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을 작품 속으로
에두아르 마네 ‘1867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신문은 사건을 생생하게 보도하여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지만 독자로 하여금 집안에서 세계의 동향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문 보도를 통해 충격을 받은 에두아르 마네는 역사의 현장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1867년 멕시코에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보도한 신문을 읽고, 비극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결심한다.
전통적으로 황제는 혈연관계 때문에 등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은 그보다는 나폴레옹 3세의 행동주의와 멕시코 보수 세력의 단합으로 만들어진 황제다.
프랑스는 멕시코의 진보주의 지도자 베니토 후아레스가 외채를 갚지 못하자 군사작전을 펼쳐 승리를 거두면서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세프의 동생이자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이탈리아 롬바드리아-베네토의 총독이었던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추대한다. 이에 막시밀리안은 1864년 6월 멕시코에 입성한다.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멕시코 북부 지역의 광산 때문이었다. 이미 멕시코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 3세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멕시코 보수 세력들은 자유주의 세력과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두 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막시밀리안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국제 정세의 변화로 나폴레옹 3세가 유럽에 신경을 쓰는 동안 미국이 후아레스를 지원했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막시밀리안에게 유럽으로 돌아오라고 권유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거절한다.
어렵게 살고 있던 인디오들의 삶을 보면서 멕시코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 막시밀리안은 목숨을 위해 자신을 지지해줬던 사람을 버리는 것은 황제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의 결심과는 달리 외국의 내정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공화파에 의해 그는 체포됐고, 1867년 6월 19일 총살형에 처해진다.
마네는 신문에 보도된 기사의 내용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구성을 가지고 왔다.
자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문 보도를 통해 충격을 받은 에두아르 마네는 역사의 현장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1867년 멕시코에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보도한 신문을 읽고, 비극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로 결심한다.
전통적으로 황제는 혈연관계 때문에 등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은 그보다는 나폴레옹 3세의 행동주의와 멕시코 보수 세력의 단합으로 만들어진 황제다.
프랑스는 멕시코의 진보주의 지도자 베니토 후아레스가 외채를 갚지 못하자 군사작전을 펼쳐 승리를 거두면서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세프의 동생이자 1857년부터 1859년까지 이탈리아 롬바드리아-베네토의 총독이었던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추대한다. 이에 막시밀리안은 1864년 6월 멕시코에 입성한다.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 눈독을 들인 이유는 멕시코 북부 지역의 광산 때문이었다. 이미 멕시코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 3세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막시밀리안을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멕시코 보수 세력들은 자유주의 세력과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두 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막시밀리안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국제 정세의 변화로 나폴레옹 3세가 유럽에 신경을 쓰는 동안 미국이 후아레스를 지원했고, 결국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막시밀리안에게 유럽으로 돌아오라고 권유하지만 막시밀리안은 거절한다.
어렵게 살고 있던 인디오들의 삶을 보면서 멕시코를 위해 살기로 결심한 막시밀리안은 목숨을 위해 자신을 지지해줬던 사람을 버리는 것은 황제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의 결심과는 달리 외국의 내정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공화파에 의해 그는 체포됐고, 1867년 6월 19일 총살형에 처해진다.
마네는 신문에 보도된 기사의 내용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구성을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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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1868~1869년, 캔버스에 유채, 257*302, 만하임 시립미술관 |
왼쪽 멕시코 모자를 쓴 막시밀리안 황제가 가운데 있고, 그의 곁에는 두 장군이 있으며 토마스 메히아는 총을 맞고 쓰러지고 있고 미구엘 미라몬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멕시코 병사들은 총을 쏘고 있고, 프랑스 군복을 입은 병사는 총을 장전하고 있다.
창백한 얼굴이지만 의연하게 서 있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자세는 순교자를 상징한다. 막시밀리안 황제는 마지막 순간 ‘멕시코인들이여. 나는 오늘 멕시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죽노라. 멕시코 만세!’라고 외쳤다고 한다.
담에 기대어 많은 사람들이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구경을 하고 있다. 놀라지 않는 멕시코인들은 그들이 막시밀리안 황제가 내정 간섭이라 생각하고 있던 공화파라는 것을 의미한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에 프랑스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오른쪽 프랑스 하급 병사를 그려 넣었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총을 장전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음을 나타내고자 했다.
이 작품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한동안 프랑스에서 전시되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의 실정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2012.10.09 ⓒ ScienceT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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