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결과물이지 목표가 아니다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는 석학인문강좌가 20일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윤정로 KAIST 교수의 ‘사회 속의 과학기술’ 5번째 마지막 강연인 이번 강연은 학계 전문가들의 종합토론으로 마무리됐다.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사회로 이상욱 한양대 교수, 송성수 부산대 교수, 박혜경 충남대 강사가 토론에 참가했다. 다음주부터는 오병남 서울대학 명예교수(미학)가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라는 주제의 강의를 펼친다.
과학기술의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해 각기 다른 대응방식이 필요하다는 라베츠 등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대익 서울대 교수의 사회로 이상욱 한양대 교수, 송성수 부산대 교수, 박혜경 충남대 강사가 토론에 참가했다. 다음주부터는 오병남 서울대학 명예교수(미학)가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라는 주제의 강의를 펼친다.
과학기술의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해 각기 다른 대응방식이 필요하다는 라베츠 등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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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정로 KAIST 사회학 교수 ⓒScience Times |
최근 위험에 관한 논의에서 불확실성이 주목을 받고 있다. 보통 위험과 불확실성은 측정 가능한가의 여부에 따라 구분한다. 불확실성은 측정 불가능한 위험을 의미한다. 나는 위험과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방식이 달라야 하고, 위험을 더 세분화해 차별화된 대응방식을 강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라베츠(Jerome Ravetz)는 근대과학에는 ‘수상쩍은’(spurious) 확실성, 즉 모든 문제에는 정확하고 올바른 답이 존재한다는 데 대한 믿음이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며, 따라서 불확실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런 한계는 특히 오늘날 기후과학 같은 분야와 탈(脫)정상과학(post-normal science)의 상황에서 문제가 된다고 한다.
과학기술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기존 사회의 여러 제도적, 관습적 요인으로 실제로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보기 어려운 여러 사례가 있다. 또한 실제로 삶의 질이 높아진 경우에도 그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 예측을 틀리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미래에 대해 예측을 하고 나면, 미래의 모습을 원하는 방향이나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려고 인간이 노력하고 개입하기 때문에 결국 미래에 대한 예측이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바람직한 삶과 사회의 모습에 기초해 기술개발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관점에서 미래기술 요소를 예측하고자 시도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서 강연에서도 지적했듯이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충격이 반드시 기술 개발 주체들의 의도나 계획대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인정하지만,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근거로 기술 개발을 시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사회학은 과학제도의 사회학에서 과학지식의 사회학으로 변화돼 왔다. 과학지식에 집중된 관심은 과학제도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상 과학제도와 과학지식은 동시에 진화하는 성격이 있다.
과학제도와 과학지식은 동시에 진화한다는, 즉 공진화(co-evolution) 관점에 동의한다. 과학제도를 어떤 입장에서 분석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당연한 구조기능주의와 사회구성주의의 관점이 동시에 고려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을 다수의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멀티 패러다임(multi-paradigm)의 학문이라고 규정하기도 하고, 또 멀티 패러다임이라는 것 자체가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 개념에 의하면 논리적 모순이며, 따라서 사회학은 아직 패러다임의 정립 이전 단계에 있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사회학에서 다양한 관점이 공존하고, 연구자가 다양한 관점에 감수성을 갖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이론의 독창성과 장점을 인정해야 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이론이 기존 이론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고, 또 기존 이론도 계속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오래된 고전의 독해와 해석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과 과학기술에서 종종 논의되고 있는 것이 여성 과학기술인에 대한 채용목표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남성을 역차별하는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과학기술인에 대한 채용목표제는 매우 제한적으로 실시됐다. 민간부문은 제외되고, 정부출연연구소를 비롯한 공공 부문에서만 진행됐다. 2008년 기준으로 연구개발 인력 중 여성의 비율이 민간 기업에서는 10% 미만, 정부출연연구소에서는 20% 미만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 연구개발 인력 중 여성의 비율은 OECD 국가 최하위 수준이다.
