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0일 토요일

아스피린이 항암제?

아스피린이 항암제?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1)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등목 좀 해줘라.”
지난 늦여름 어느 날. 필자는 아버지 등목을 해드리려다가 깜짝 놀랐다.
“팬티에 피가 묻었는데요?”
“좀 전에 주사를 맞아서…”
“금방 지혈이 안 됐나봐요.”
“고혈압약을 먹어서 그런가보다.”
“어떤 약인데요?”

매일 아침 아버지가 드시는 고혈압약을 확인해보니 두 종류 가운데 하나가 해열진통제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이 심혈관질환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보니 신기하다. 고혈압약으로 쓰이는 아스피린 알약은 크기가 훨씬 작은데 100밀리그램짜리로 해열진통제 500밀리그램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해열진통제 아스피린이 심혈관계에도 듣는 건 피가 응고되는 걸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가 약한 사람이 아스피린 복용하면 위벽에서 출혈이 일어난다. 원래는 부작용인 현상이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약효가 된 셈이다. 그런데 최근 아스피린이 ‘저렴하면서도 꽤 효과적인’ 항암제라는 주장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한 알에 100원인 서민의 약 아스피린은 실로 만병통치약일까.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약
1899년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은 연구원 펠릭스 호프만이 합성한 약을 ‘아스피린’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아스피린은 20세기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약이다. 당시 호프만의 아버지는 류마티스관절염 때문에 살리실산나트륨을 복용했는데 위출혈이 심해 아들에게 부작용이 적은 신약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던 것. 호프만은 살리실산에 아세틸기를 붙인 분자를 합성했는데 살리실산나트륨보다 부작용이 적었다. 바이엘은 아세틸살리실산을 아세틸(acetyl)의 ‘a’와 살리실산의 고(古)독일어 Spirsaure의 ‘spir’을 붙여 아스피린(aspirin)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 아스피린의 분자구조. 약물 가운데서도 가장 단순하고 합성하기 쉬운 화합물이라 가격이 무척 저렴하다. ⓒ강석기

아스피린은 탁월한 해열진통제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놀랍게도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이 약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약효를 내는지를 몰랐다. 1960년대가 돼서야 약효 메커니즘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1971년 마침내 규명됐다. 이 업적으로 영국의 약학자 존 베인은 198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아스피린은 지질에서 기원하는 아라키톤산을 프로스타글란딘으로 바꾸는 효소인 COX-2의 작용을 방해한다. 프로스타글란딘은 종류가 많고 작용도 다양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염증반응이다. 아스피린 작용으로 변형된 COX-2는 항염증 작용이 있는 리폭신이라는 물질을 만들기 때문에 약효를 낸다.

한편 아스피린은 COX-2와 비슷한 효소인 COX-1의 작용도 방해한다. COX-1은 아라키돈산을 트롬복산으로 바꾸는 효소로 트롬복산은 혈소판 응집에 관여하는 물질이다. 아스피린을 먹으면 피가 잘 안 굳는 이유다. 따라서 저용량 아스피린을 장기간 복용할 경우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잇달았고 현재 임상적으로 처방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특히 대장암 예방에 효과 있어
과학저널 ‘사이언스’ 9월 21일자는 ‘질병 예방’을 특집으로 다뤘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하루 아스피린 한 알이 암을 예방할까?(Will an aspirin a day keep cancer away?)’란 제목의 기사인데 무척 흥미롭다. 만성두통 완화나 심혈관질환 예방을 위해 장기간 저용량 아스피린을 복용한 사람들을 추적한 연구에서 뜻밖에 암 예방과 억제 효과를 발견했다. 즉 대장암에 걸릴 확률이 40% 정도 낮다거나 암환자인 경우 5년 내 사망률이 37%나 낮았다는 연구결과들이 여럿 나왔다.

아스피린과 심혈관질환의 관계를 연구하던 영국 옥스퍼드대의 피터 로스웰 박사는 예상치 못한 자신의 연구결과에 감명을 받아 심혈관질환에 걸릴 위험성이 없음에도 매일 아스피린을 먹기 시작했다고. 아무튼 아스피린의 암예방 효과나 항암제로서의 작용에 깊은 인상을 받은 연구자들은 아스피린이 ‘최초의 범용 항암제’라며 암 예방과 치료를 위해 아스피린 복용을 적극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런던대의 잭 쿠직 교수는 “50세 전후에 시작해 내부 출혈 위험성이 커지는 70세까지 저용량 아스피린을 매일 복용하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암 예방을 위해 아스피린을 장기 복용하라고 추천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많다.

그렇다면 아스피린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런 약효를 내는 걸까. 예전 아스피린이 어떻게 해열진통제로 작용하는지 몰랐을 때와 상황은 비슷하다. 다만 그럴듯한 가설이 여럿 나와 있는 상태다. 먼저 가장 유력한 가설은 COX-2를 방해하는 아스피린의 항염증 작용이 암 발생을 억제한다는 것. 즉 몸속에 생긴 미세한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염증이 암이 자라는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스피린을 장복하면 이럴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말이다. 실제 암조직에서 COX-2가 많이 존재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 해열진통제 아스피린은 용량을 5분의 1로 줄여 심혈관질환 예방약(상품명 아스피린 프로텍트)으로도 쓰이고 있다. 최근 아스피린이 암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가 이어지면서 ‘범용 항암제’의 지위에까지 오를 태세다. ⓒ강석기

아스피린이 NF-κB라는 단백질의 생성을 방해해 암예방 효과를 낸다는 가설도 있다. NF-κB는 세포수를 늘리고 세포의 수명을 길게 하는 작용을 하는데 암세포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또 다른 가설로는 아스피린이 COX-1을 억제해 혈소판이 뭉치는 걸 막음으로써 면역계가 혈관을 타고 이동하는 암세포를 쉽게 찾아내 없애는데 도움을 준다는 해석도 있다.

대학교 신입생들이 2시간짜리 일반화학 실험시간에 만들어볼 정도로 간단한 분자인 아스피린(화학식 C9H8O4). 이런 단순하고 저렴한 아스피린이 현대인을 괴롭히는 양대 질병인 심혈관계 질환과 암 모두에 효과가 있다니 참으로 미스터리한 일이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 kangsukki@gmail.com

저작권자 2012.10.1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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