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6일 토요일

카페인은 꿀벌 ‘정신’도 맑게 한다

카페인은 꿀벌 ‘정신’도 맑게 한다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20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필자는 십여 년 전 우연히 ‘The World of Caffeine(카페인의 세계)’이란 책을 구해 읽다가 무척 흥미로운 그림 한 장을 보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 책의 14장 ‘카페인과 식물계’는 몇몇 식물이 왜 카페인을 만드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물론 사람이 차나 커피를 즐기라고 그런 것은 아니다. 식물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다.

즉, 식물은 말 그대로 이동을 할 수 없으므로 천적과 맞서 싸우는 유일한 수단은 화학전밖에 없다. 따라서 카페인은 박테리아와 곰팡이, 해충을 억제하기 위한 화학무기 가운데 하나다. 카페인의 좀 더 화학적인 이름은 트리메틸크산틴(trimethylxanthine)으로 알칼로이드의 일종이다. 알칼로이드는 질소를 함유한 분자로 염기성을 띠고 쓴맛이 난다. 따라서 식물의 잎이나 열매가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으면 너무 써서 피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다른 먹을 게 없어서 할 수 없이 먹다보면 카페인의 독성으로 신경계가 교란돼 행동 이상을 보이고 심하면 죽게 된다.
▲ 정상 거미가 지은 거미집(왼쪽)과 카페인을 과다 섭취한 거미가 지은 거미집(오른쪽). 벌레의 신경계를 교란하는 카페인의 강력한 효과를 알 수 있다. ⓒ위키피디아

필자가 책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그림은 향정신성 약물에 노출돼 신경계가 교란된 거미가 지은 집의 모양이다. 대마초, 벤제드린, 클로랄 하이드레이트, 카페인에 각각 노출됐을 때 지은 집들을 보면 아름다운 방사대칭을 보이는 정상 거미집에서 벗어나 있는데 특히 카페인은 그 정도가 심하다. 굴대통과 바퀴살이라는 거미집의 기본 구조조차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독한 약물을 사람들은 커피나 차를 마시며 매일 흡수하고 있는데도 멀쩡한 걸 보면 사람은 카페인의 독성작용에서 예외적인 존재라는 말인가. 대신 다른 방식으로 작용해 졸음을 쫓아주고 정신을 맑게 하는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건 아닐까.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벌레와 사람이 보이는 반응의 차이는 섭취한 카페인의 상대적인 양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벌레가 잎을 갉아먹듯 주식으로 사람이 찻잎을 먹었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찻잎의 카페인 함량은 약 3.5%로 300그램만 먹어도 치사량인 10그램의 카페인이 몸 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은 기호식품으로 소량의 카페인(커피 한 잔에 대략 100밀리그램, 차 한 잔에 50밀리그램)만을 섭취하므로 별 문제가 없다. 만일 벌레도 사람이 먹는 양에 해당하는 카페인만을 섭취한다면 신경계 교란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사람처럼 정신이 맑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벌레가 기호식품으로 차나 커피를 즐긴다는 보고는 없지만.
▲ 카페인은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인 아데닌과 구조가 비슷해 뉴런의 아데닌 수용체에 달라붙어 아데닌의 작용을 방해한다. 그 결과 낮은 농도에서는 정신을 맑게 하고 기억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강석기

화밀에 커피보다 약간 낮은 수준 카페인 존재
그런데 과학저널 ‘사이언스’ 3월 8일자에 희한한 연구결과가 실렸다. 꿀벌이 마치 사람이 그러는 것처럼 카페인이 소량 들어있는 음료를 먹은 덕분에 기억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벌집 한 구석에 차린 카페를 발견했다는 내용은 아니다. 꿀벌이 찾는 카페는 코페아속(커피나무) 식물이나 감귤류 식물의 꽃.

이들 식물의 꽃 속 화밀에는 카페인이 소량 들어있다는 사실이 10여 년 전 밝혀졌는데 그 이유는 미스터리였다. 연구자들은 커피나무류 3종과 감귤류 4종의 화밀에 들어있는 카페인의 농도를 분석했는데 0.003~0.253밀리몰 농도였다. 참고로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0.3밀리몰 농도 수준이다. 곤충을 쫓아낼 정도의 농도라면 화밀을 모으면서 수분을 도와주는 꿀벌도 온전치 못할 것이므로 그렇지 않은 거야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마치 커피 속의 카페인 함량처럼 ‘적절한’ 농도로 화밀에 카페인이 들어있다는 게 그냥 우연일까.

