개발 붐으로 떼돈을 벌어 흥청망청하면서 화성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 잉여 에너지를 소비성 문화에다 콸콸 쏟아 붓는 모습은 바로 우리 시대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화성인들은 자신들의 땅이 NASA에 수용되면서 받은 지구 화폐로 갑자기 돈방석에 올라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주체를 못한다. 돈벼락 맞아 골프장에서 노상 사는 남편 탓에 밤마다 외로운 화성인 거녀(소설의 편의상 이들의 몸은 7~8미터가 넘는다고 설정된다.)를 위해 주인공이 수입산 캐럿 세단을 몰고 그녀의 은밀한 굴로 들어가 마스터베이션 해주는 장면은 박민규식 풍자의 극한을 보여준다.
갑니다. 누님!
차창을 열고 나는 크게 소릴 지른다. 기어를 하단에 놓고 나는 슬금슬금 캐럿의 머리로 동굴의 입구를 비비기 시작한다. 전진과 후진... 전진과 후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봇물이 터져 나오며 그녀가 자신의 전부를 열기 시작한다...(중략)... 좌삼삼 우삼삼... 거대한 그녀의 몸이 지축을 흔들 듯 진동하는 느낌이었고 에밀레 소리가 울리는 사이사이 나는 또 사이드 미러를 접었다 폈다 질벽을 깐죽이는 재간을 부려 주었다.
---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켰어요.>, <더블>에 수록, 창비, 2010년, 217쪽

피로에 곤죽이 되었지만 화성 사모님의 친구들 몫까지 무려 세 장의 계약서를 챙긴 주인공이 안도하며 귀가하는 모습 앞에 돌을 던질 자 누가 있으리.

<슬(膝)>1)은 밑도 끝도 없이 시간을 훌쩍 점프하여 기원전 1만7천 년 전의 함경도 철산 지방의 원시인 가족을 비춘다. 박민규가 선사시대 소설을 쓰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필자가 이 작품을 과학소설로 규정하여 예서 논의하는 것은 결코 임의적인 잣대가 아니다.
▲ 기원전 1만7천년 경 한반도에 살았던 한 가장의 비애를 그린 박민규의 단편 <슬> ⓒefremov

과학소설의 관점에서 볼 때 일반 순문학 소설은 ‘연속성의 문학’(the Literature of Continuity)이다. 이러한 정의는 순문학 소설의 경우 어떤 상황을 그리든 우리의 일상 경험과 이어져 있고 등장인물들의 의사결정은 어디까지나 기존 경험이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유형의 소설이든 간에 등장인물들이 전혀 낯선 상황에 놓이거나 아니면 설령 아주 익숙한 상황이라 해도 이를 돌파하기 위해 이제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해결책을 들이미는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 어느새 과학소설 같은 느낌을 주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 과학소설 독자들은 즐겁게 빠져들지만 일반 순문학의 비평가들과 독자들은 감정이입이 어려운 딜레마에 빠진다.

과학소설 작가이자 SF 교육자인 제임스 건(James Gunn)의 표현을 빌리면, 이는 과학소설이 일반적으로 ‘단절의 문학’이란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변화와 단절의 순간을 다루는 문학은 과학소설만이 아니다. 역사의 분기점과 전환점을 극화하는 역사소설이야말로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장르다. 이리 보면 과학소설에서 역사소설적 요소를 대입하여 대체역사란 하위 장르를 만들어낸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사시대에 살던 인간들을 소재로 한 이야기 또한 통상 과학소설계에서는 과학소설 하위장르의 일종으로 포함시킨다.

각설하고, <슬(膝)>은 빙하기가 다가오는 가운데 굶주린 아내와 아이를 위해 고기를 구하러 나선 주인공 ‘우’가 눈 속에서 매머드와 대치하는 이야기다. 매머드 화석이 실제로 함경북도 길주군 일대에서 발견되었고 멸종 시기가 약 1만 년 전이라 하니 있을 법한 설정이다.

요는 무엇을 위해 이러한 플롯이 필요했느냐에 있다. 이 작품은 고고인류학과 고생물학의 관점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고생물학자 조지 G. 심슨(George G. Simpson)의 장편 과학소설 <샘 매그루더의 시간여행 The Dechronization of Sam Magruder; 1997년>과는 목적이 전혀 다르다는 얘기다.

박민규는 기원전 1만7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달라질 바 없는 가장(家長)의 책임과 사명감을 이야기한다. 복잡다단한 산업사회에서나 단순무식한 원시사회에서나 가장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에서 굶을 대로 굶어 체력이 저하된 주인공이 만난 상대라고는 병들고 나이든 퇴물이긴 하지만 산처럼 큰 매머드뿐.

적자생존의 법칙은 비정하다. 빈손으로 돌아가 봤자 자신은 물론이고 온가족이 아사(餓死)할 것은 불문가지이기에 주인공은 죽기 살기로 싸우지만 역부족이다. 작품제목인 슬(膝)은 무릎이란 뜻이다. 주인공은 매머드와 싸우다 패하고 오히려 발목만 심하게 다친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아예 무릎 아래를 끊어내 아내와 자식에게 자신의 살을 먹이려 절름대며 돌아간다.

이러한 결말부는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켰어요>의 주인공인 오십대 가장이 화성까지 가서 화성인 복부인의 거대한 동굴을 수입제 승용차로 애무하며 차를 한 대라도 팔려 몸부림치는 결말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더욱이 <슬(膝)>의 비장한 결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박함이 절절하여 그냥 원시시대 이야기인가보다 하고 넘겨들을 수가 없다.
1) 이 단편은 [문예중앙] 2010년 가을호에 처음 실렸다.

고장원 SF칼럼니스트 | sfko@naver.com

저작권자 2012.10.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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