여성 과학기술인에 대한 적극적 조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 과학기술인력을 발굴, 육성, 활용하는 것이 사회 전체를 위해서 바람직하고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과학기술이 국가경쟁력을 위해 점점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의 새로운 공급원으로서 여성의 중요성이 부각됐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윤리, 법, 사회적 함축으로 정의되는 ELSI 연구가 우리나라 지성계의 프론티어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ELSI 연구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통제를 위한 첫걸음으로 보여진다. 앞으로 이런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당면하게 될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말해 달라.
ELSI연구를 추진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커다란 보람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다양한 관점과 접근방식에 접하고, 분야별 다양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또한 저와 함께 연구한 전문가들이 여러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제가 책임을 맡았던 프로젝트 참여 경험이 참고가 되는 것 같다.
동시에 ELSI 프로젝트가 여러 분야에서 참여하는 학제간 연구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분야 간의 긴장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ELSI 연구에 전념하는 연구자 확대에 어려움이 있으며, 이에 따라 연구의 수준 향상에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ELSI 연구에 필요한 정도의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나 열의를 갖춘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전문가는 매우 희소했다. 소위 “두 문화”의 장벽도 실감했다. ELSI 연구에 대해서 자연과학자들은 구체적 효용이 있는 성과를 원하는 반면 인문사회과학자들은 포괄적, 추상적 지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어려웠던 점은 과학자와 인문사회 연구자 사이의 소통이 활성화되지 못하다 보니, ELSI 연구의 성과에 대해서 반향이 없다는 것이었다. 윤리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논의에 대해 무관심 또는 무시하는 과학자들의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과학자들이 지성인으로 존경 받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에 대한 발표가 최근에 있었다. 매년 이런 발표가 있을 때마다, 국내의 주요 언론들은 한 목소리로 수상자를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질타한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지원은 1980년대에 시작돼, 아직 30년도 채 안 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더구나 기초과학연구에 대한 지원은 역사도 더 짧고 규모도 미약하다. 노벨상이 수여되는 기초과학 또는 기초연구 분야는 전통이 중요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요구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경제성장을 했다. 그러나 기초과학 분야의 업적과 인정은 훨씬 더 오랜 시간과 많은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성과가 신속하고 간단히 드러나지 않는 투자를 요구한다.
나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까지 더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급한 기대에 성급하게 부응하려다 보면 황우석 사태와 같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우리나라 과학의 발전을 오히려 가로막게 된다.
어떤 노래 가사에 나오는 “노벨상을 탈래요”와 같은 자세는 노벨상 수상자 배출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기본에 충실하고 지적 호기심을 좇아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그 결과로 노벨상을 타는 것이지 노벨상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인내가 필요하다.
내가 아는 바로는 라베츠(Jerome Ravetz)는 근대과학에는 ‘수상쩍은’(spurious) 확실성, 즉 모든 문제에는 정확하고 올바른 답이 존재한다는 데 대한 믿음이 뿌리 깊게 박혀 있으며, 따라서 불확실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런 한계는 특히 오늘날 기후과학 같은 분야와 탈(脫)정상과학(post-normal science)의 상황에서 문제가 된다고 한다.
과학기술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기존 사회의 여러 제도적, 관습적 요인으로 실제로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보기 어려운 여러 사례가 있다. 또한 실제로 삶의 질이 높아진 경우에도 그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 예측을 틀리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다. 미래에 대해 예측을 하고 나면, 미래의 모습을 원하는 방향이나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려고 인간이 노력하고 개입하기 때문에 결국 미래에 대한 예측이 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바람직한 삶과 사회의 모습에 기초해 기술개발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관점에서 미래기술 요소를 예측하고자 시도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앞서 강연에서도 지적했듯이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충격이 반드시 기술 개발 주체들의 의도나 계획대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인정하지만,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근거로 기술 개발을 시도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과학사회학은 과학제도의 사회학에서 과학지식의 사회학으로 변화돼 왔다. 과학지식에 집중된 관심은 과학제도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실상 과학제도와 과학지식은 동시에 진화하는 성격이 있다.
