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1일 월요일

우리나라의 원동력, 선비정신에

우리나라의 원동력, 선비정신에

한국연구재단 석학인문강좌



선비정신은 오랫동안 내려온 우리의 고유 전통이다. 왕조의 장수의 비결은 선비정신에 있다. 한국사의 왕조는 보통 500년 이상 장수했는데, 그 비결은 선비정신에 있다.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한국연구재단
인문학의 대중화와 진흥을 목적으로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 올해 첫 번째 강좌가 지난 9일 광화문 서울 역사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 교수는 ‘종교와 철학에 담긴 선비정신’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했다. 아래 내용은 한영우 교수의 강의를 요약한 것이다.

왜 선비정신을 알아야 하는가?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선비정신에 있다. 대한민국이 광복 후 60년도 안되어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하여 '한강의 기적'을 가져온 원동력은 무엇보다 치열한 교육열, 성취욕, 근면성, 정치의 공익성, 지도층의 도덕적 청렴성 등을 숭상하는 선비정신의 결과이다.

큰 배는 큰 물이 있어야 뜨는 것이라면, 대한민국이라는 큰 배를 띄운 힘은 수천 년간 축적되어온 한국인의 선비정신과 서구의 과학기술 및 합리주의가 결합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선비정신은 자연사랑과 생명사랑에서 출발하여 홍익인간의 공동체적 윤리로 발전하고, 여기서 정치의 공익성 인정(仁政)을 강조하는 민본정치로 승화되었다. 이런 정신은 극단적 속물주의와 사회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미래문명의 대안으로도 유효하다.

선비라는 말은 유교와 불교 전래 이전부터 있었다
선비라는 말은 유교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고유어로서, 한자로는 선인(仙人) 또는 선인(先人)으로 기록됐다. 삼국사기를 보면 “평양은 선인 왕검의 택(宅)”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단군왕검이 우리나라 최초의 선비임을 말해준다.

단군시대의 종교는 무교(巫敎)였고, 단군도 무당이었으므로 최초의 선비는 무당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무교의 선비정신을 집약시킨 것이 단군신화이므로 선비정신의 원초적 뿌리는 단군신화에 담긴 건국정신이다.

삼국시대에는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면서 무교와 결합하여 새로운 선비가 출현했다. 즉 무불유(巫佛儒)가 결합된 새로운 종교적 무사단체가 출현했는데, 이들을 선비로 불렀다. 고구려의 선인, 신라의 선랑(仙郞: 화랑도) 등이 곧 선비이다. 아마 백제에도 비슷한 집단이 있었을 것이다.

신라의 원광법사가 지었다고 하는 세속오계나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風流道), 또는 고려의 팔관계율(八關戒律) 등이 고대적, 중세적 선비정신의 표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유교가 들어올 때 사(士)라는 용어가 함께 들어오면서 이를 천자문에서 선비로 번역했다. 16세기 중엽 역관학자인 최세진(崔世珍)이 쓴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사(士)를 도사(道士)로 번역했다.

중국에서 문인(文人)을 가리키는 사(士)가 한국에서는 선비나 도사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도사는 중국식 도교의 신봉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군 이래의 한국적 도교를 이르는 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선비라고 하면 조선시대 유학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선비를 이렇게 좁게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유학자가 선비의 일부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유학자는 체질적으로 중국의 유학자와 다르다. 이미 무불유(巫佛儒)가 융합된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유학자는 중국 유학자와 사상이 다른 것이다.

선비정신은 집권층과 평민 사이에 모두 공유되고 있으면서도, 서로 간에 약간의 사상적 거리가 있었다. 평민사회에서는 수평적 조직의 종교행사, 가무놀이, 군사무예, 농업협동, 장례협동 등을 합친 두레문화로 흘러간 반면, 집권층은 지도층의 자기절제를 강조하는 도덕공동체를 지향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평민공동체는 유사시에는 의병으로 나타나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는 그들이 평소에 두레문화로 결집되어 있고, 군사무예와 가무놀이를 합쳐서 훈련한 까닭이었다. 두레문화는 말하자면 삼국시대 화랑도의 유풍이 민속으로 전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은 서구적 교육을 받으면서 선비정신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체질적으로는 무불유가 잠재적으로 핏속에 흐르고 있어서 문화적 유전인자로 남아 있다고 본다. 다만, 교육수준의 차이게 따라, 그 반응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선비정신은 음양오행의 우주관에서 비롯
▲ 선비는 유교가 전래되기 전에도 존재했다. 사진은 조선시대 유학자 율곡 이이. 

