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관점에서 미술이란?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미술론, 또는 미학은 오늘날 대학에서 인문학의 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미술을 하나의 학문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미술론이라는 교과는 르네상스 이후에 탄생했다. 미술론이라는 말과 체제 자체가 없었다. 왜냐하면 조각을 포함한 회화가 지적 활동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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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병남 서울대 명예 교수 ⓒScience Times |
따라서 미술론은 철학적 논의 속에서 다루어질 수 없는 인간의 활동, 또는 소산으로 간주됐다. 만약 미술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있었다면 그것은 부정적인 시각에서 다뤄졌다. 미술에 대한 이 같은 부정적인 태도에서 긍정적인 태도로 변한 것은 철학적 사고의 축이 신에서 인간으로 이동되기 시작한 르네상스시대 이후부터다.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여덟 번째 강좌가 27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인문학의 대중화와 진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미학)는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라는 주제로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이라는 내용을 갖고 첫 강의를 시작했다.
미술이 이론으로 자리 잡은 것은 르네상스 이후
오늘날 우리는 회화, 조각, 건축을 묶어 미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미술가, 미술작품, 미술 감상이라는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한 용어들은 미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생각(관념)을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미술론이란 이러한 미술의 개념을 정확히 정의하는 일로부터 출발해 전개되는 관련된 많은 개념들의 고리다. 달리 말해, 미술론은 개념들의 체계다. 이 같은 철학적 작업이 미학의 한 분야인 미술론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학으로서의 미술론은 사실(fact)로서의 예술작품을 설명하는 미술사의 연구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미술사학은 이미 그 속에 미술에 대한 개념을 전제로 하고 진행되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미술사가들은 모두가 미학자들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미술과 함께 시와 음악 역시 미를 추구하는 활동이라는 사고를 발전시켜 예술(fine arts)이라는 말과 그 근대적 체제와 개념을 확립한 것이 18세기 서구의 근대인들이다. 그러한 점에서 예술은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술론에서 말하는 미술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화, 조각, 건축 등의 활동이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달리 말해, 미술을 미술이게 하는 공통적 본질은 무엇인가의 문제다.
대상을 모방하는 하나의 기술로 생각
대답은 간단하다. 미술이라는 한자어에서 드러나듯이 미술은 아름다움(beauty)와 기술(art)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것은 회화, 조각, 건축이라는 기술이 다른 활동과는 달리 미를 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화가나 조각가는 제작활동을 하는 기술자였다. 미술에 대한 그의 관점은 회화나 조각은 제작기술이기는 하되 모방(imitation)이라는 제작기술이다. 그가 회화를 이처럼 모방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의 형이상학의 입장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미술이란 철학적인 관점과는 거리가 먼 현실모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으로 부정적인 접근이었다.
한 마디로 회화나 조각은 플라톤이 말하는 형이상학적 차원과는 동떨어진 2중의 모방이었다. 따라서 미술은 이념을 파악하거나 직관하는 이론적 활동이 아니었다. 철학적으로 볼 때는 무의미한 활동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현상이란 이념의 소산이며, 그 현상을 다시 모방하는 것이 미술이었다. 그래서 미술은 2번의 모방과정을 통해 양산된 것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에도 회화나 조각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대상을 정확히 그려내는 사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창의적인 활동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화가나 조각가를 단순 노동자로 규정
교육과학기술부가 후원하고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여덟 번째 강좌가 27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인문학의 대중화와 진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오병남 서울대 명예교수(미학)는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 강의’라는 주제로 ‘인문학으로서의 미술론’이라는 내용을 갖고 첫 강의를 시작했다.
미술이 이론으로 자리 잡은 것은 르네상스 이후
오늘날 우리는 회화, 조각, 건축을 묶어 미술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미술가, 미술작품, 미술 감상이라는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한 용어들은 미술이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생각(관념)을 갖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미술론이란 이러한 미술의 개념을 정확히 정의하는 일로부터 출발해 전개되는 관련된 많은 개념들의 고리다. 달리 말해, 미술론은 개념들의 체계다. 이 같은 철학적 작업이 미학의 한 분야인 미술론이다.
이러한 점에서 미학으로서의 미술론은 사실(fact)로서의 예술작품을 설명하는 미술사의 연구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미술사학은 이미 그 속에 미술에 대한 개념을 전제로 하고 진행되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점에서 미술사가들은 모두가 미학자들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미술과 함께 시와 음악 역시 미를 추구하는 활동이라는 사고를 발전시켜 예술(fine arts)이라는 말과 그 근대적 체제와 개념을 확립한 것이 18세기 서구의 근대인들이다. 그러한 점에서 예술은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술론에서 말하는 미술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화, 조각, 건축 등의 활동이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달리 말해, 미술을 미술이게 하는 공통적 본질은 무엇인가의 문제다.
대상을 모방하는 하나의 기술로 생각
대답은 간단하다. 미술이라는 한자어에서 드러나듯이 미술은 아름다움(beauty)와 기술(art)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다. 그것은 회화, 조각, 건축이라는 기술이 다른 활동과는 달리 미를 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화가나 조각가는 제작활동을 하는 기술자였다. 미술에 대한 그의 관점은 회화나 조각은 제작기술이기는 하되 모방(imitation)이라는 제작기술이다. 그가 회화를 이처럼 모방의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의 형이상학의 입장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미술이란 철학적인 관점과는 거리가 먼 현실모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으로 부정적인 접근이었다.
