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7일 토요일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당신은 초식남?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당신은 초식남?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2)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잠 못 드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불면증으로 진료를 받은 환자가 38만 명이 넘었고 최근 5년 동안 환자수가 연평균 16.7%씩 증가했다고 한다. 또 불면증 환자의 비율은 대체로 나이와 비례해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들 다 잘 때 잠못드는 것도 괴로운 일이다. 잠이 안 오면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더 좋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평균하면 사람은 생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불면증을 겪는 사람에게 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몸은 피곤해 녹초가 됐는데 잠은 안 오니 말이다.

불면증이 걱정인 건 잠을 못 잔다는 사실 자체뿐 아니라 잠을 제대로 못자면 다음날 활동에 지장을 주고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잠을 자는가?”에 대한 최근 연구결과들도 이런 불안에 한 몫 한다. 즉 잠은 뇌가 낮의 활동에서 얻은 정보를 정리해 기억을 구축하는 과정이라거나 산화 스트레스를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등 신경과학 분야의 해석이 유력하다. 잠이 부족하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신경세포 생성이 억제돼 뇌의 노화를 촉진한다는 얘기도 있다.

하루 20시간 자는 박쥐, 2시간 자는 말
필자 역시 잠에 대한 신경과학의 해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한 해설을 읽고 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잠 연구의 대가인(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 캘리포니아대(LA) 제롬 시겔 교수가 쓴 이 글은 원래 같은 호에 실린 아메리카메추라기도요 수컷의 행동에 대한 논문을 해설한 것이다. 짝짓기시기에 아메리카메추라기도요 수컷은 무려 3주 동안이가 잠을 자지 않은 채 암컷을 쫓아다니고 다른 수컷과 경쟁하면서 지냈는데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시겔 교수는 해설에서 정작 논문은 짧게 언급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잠 이론을 풀어놓는데 할애했다. 좀 지나치다 싶기도 했지만 그 이론이 워낙 흥미로워 나중에는 시겔 교수에서 이메일을 보내 2009년 ‘네이처 리뷰 신경과학’에 실은 논문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리뷰논문의 제목은 ‘Sleep viewed as a state of adaptive inactivity(적응 비활동성의 상태로 본 잠)’이다.

한마디로 말해 잠의 존재 이유를 기억 구축이나 신경세포 생성 같은 기능에서 찾는 게 아니라 생명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 즉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다.

예를 들어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에 비해 잠자는 시간이 훨씬 짧고 그나마 깊이 잠들지도 못한다. 사자는 하루에 평균 14시간을 잠자는데 비해 기린은 4시간, 말은 2시간에 불과하다. 가장 오래 자는 포유동물은 토끼박쥐(big brown bat)로 무려 20시간이다. 사람은 7~8시간으로 중간이다.
ⓒ강석기

시겔 교수는 잠의 신경과학 해석으로는 이런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잠이 충분한 박쥐는 똑똑하고 늘 수면부족인 말은 멍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생태학 관점에서 보면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쉽다. 먼저 잠을 자면 깨어있을 때 보다 에너지가 덜 든다. 실제 잠을 자면 몸 전체의 에너지 소모량이 줄어들고 특히 뇌의 경우 30%나 떨어진다. 반면 깨어있으면 특별한 일을 하건 안 하건 뇌의 에너지 소모량은 비슷하다. 시겔 교수가 잠을 ‘적응 비활동성 상태’라고 부르는 이유다.

먹이가 부족하고 위험이 상존하기 마련인 자연생태계에서 먹이를 찾거나 짝짓기를 할 때를 빼곤 안전한 곳에서 잠자는 게 종보존에는 최고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는 늘 사냥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자가 먹이를 잡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과 실패가 따른다. 따라서 어렵사리 사냥에 성공해 포식한 뒤에는 배가 꺼질 때까지 잠을 자면서 뒹구는 게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길이다.

그렇다고 모든 동물이 잠의 이점을 만끽할 수는 없다. 고기에 비해 에너지 밀도가 낮은 풀이나 잎을 먹는 초식동물은 먹이를 찾고 먹는 데 기본적으로 시간이 많이 든다. 또 탁 트인 사바나에 사는 초식동물은 언제 포식동물이 나타날지 모르므로 사자처럼 늘어져서 오래 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에너지는 좀 더 들지만 생존을 위해 짧은 시간 얕게 자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토끼박쥐가 하루 20시간 자는 것도 생태학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토끼박쥐는 모기와 나방을 먹고 사는데 이 곤충들은 해가 질 무렵부터 몇 시간 동안 활발하다. 따라서 토끼박쥐는 잠을 자다 이 무렵 깨 먹이사냥을 하고 은신처로 돌아와 다시 잠을 잔다. 만일 토끼박쥐가 더 오랜 시간 깨어있다면 에너지 낭비일 뿐 아니라 시각과 비행능력이 더 뛰어난 새에게 잡혀먹기 십상이다.

잡식동물인 사람이 하루 7~8시간 자게 된 것도 이런 생태학이나 진화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잠자는 시간이 짧아지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잠을 오래 자는데 신진대사가 활발하기 때문에 그만큼 에너지를 더 아끼기 위해서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대사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깨어 있을 때와 잘 때의 에너지 소비 차이가 줄어들어 잠 자는 시간이 줄어든다. 아마도 기억 구축과 면역력 회복 같은 기능은 인류의 뇌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잠에 부여된 이차적인 역할일 것이다.

시겔 교수는 종마다 잠자는 시간과 패턴이 큰 차이를 보일 뿐 아니라 같은 종 내에서도 개체에 따라 편차가 크다고 말한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수면 시간이 건강과 꼭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12시 이전에 자는 잠만이 보약인 것도 아니다. 나이, 성별, 체형이 비슷해도 잠자는 시간이나 잠이 부족했을 때 후유증 여부나 정도는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쉽게 수긍이 가능 설명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교과서적인 수면 지침을 ‘정상’으로 여기고 여기에서 벗어난 사람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그러면 불안해하며 예민해진다. 오늘 밤 왠지 정신이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는다면 ‘자야 되는데’라고 초조해 하지 말고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초식동물이었나봐….’
▲ 잠의 생태학. 비슷한 몸집일 경우 칼로리 밀도가 높은 먹이를 먹는 육식동물(+++)이 잡식동물(++)이나 초식동물(+)보다 잠자는 시간이 더 길다. 마찬가지로 잡식동물은 초식동물보다 더 오래 잔다. 위부터 아래로 땅다람쥐(왼쪽)과 데구(오른쪽), 고양이와 제넷, 토끼박쥐와 큰짧은코과일박쥐, 굴올빼미와 회색기러기의 잠자는 시간(total sleep)을 비교했다. ⓒ사이언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2012.10.26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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