단군신화에서 천지인을 하나로 보는 이유는 천지인이 모두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을 공유하고 있어 생명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우주관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늘도 살아 있고, 땅도 살아 있으며, 인간도 살아 있으므로, 우주는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하늘도 사랑하고, 땅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곧 자연에 대한 사랑이다. 이는 서양 과학에서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것과 다르다. 하늘에는 달과 해가 음양이고, 수성(水星), 화성(火星), 목성(木星), 금성(金星), 토성(土星)이 오행이다. 천문학은 바로 음양오행을 가지고 하늘의 생명체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땅에는 강과 산이 음양이고, 오행도 당연히 땅 속에 있다. 풍수지리학은 음양오행을 가지고 땅의 생명체적 이치를 설명하고, 어디가 살기 좋은 명당인가를 평가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풍수지리학은 일종의 생명지리학이다.

풍수지리학은 일정한 과학적 근거가 있는 이론이다. 특히 산수배합이 뛰어난 한국의 지형에 가장 잘 들어맞는 특성이 있어서 중국이나 일본보다는 한국에서 특히 성행하게 된 것이다. 풍수지리가 민족지리학의 성격을 갖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 풍수지리학을 중흥시킨 신라말기의 승려 도선(道詵)은 전국을 답사하면서 어디가 명당인가를 이론화시킨 인물이니 그이야말로 민족지리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명당(明堂)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쳐 가져 조선시대에는 무덤자리를 서로 빼앗는 일도 벌어지는 등 풍수지리의 역기능을 가져오기도 했다.

음양오행사상은 흔히 중국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팔괘(八卦)를 최초로 만든 것은 동이족 출신의 복희씨(伏犧氏)이고, 음양오행사상을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 기원전 4세기 춘추시대 산동지방 출신 동이족의 추연(鄒衍)이다.

태극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중국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 廉溪) 이후의 성리학자들인데, 성리학을 우리가 다시 받아들였으므로 마치 음양오행사상과 태극사상의 발상지가 중국인 것처럼 오해하게 된 것이다.

한자를 순수한 중국문자로 이해하는 것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한자의 뿌리는 동이족 국가인 은나라에서 만든 갑골문자이다. 그러므로 한자 또한 동이족의 후손인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낯선 문자일 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중국문화로 알려진 음양오행, 유교, 한자 등은 엄밀히 말하면 동이족이 창시하고 중국인이 발전시킨 한중(韓中) 합작문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음양오행, 유교, 한자문화 등에 쉽게 적응하고, 중국인보다도 더 철저하게 실천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문화의 저변을 형성해
한국문화의 뿌리와 저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천지인 합일사상, 음양오행사상, 홍익인간이다. 그런 정서를 보여주는 원초적이고 대표적인 이야기가 단군신화이며, 그 사상의 형체를 선비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사상을 뿌리로 하여 불교와 유교가 들어와 융합되면서 선비정신은 한 단계 진화되어 공익사상(公益思想), 민본사상(民本思想)으로 진화하고, 근대 이후로는 서양문화가 접합되어 현대적 선비정신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선비는 처음에는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삼국시대에는 무사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으며, 고려-조선시대에는 문사(文士)를 가리키는 말로 점차 바뀌어 갔다. 그러나 선비정신과 선비문화는 어느 특정 계층에게만 전승된 것은 아니고, 모든 계층에 확산되었다.

오늘날에는 모든 한국인이 선비정신을 문화적 유전인자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비정신은 한국인의 체질이자 국민성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3.03.11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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