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1일 일요일

사회적 고립은 외로움보다 해롭다!

사회적 고립은 외로움보다 해롭다!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22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지성인은 개인주의의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고독은 활력을 불어넣지만 고립은 우리를 무기력하고 메마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 ‘공부하는 삶’

얼마 전 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책들을 구경하다가 표지가 누런 재생지라 오히려 눈에 띤 책을 집어 들었다. 앙토냉 질베르 세르티양주라는 프랑스 신학자가 쓴 ‘공부하는 삶’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원서는 거의 100년 전인 1920년에 나왔다. 이렇게 오래 된 책이 뒤늦게 번역된 사유가 궁금해 역자 서문을 읽어보니, 이 책은 서구권에서 소위 지성인이 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침서로 오늘날에도 사랑받고 있다고 한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한 권 사 읽고 있는데 예상대로 지적인 삶을 살려면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하고 그러자면 쓸데없는 자리를 만들지 말라는 조언이 들어있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무익한 외출을 피하라”며 “내적 고독과 고요는 정신의 두 날개다”라고 쓰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다음 장에서는 “현실의 감각을 유지하라”며 “지나치게 고립된 사람은 점점 소심해지고 추상적으로 변하고 약간 괴짜가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사유하는 사람인 당신은 반드시 세상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평정을 잃는다”고 덧붙이고 있다. 진리 탐구를 위해 헌신할 시간을 확보하되 그렇다고 책과 씨름하며 방 안에 처박혀 있지는 말라는 말이다.
▲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적 네트워크를 더 많이 구축해야 한다. ⓒScienceTimes
그런데 세르티양주의 조언은 지성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닌가보다. 1인 가족이 급증하는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은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데, 최근 수년 사이 사회적 고립이 개인의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 건강을 해친다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는 사회적 고립이 외로움보다도 수명을 단축시키는 데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은 비슷한 것 아닌가?’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겠지만 그렇지 않다. 엄밀히 말하면 둘은 상관관계는 있지만 다른 개념이다. 사회적 고립은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상황이다. 즉 결혼 여부, 혼자 사는가 여부, 한 달에 한 번 이상 만나는 친구 숫자, 가입한 동호회 숫자, 종교 활동 여부 등을 조사해 한 사람의 사회적 고립도를 ‘산출’할 수 있다.

반면 외로움(loneliness)은 심리적 상태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도 외로움을 안 느낄 수 있고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대기업에서 일하면서도 외로움에 흐느낄 수 있다. 물론 사회적 고립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대체로 외로움도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립된 사람 사망률 50% 더 높아
영국 런던대 역학·공중보건학과 앤드류 스텝토에 교수팀은 2004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영국노화장기연구(ELSA)에 참여한 6천500명의 남녀 가운데 2012년 3월까지 사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이 사망률에 어떤 연관성을 보이는지 알아봤다. 이 기간 동안 918명이 세상을 떠나 사망률은 14.1%다.
ⓒ강석기

연구자들은 참여자들을 사회적 고립이나 외로움 척도가 높은 집단과 낮거나 중간인 집단으로 나눈 뒤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사회적 고립도가 높은 집단은 이 기간 동안 21.9%가 사망한 반면 낮거나 중간인 집단은 사망률이 12.3%에 불과했다. 외로움의 경우는 높은 집단이 19.2%, 낮거나 중간인 집단은 13.0%로 역시 차이를 보였다. 그런데 사회적 고립이나 외로움은 나이나 소득, 건강상태와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이런 결과를 꼭 사회적 고립이나 외로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나이가 많거나 미혼이고 교육수준이 낮거나 소득이 적은 사람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을 확률이 높다. 또 만성호흡기질환 같은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외로움도 경향은 비슷하다.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나이와 성별뿐 아니라 재산과 교육수준, 결혼상태, 인종 같은 인구학적 요인과 암, 관절염, 우울증 등 건강지표를 따로 떼어낸 뒤 사망률에 미치는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의 영향을 분석했다. 그 결과 사회적 고립은 정도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그 자체로 높은 사망률에 상당한 기여를 하는 요소로 나타난 반면 외로움 자체는 사망률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외로움이라는 주관적인 경험은 사회적 고립과 사망률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는 주된 메커니즘이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렇다면 사회적 고립의 어떤 측면이 사망률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일까.

연구자들은 생활습관이 연관성이 클 것으로 추정했다. 즉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은 흡연과 활동부족, 부실한 식사 같은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접촉이 없을 때 이런 행동에 빠져들기 쉽기 때문이다. 또 혼자 살면 급성질환이나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제대로 대처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망의 위험이 높아진다.

연구자들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 둘 다를 줄이는 게 필요하지만 사망률만을 놓고 봤을 때는 사회적 고립을 줄이는 데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사회적 네트워크를 더 많이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이게 쉬운 일일까.

논문에 나와 있듯이 미국의 경우 혼자 사는 사람의 비율은 1970년 17%에서 2011년은 28%에 이른다고 한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 상의할 사람이 없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도 1985년 10%에서 2004년 25%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사회적 고립이 가속화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부터 사회적 고립과 건강의 상관관계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를 진행해온 미국 하버드대 리자 버크먼 교수는 “뚜렷한 차이를 느낄 정도로 사회적 네트워크를 바꾼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며 “진실은 사람들이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매우 서툴다는 것”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회적 고립이 이래저래 해롭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오히려 그쪽 방향으로 급격히 진행하고 있는 사회의 변화를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고독하되 고립되지는 말라”는 세르티양주의 ‘공부하는 삶’의 100년 전 글귀가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 kangsukki@gmail.com

저작권자 2013.03.2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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