영국 뉴캐슬대 신경과학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여기에 뭔가가 있다고 판단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화밀 속에 들어있는 카페인은 꿀벌이 꽃향기를 더 잘 기억하게 만든다는 것.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책을 읽으면 내용이 머리에 더 남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연구자들은 꿀벌이 꽃향기와 설탕물을 연결짓도록 훈련을 시켰다. 즉 특정 꽃향기와 함께 설탕물을 제공해 나중에 꿀벌이 그 꽃향기를 맡으면 주변에서 설탕물을 찾게 만든 것. 이때 한 무리는 그냥 설탕물을, 다른 한 무리는 0.1밀리몰 농도의 카페인이 들어있는 설탕물을 제공했다. 훈련을 마치고 10분 뒤 테스트를 하자 두 무리 모두 꽃향기를 맡자 대부분 설탕물을 찾았다.

그런데 하루, 즉 24시간이 지난 뒤 테스트를 하자 그냥 설탕물로 훈련한 무리는 20%만이 설탕물을 찾았지만, 카페인이 들어있는 설탕물로 훈련한 꿀벌들은 60% 가까이가 설탕물을 찾았다. 즉, 특정 꽃향기가 나면 근처에 설탕물이 있다는 걸 기억한 꿀벌의 비율이 카페인 유무에 따라 3배나 차이가 난 것이다. 3일 뒤 테스트에서도 두 무리 사이에는 2배의 차이가 났다. 결국 화밀에 들어있는 소량의 카페인이 꿀벌의 장기 기억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카페인의 작동 메커니즘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먼저 꿀벌의 더듬이에는 꽃향기를 감지하는 후각 수용체가 분포해 있어 뉴런(신경세포)을 통해 정보를 뇌로 보낸다. 이 정보는 버섯체라는 뇌의 영역에서 단맛을 감지해 활성화된 보상경로의 정보와 통합돼 ‘어떤 꽃향기가 나는 곳에는 단물이 있다’는 기억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

이때 화밀에 들어있는 카페인이 후각 정보를 버섯체로 전달하는 뉴런이 더 활발하게 작동하게 만들어준다고. 즉, 이 뉴런표면에는 아데노신 수용체가 있는데 카페인은 이 수용체에 달라붙어 작용을 방해한다. 카페인의 분자구조가 아데노신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용하는 물질을 길항제라고 부른다. 참고로 아데노신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신경전달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흥미롭게도 사람의 경우 카페인이 잠을 깨게 하거나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를 내는 것 역시 아데노신 수용체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원래 아데노신은 뉴런이 제대로 활동할수록 많이 만들어져(ATP라는 에너지 분자가 소모되면서 아데노신이 된다) 뉴런과 주변 세포의 아데노신 수용체에 달라붙어 뉴런의 활동을 둔화시킨다. 일을 많이 하면 피곤하고 졸리는 것도 뇌세포에 아데노신 농도가 높아진 결과다. 결국 신경계는 아데노신이라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을 통해 뇌의 활동이 정도를 벗어나지 않게 조절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적당한 시간에 적당한 양의 카페인을 섭취하는 건 일의 능률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지만 부적절한 시간이나 지나친 섭취는 뇌를 쉬지 못하게 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커피나무나 감귤류처럼 카페인을 합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식물이 유독 꽃의 화밀에만 곤충의 기억력을 높이는 수준의 적정한 농도의 카페인을 분비하는 수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식물의 입장에서 꿀벌 같은 곤충을 불러들이는 건 종을 유지하고 번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다. 따라서 여러 식물 종들은 꿀벌을 두고 유치 경쟁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꽃을 더 향기롭게 하거나 눈에 잘 띄게 하고 화밀을 더욱 달콤하게 하는 방법이 전부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애초에 방어물질로 만들었을 카페인을 이용해 꿀벌이 자신의 꽃향기를 더 잘 기억하게 만드는 전략이 발견된 것이다.

인류는 수천 년 전 찻잎을 말려 우려내 차를 만들어 마시고, 그 뒤 커피콩을 볶아 커피를 내려 마시며 식물의 방어물질을 기호식품의 각성효과로 이용하는 유일한 지혜로운 종(호모 사피엔스!)이라고 자화자찬해 왔다. 그러나 이번 발견은 식물이 이미 수천만 년 전 이런 변용을 고안한 ‘원조’임을 보여주고 있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 kangsukki@gmail.com

저작권자 2013.03.1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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