과학제도와 과학지식은 동시에 진화한다는, 즉 공진화(co-evolution) 관점에 동의한다. 과학제도를 어떤 입장에서 분석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당연한 구조기능주의와 사회구성주의의 관점이 동시에 고려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을 다수의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멀티 패러다임(multi-paradigm)의 학문이라고 규정하기도 하고, 또 멀티 패러다임이라는 것 자체가 쿤(Thomas Kuhn)의 패러다임 개념에 의하면 논리적 모순이며, 따라서 사회학은 아직 패러다임의 정립 이전 단계에 있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사회학에서 다양한 관점이 공존하고, 연구자가 다양한 관점에 감수성을 갖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이론의 독창성과 장점을 인정해야 되지만, 동시에 새로운 이론이 기존 이론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고, 또 기존 이론도 계속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오래된 고전의 독해와 해석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과 과학기술에서 종종 논의되고 있는 것이 여성 과학기술인에 대한 채용목표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남성을 역차별하는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 과학기술인에 대한 채용목표제는 매우 제한적으로 실시됐다. 민간부문은 제외되고, 정부출연연구소를 비롯한 공공 부문에서만 진행됐다. 2008년 기준으로 연구개발 인력 중 여성의 비율이 민간 기업에서는 10% 미만, 정부출연연구소에서는 20% 미만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 연구개발 인력 중 여성의 비율은 OECD 국가 최하위 수준이다.
여성 과학기술인에 대한 적극적 조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 과학기술인력을 발굴, 육성, 활용하는 것이 사회 전체를 위해서 바람직하고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과학기술이 국가경쟁력을 위해 점점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의 새로운 공급원으로서 여성의 중요성이 부각됐다고 생각한다.
과학의 윤리, 법, 사회적 함축으로 정의되는 ELSI 연구가 우리나라 지성계의 프론티어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ELSI 연구는 과학기술의 사회적 통제를 위한 첫걸음으로 보여진다. 앞으로 이런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당면하게 될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말해 달라.
ELSI연구를 추진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커다란 보람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동으로 작업하면서 다양한 관점과 접근방식에 접하고, 분야별 다양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또한 저와 함께 연구한 전문가들이 여러 중요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제가 책임을 맡았던 프로젝트 참여 경험이 참고가 되는 것 같다.
동시에 ELSI 프로젝트가 여러 분야에서 참여하는 학제간 연구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분야 간의 긴장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ELSI 연구에 전념하는 연구자 확대에 어려움이 있으며, 이에 따라 연구의 수준 향상에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ELSI 연구에 필요한 정도의 생명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나 열의를 갖춘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전문가는 매우 희소했다. 소위 “두 문화”의 장벽도 실감했다. ELSI 연구에 대해서 자연과학자들은 구체적 효용이 있는 성과를 원하는 반면 인문사회과학자들은 포괄적, 추상적 지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어려웠던 점은 과학자와 인문사회 연구자 사이의 소통이 활성화되지 못하다 보니, ELSI 연구의 성과에 대해서 반향이 없다는 것이었다. 윤리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논의에 대해 무관심 또는 무시하는 과학자들의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과학자들이 지성인으로 존경 받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에 대한 발표가 최근에 있었다. 매년 이런 발표가 있을 때마다, 국내의 주요 언론들은 한 목소리로 수상자를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질타한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연구’에 대한 지원은 1980년대에 시작돼, 아직 30년도 채 안 된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더구나 기초과학연구에 대한 지원은 역사도 더 짧고 규모도 미약하다. 노벨상이 수여되는 기초과학 또는 기초연구 분야는 전통이 중요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요구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역사상 거의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경제성장을 했다. 그러나 기초과학 분야의 업적과 인정은 훨씬 더 오랜 시간과 많은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성과가 신속하고 간단히 드러나지 않는 투자를 요구한다.
나는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기까지 더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급한 기대에 성급하게 부응하려다 보면 황우석 사태와 같이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우리나라 과학의 발전을 오히려 가로막게 된다.
어떤 노래 가사에 나오는 “노벨상을 탈래요”와 같은 자세는 노벨상 수상자 배출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기본에 충실하고 지적 호기심을 좇아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그 결과로 노벨상을 타는 것이지 노벨상이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인내가 필요하다.
저작권자 2012.10.22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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