한 마디로 회화나 조각은 플라톤이 말하는 형이상학적 차원과는 동떨어진 2중의 모방이었다. 따라서 미술은 이념을 파악하거나 직관하는 이론적 활동이 아니었다. 철학적으로 볼 때는 무의미한 활동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현상이란 이념의 소산이며, 그 현상을 다시 모방하는 것이 미술이었다. 그래서 미술은 2번의 모방과정을 통해 양산된 것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에도 회화나 조각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대상을 정확히 그려내는 사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창의적인 활동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화가나 조각가를 단순 노동자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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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플라톤은 화가나 조각가를 철학적 사변이 전혀 없는 단순 노동자로 생각했다. ⓒ위키피디아 |
플라톤에게 있어서 회화나 조각은 이념을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정신, 곧 이성적인 마음의 활동이 아니었다. 그 같은 사정은 화가나 조각가의 사회적 지위와 직결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귀족주의와 신체를 천시하는 철학적 입장 때문이었다. 화가나 조각가는 신분이 낮은 노동자 계층의 신체적 기술자에 불과했다.
화가나 조각가는 철학적 사변이나 이념은 전혀 없고 단지 손을 놀려 노동을 하는 숙련된 직인(banausos 職人) 에 지나지 않았다. 플라톤은 미술을 하는 사람을 천박한 노동자 계급의 한 부류로 생각했다.
형이상학의 특징은 이원적 구조라는 점에 있다. 즉, 세계를 현상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로 나누고 있는 입장을 말함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사는 중에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그들을 그들이게 하는 원인에 해당되는 어떤 초월적 존재가 그들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원형에 해당되는 존재가 그가 말하는 이념(Idea)이다.
이와 같은 사고는 르네상스 이전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르네상스라는 ‘사고의 혁명’ 속에서 미술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그 같은 시대적 환경에서 위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나타난다.
그는 “모방의 대상인 사물과 가장 유사한 회화가 가장 칭찬받을만한 것이며, 나는 자연의 사물을 개선하려는 화가들을 논박하기 위해 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라고 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던 과학으로서의 회화의 자격에 대한 시대적 견해를 표명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에게 있어서 인간의 모든 지식의 근원은 지각(perception) 혹은 관찰(observation)이다. 우리는 눈이라는 감각 기관을 통해 지각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레오나르도에 있어서 시각은 가장 고차적 기관이다.
이 또한 고대 그리스부터 물려진 철학적 사고의 계승이다. 그러한 지각을 가지고 우리는 자연에서 배운다. 그러므로 자연은 우리가 그로부터 배워야 할 위대한 스승이다. 그러한 자연에 대해 우리는 관찰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에 대한 지식을 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자연을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자연은 무한하여, 그 무한한 다양성을 완전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관찰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한한 자연 밑에 놓여 있는 법칙들을 발견하는 한 과정일 뿐이다.
다빈치는 자연이란 기본적으로 수학적으로 설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길이란 수학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있고, 조화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 같은 사고는 인간이라는 자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과학자가 자연과 우주의 조화로운 비밀을 벗겨내는 것처럼 화가도 수학적 방법에 기초하고 있기만 하다면 조화로운 인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는 사고가 자라기 시작했다. 따라서 모방이란 아름다운 것이다. 미술이 인문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나 조각가는 철학적 사변이나 이념은 전혀 없고 단지 손을 놀려 노동을 하는 숙련된 직인(banausos 職人) 에 지나지 않았다. 플라톤은 미술을 하는 사람을 천박한 노동자 계급의 한 부류로 생각했다.
형이상학의 특징은 이원적 구조라는 점에 있다. 즉, 세계를 현상적 세계와 초월적 세계로 나누고 있는 입장을 말함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사는 중에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그들을 그들이게 하는 원인에 해당되는 어떤 초월적 존재가 그들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원형에 해당되는 존재가 그가 말하는 이념(Idea)이다.
이와 같은 사고는 르네상스 이전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르네상스라는 ‘사고의 혁명’ 속에서 미술에 대한 개념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그 같은 시대적 환경에서 위대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나타난다.
그는 “모방의 대상인 사물과 가장 유사한 회화가 가장 칭찬받을만한 것이며, 나는 자연의 사물을 개선하려는 화가들을 논박하기 위해 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라고 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던 과학으로서의 회화의 자격에 대한 시대적 견해를 표명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에게 있어서 인간의 모든 지식의 근원은 지각(perception) 혹은 관찰(observation)이다. 우리는 눈이라는 감각 기관을 통해 지각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레오나르도에 있어서 시각은 가장 고차적 기관이다.
이 또한 고대 그리스부터 물려진 철학적 사고의 계승이다. 그러한 지각을 가지고 우리는 자연에서 배운다. 그러므로 자연은 우리가 그로부터 배워야 할 위대한 스승이다. 그러한 자연에 대해 우리는 관찰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에 대한 지식을 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자연을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자연은 무한하여, 그 무한한 다양성을 완전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관찰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한한 자연 밑에 놓여 있는 법칙들을 발견하는 한 과정일 뿐이다.
다빈치는 자연이란 기본적으로 수학적으로 설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길이란 수학을 통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있고, 조화는 아름다운 것이다.
이 같은 사고는 인간이라는 자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과학자가 자연과 우주의 조화로운 비밀을 벗겨내는 것처럼 화가도 수학적 방법에 기초하고 있기만 하다면 조화로운 인간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는 사고가 자라기 시작했다. 따라서 모방이란 아름다운 것이다. 미술이 인문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저작권자 2012.10.29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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